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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사랑 후에 사랑
작가 : 삼송이
작품등록일 : 2017.6.26

버스 가스 폭발 사고의 생존자, 윤 사라. 그녀는 19살 때 일어난 사고로 인해 기억 소거 수술을 받고 과거를 잃어버린다. 수술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던 중, 자신의 상담사가 일을 그만둔다는 메일을 받는다. 사라는 상담사를 만나기 위해 담당 의사인 박 노아에게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거대 기업 회장인 윤 태오를 찾아간다. 태오는 사라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고, 상담사 대신 노아 박사와 긴밀한 관계가 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한 사라는 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사라의 과거를 알고 있는 두 사람, 상담사 K와 노아 박사. 사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며 잃어버렸던 과거를 하나씩 기억해 나간다.

 
상담사 K(下)
작성일 : 17-07-03 19:08     조회 : 227     추천 : 1     분량 : 6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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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후에 사랑 >

 3화: 상담사 K(下)

 

  아직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달래면서 알량한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다못해 인간형 본체를 탑재한 A.I라면 어물쩍 넘어가리라.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손으로 메일을 보내고 있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와 노아 박사처럼 손발이 각각 두 개씩 있고, 마땅한 위치에 마땅한 신체가 있으면서 생각도 한다는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겠지. 나는 좀 더 세밀한 기준을 세웠다. 성공적인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노아 박사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 사라? ”

 

 노아 박사는 ‘괜찮나’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만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아주 낡은 컴퓨터가 모스부호를 보내듯 끔벅댔다. 그러자 그가 넙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축 늘어진 내 손을 콱 쥐어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 맺힌 땀방울이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 사라…. 나는 그냥 ….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요. 내 진심을 믿어줘요. ”

 

 나는 무언가를 원하는 그의 얼굴을 훑었다. 아주 느린 속도였다. 지구에서 쏘아 올린 보이저호처럼 천천히 태양계를 여행했다. 턱 끝에서부터 불룩 솟은 코의 작은 둔덕을 따라 미간, 반질반질한 이마,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부분, 검은 수풀에 가려진 허연 정수리. 그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기억으로 송출했다.

 

 01

 

  잠시 뒤, 사면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엔지니어 명찰을 멘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시멘트벽으로 감춰둔 문을 드르륵 연 후, 계단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노아 박사에게 친근한 악수를 하였다.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구멍 같은 공간을 비집고 나온 사람과 점심을 먹고, 휴가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노아 박사의 모습이 문뜩 떠올랐다. 숨이 막혔다. 그의 순수하고 편안한 미소가 꺼림칙했다. 좁은 방 안에 쌓인 그의 목소리 또한 듣고 싶지 않았다.

 

 “ 윤 회장님의 외동딸이십니다. ”

 

 노아 박사의 셔츠가 등 뒤로 바짝 붙었다. 나는 실 하나 빠져나오지 않은 빳빳한 셔츠가 조금씩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한쪽으로 일그러져서,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니었다. 이 괴상한 얼굴을 향해 엔지니어가 쓰던 모자를 슬쩍 올렸다.

 

 “ 문 아래로 내려가시면 말씀하신 모델이 있습니다. ”

 

 엔지니어는 자신이 열고 나온 문짝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옆으로 시꺼먼 어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남의 일기장을 멋대로 들춘 것처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위험한 호기심을 막을 수 없었다. 나를 기절 시킬 수 있는 충격적인 진실을 따라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 계단이 어둡네요. ”

 

 노아 박사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꽉 쥔 채 계단을 내려갔다. 다른 한 손으로는 앙상히 마른 노인의 목구멍처럼 비좁은 벽을 짚으면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지만 흔한 에어컨, 창문이나 센서등마저 없었다. 그래서 나와 노아 박사, 엔지니어의 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팔과 얼굴 위로 떨어졌다. 불쾌했다. 불편하고, 짜증나고 신경질 나면서 온몸의 털이 비쭉 비쭉 섰다.

