< 사랑 후에 사랑 >
4화: 동거의 시작
꿈을 꾸었다. 나는 유리 벽 너머에서 컴퓨터 모니터가 부서지는 과정을 보고 있었다. K는 아니었다. 끝이 둥글고 새하얀 모니터였다. 새것에 가까운 모니터가 단계별로 분해되었다. 커다란 망치에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쏟아져 나온 볼트와 너트, 온갖 부품을 한데 모아 분류하고 얇은 유리 상판을 뜯어내고 작은 돌기처럼 돋아난 송곳으로 수십 개의 구멍을 내고. 잘게 부서지는 모니터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마. 아직 죽으면 안 돼. 이리로 와. 내게로. 내 옆으로 돌아와.
길게 이어진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갔다. 불가마 속으로 들어간 나무관의 모서리를 축축하게 쳐다보듯이. 한 줌 재로 변한 모니터를 향해 열렬히 오열했다. 이를 딱딱 부딪치고, 손발을 바르르 떨면서 은연중에 ‘K’라고 소리쳤다. K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K를 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귀를 틀어막은 채 쪼그려 앉아서 내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견딜 수 없었다. 슬픔은 커녕, 침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메말라가고 있었다. 고열 비슷한 외로움을 느끼며 홀로 견디고 있었다. 잔인한 공간이었다.
01
“ 전화 왔습니다, 전화 왔습니다! ”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잠을 잔 것 같진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기절해 있다가 허겁지겁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얼떨떨했다. 누렇게 바랜 벽지와 깔끔히 정돈된 집안, 빛이 고르게 쏟아지는 창문, 이것저것 다 낯설었다. 나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살핀 뒤, 손바닥을 쥐었다 펴 보았다. 손마디가 삐거덕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어쩐지 찝찝한 위화감이 들어서 냉큼 이불을 들치자, 협탁이 작게 흔들렸다.
“ 잠시 뒤, 전화 연결이 자동으로 끊깁니다. ”
“ 아, 잠깐! ”
나는 다급히 핸드폰을 쥐었다. 가만히 앉아서 ‘연결해줘’라고 말하면 되었을 텐데. 상태가 좋지 않은 관계로, 핸드폰을 더듬어가면서 직접 전화를 연결했다. 그리고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숨을 훅 훅 내쉬었다.
“ 여, 여보세요? ”
“ 엄청 잤네요. ”
스피커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확 녹아내렸다. 나는 그제야 협탁 밖으로 떨어진 생수병을 주웠다. 또, 베개에 붙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잘 생각나지 않았다.
“ 박사님, 언제 돌아가셨어요? ”
“ 글쎄, 저녁 11시쯤? 사라가 제대로 잠든 걸 확인한 후, 요깃거리를 만들고 나갔죠. ”
‘요깃거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귀신에게 홀린 듯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샌드위치가 있었다. 식빵 끄트머리를 깨끗이 잘라내고, 햄과 양파, 양상추 어느 것 하나 빠진 게 없는 완벽한 클럽 샌드위치였다. 나는 랩으로 꼼꼼히 싸맨 샌드위치 접시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 정말 죄송해요. ”
“ 괜찮아요. ”
노아 박사는 무언가를 마시며 대답했다. 후루룩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밋밋한 공기가 스피커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다.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찾아가서, 링거 바늘을 꽂고 경과를 살피다가, 환자의 집을 청소한 뒤, 아침까지 만드는 것이.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듯, 덤덤하게 ‘집이 워낙 깨끗해서 할 게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만든 샌드위치를 들추어 양파를 빼내면서 거푸 사과했다.
“ 면목이 없어요, 박사님. ”
“ 왜요? ”
“ 일주일간 잠수를 타고 박사님을 불러서… ”
“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면목 없는 일은 따로 있잖아요. ”
‘진짜’라는 말에서 꿀꺽, 침을 삼켰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덩달아 방 안이 어두워졌다. 개기 일식이 시작된 것 같았다. 땅 아래로 침몰하는 태양이 어둠을 한 덩이씩 쏟아내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나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주방에 서서, 숨을 참았다.
“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
“ 사라가 거짓말한 만큼. ”
노아 박사의 웃음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뇌 사진을 보여주며 약에 관해 설명하던 그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시뻘겋게 핀 맨드라미를 대가리 채 문댄 것처럼 말간 입술로 연실 조잘댔다.
사라, 진심으로 바래요, 약은 단기 기억 상실증을 유발하고, 믿어줘요, 신경 안정제와 함께 상담을, 내 진심, 상담사의 메일이 날마다, 행복하길, 나는, 사라.
큰일 났다. 과거가 뒤죽박죽으로 꼬였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목을 벅벅 긁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엊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대한 차분하게 시간을 더듬었다. 하지만 해열제와 함께 섞여 있던 다량의 약이 머릿속에서 펑! 터졌다.
“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겁주고 싶지 않으니깐. ”
“ 아버지에게 이를 생각이에요? ”
“ 하하, 아니요. 저도 동범이라서. ”
나는 노아 박사의 대답을 들으면서 손을 털었다. 손은 차게 식고 있었다. 손목을 감싼 퍼런 핏줄이 허옇게 질려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세게 휘몰아치던 피의 회오리가 꿀렁대며 움직임을 멈췄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나는 갈대로 풀피리를 불 듯 숨을 내뱉고, 반으로 갈라진 샌드위치를 콱 움켜쥐었다. 양상추 밑으로 질퍽한 머스터드가 새어 나왔다. 꼭 칼에 베인 상처처럼 길쭉하게, 노란 물이 줄줄 샜다.
“ 제가 K를 몰래 빼돌렸거든요. 사라에게 줄려고. ”
02
노아 박사는 자신의 사비로 K를 샀다고 했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인공지능 칩을 산 것이다. K가 직접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쓰던 작은 체계를 사서, 인간형 본체에 삽입한 뒤, 도우미 로봇이라고 거짓 신고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연못 밖으로 튕겨 나간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며, ‘세상에, 이럴 수가’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 사라의 부탁대로 했어요. ”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약 내가 누굴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면, 기꺼이 심장을 도려내 주었을까. 애당초 약에 취한 환자의 혼잣말을 진지하게 해석한 의사는 무척 수상하다! 머릿속을 장악한 이성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불안을 부추겼다.
“ 아, 아버지께는 뭐라고 하시려구요. ”
“ 지금부터 같이 생각해봐야죠. ”
“ 뭐라고요? ”
순간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흰자위가 붉어진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살펴보았다. 010•9986… 노아 박사의 번호가 맞는데, 영 이상했다. 다른 사람 같았다.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양아치처럼 어리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별다른 수가 있나요. 회장님은 엄청난 원칙주의자이신데. ”
나는 고추냉이로 가득한 사발에 얼굴을 푹 담그고, 돼지 같이 킁킁댄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차갑게 얼어붙고, 심장은 속도를 높이며 쿵쾅댔다. 목젖은 깔딱깔딱 움직이면서 버둥대기 시작했고, 온몸이 제각기 따로 놀았다.
“ 난, 나는! 적어도 박사님이 뭔가 있을 줄 알았어요! ”
“ 에이…. 전 그냥 의사예요. ”
노아 박사는 왕좌에서 떨어진 귀족처럼 말했다.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논문을 많이 썼고, 트라우마 센터에서 부원장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것뿐이라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눈 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하면 짐을 챙겨야 한다는데, 믿을 수 없었다.
“ 박사님은 기업을 물려받을 확률이 높으실 텐데, 정말 믿을 구석이 없단 말이에요?! ”
“ 네, 진짜 없어요. 있다면 K를 빼돌리기 전에 사용했겠죠. ”
나는 머스터드로 범벅된 손으로 샌드위치를 접시째 던져버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부엌 바닥 밑으로 떨어졌다. 넓적한 햄이 잘린 혓바닥처럼 널브러졌고, 양상추와 토마토는 살갗을 뚫고 나온 장기처럼 흐느적거렸다.
“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요. ”
“ 천천히 생각해봐요. ”
노아 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웬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누가 올 예정인가보다.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르는 와중에, 사람을 만나야 한다니. 물론 의사가 그의 직업이고, 시간은 계속 흐르기 때문에 일정에 맞춰 환자가 오겠지만. 그의 일상이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 어쩐지 불편했다. 산산조각이 난 샌드위치 접시 위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 금방 들킬 거예요. ”
“ 뭐, 그건 가 봐야 알겠죠. ”
“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
“ 그래도 우리가 이러는 동안, K는 사라를 향해 오고 있을걸요. ”
K가 오고 있어요. 아마 지금은 고속도로에 있으려나, RX 기업의 공장은 여러 군데 있잖아요. 인천에 많고, 대구랑 대전에도 좀 있고, 제주도에도 있던가. 아, 장소는 상관없지. 사라가 K를 기다리는 게 중요해요. 나와 회장님께 거짓말을 하고, 귀여운 술수를 부릴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K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눈물이 주룩 흘렀다. 멈출 수 없었다. 심지어 왜 우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나는 노아 박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두 뺨을 축축하게 적셨다. 이따금 물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입안을 간지럽혔으나, 개의치 않았다. 본능에 충실했다. 노아 박사는 내 울음소리를 들으며 환자를 기다렸다. 마치 자신이 베푼 은혜의 무게를 재듯이.
03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K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벽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던 벽지를 싹 갈아 치웠고, 계절에 맞는 인테리어 소품을 주문했다. 이참에 칙칙한 회색 블라인드도 버렸다. 투명한 린넨 커튼을 설치했다. 죽은 지 오래된 선인장은 뿌리째 뽑아서 버린 뒤, 새파란 골든 포토스를 심었다. 침구와 식기, 슬리퍼, 발 매트 하나하나 바꾸다 보니, 삼일이 훌쩍 지났다. K는 노아 박사가 예고한 시간대로 정확히 삼 일, 낮 3시에 도착했다.
“ 윤사라씨. ”
택배로봇의 소리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처럼 들렸다. 가슴이 마구 두근댔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는 게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몸이 시곗바늘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 시민 번호 M36089(박 노아)가 보낸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송장을 확인해 보시고… ”
“ 알겠어!
나는 인터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현관문이 드르륵 열렸고, 성인 남자정도의 커다란 택배 로봇이 상자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K였다. K를 든 로봇의 앞바퀴가 현관문 바닥을 천천히 긁었다. 덩달아 내 발꿈치가 움찔거렸다. 눈동자는 로봇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갔다. 비스듬히 열린 현관문 사이로는 낯선 바람이 불어서, 오른쪽 뺨을 차갑게 식혔다. 왼쪽 뺨은 미쳐 날뛰는 심장 때문에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물건은 어디에 둘까요? ”
“ 여기. 내 앞으로. ”
로봇은 내 손가락이 끝나는 지점에 K를 두고 나갔다. 집 안에는 나와 K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K가 들어있는 누런 상자였다. 나는 상자 근처를 배회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차분해 보이고 싶었다. 이왕이면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K를 만나고 싶다. 우울해 보이지 않고 발랄하게, 안녕,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말을 중얼대며 주섬주섬 상자를 열었다. K는 특수 포장지를 돌돌 맨 채,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 ... K? ”
포장지를 벗기는 손이 저절로 벌벌 떨렸다. 그래 봤자 사람 탈을 쓴 로봇이고, 인공지능 칩에 의지하여 감정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라고. 머릿속의 이성이 조소를 날리며 비웃었으나, 이상한 감동을 숨길 수 없었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면서 내 자식이라고 우기는 의붓어머니의 심정이 이런가. 틀리다, 그것보다 좀 더 사적인 감정이다. 일기장에 쓸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끈적하고, 순순하고, 뜨겁고, 수치스럽고, 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 내가 사라예요, 윤 사라. ”
나는 포장지가 벗겨진 K의 머리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K는 진짜 사람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 매끄러운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훑어보면, 쇠붙이 특유의 차가운 온도가 느껴졌다. 찌르르한 전율이 들었다. 두껍게 쌓인 눈밭을 만진 기분이었다.
“ ...사라. ”
K가 눈을 반쯤 떴다. 로봇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눈동자였다. 나는 K가 내뿜는 이질감에 매료되어 그대로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K는 처음부터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내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누구도 메꿀 수 없는 앙상한 샘에 물을 쏟아 부었다.
“ 드디어 만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