  인간형 본체가 없으면 어떡하지. 멍청하게 생긴 내 핸드폰과 비슷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엊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준비한 감사카드는 키보드로 직접 쳐야 하나. 포옹은? 악수는? 하다못해 내가 받은 위로가 기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상담사 K가 내 인생에 있어서 아버지와 노아 박사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면서도. 그에게 은근한 의미로 남을 수 있길 바라는 복잡한 욕심을 없앨 수 없었다. 그를 생각하며 야릇한 포만감을 느꼈던 밤을 잊고 싶지 않았다.

 

 “ 이쪽으로 오세요. ”

 

 엔지니어가 계단 끝에 매달린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불빛을 보자마자 ‘헉’ 하고 얕게 소리를 질렀다. 비로소 때가 된 모양이다. 줄지어 앉아 있는 모니터 사이를 걸으면서 확신했다. 진즉에 잃어야 할 것을 잃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 여기서부터 F 열입니다. 저기 끝에 있는 게 A.201K이고요. ”

 

 노아 박사는 엔지니어의 설명이 끝나는 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계단에 있을 때보다 더 세게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손바닥을 가득 채운 미세혈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뜨거운 피를 잔뜩 머금어서 퍼렇게 물든 파이프의 내부를 보여주며,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거지.’라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

 

 “ 저기 끝에 있는 게 A.201K이래요, 사라. ”

 “ 저도 들었어요. ”

 “ 한번 가볼까요? ”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누런 형광등 조명을 받아서 네모나게 늘어진 그림자로 대신할 수 있었다. 상담사 K라고 해 봤자 다를 바 없다는 것. 그 또한 넓적한 머리를 이고 키보드를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사람의 감정을 흉내 내고 있었다. 모니터 어딘가에 삽입 된 인공지능 칩에 의지하여 슬픔과 외로움, 사적인 고독을 관통한 척 메일을 보내고 있다.

  이해합니다, 예민한 게 아니에요. 당연한 두려움입니다. 저는 알 수 있어요, 저도 비슷해요…

 사방팔방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기껏해야 열댓 명의 엔지니어뿐이었다. 그들은 유리 벽 안에서 덜 자란 쭉정이처럼 서서, 모니터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눈을 부릅떴다. 눈꺼풀이 닫히고 속눈썹끼리 맞물리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노아 박사는 물론, 오늘 처음 만난 엔지니어와 저 끝에 있는 상담사 K에게. 나의 실패를 완연히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02

 

  상담사 K를 만나고 사흘쯤 흘렀을까. 나는 평소처럼 정오가 다 되어서 눈을 떴고, 시커멓게 태운 식빵 쪼가리로 아침을 때웠다. 하루 대부분은 청소하는 데 할애했다. 딱딱하게 굳은 수건과 옷가지들을 죄다 빨았고, 제자리가 아닌 물건들을 찾아서 정리했다. 초저녁이 되면 냉장고 앞에 서서 식재료의 유통기한을 확인한 후, 다시 집어넣었다. 이 과정을 매일매일 반복했다. 어제 빨았던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수납함을 들춰서 물건을 켜켜이 쌓아 놓고, 몇 안 되는 음식들을 여기서 저기로 옮겼다. 위태로운 일상은 사흘 동안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발작이었다. 발작이 아니었다면 사흘을 넘기고, 한 달, 일 년까지 고립되고 싶었다. 어차피 기억에 남은 친구도 없으므로, 누구와 연락하지 않았다. 병원도 가지 않았다. 나는 멍청한 짓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날이 밝을 때까지 자기 비하를 했다. 약을 먹지 않은 덕분이었다. 약을 먹으면 가까운 과거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약을 끊었다. 약통과 핸드폰을 벽장에 치워 버리고, 엊그제의 일을 되뇌었다. 내 손을 부여잡고 천천히 움직이는 노아 박사의 입술부터 수천 개의 모니터 사이서 하얗게 질린 내 다리까지. 머릿속에 남은 잔상들을 길게 나열하여 복기했다. 거대한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텃밭을 헤집어보는 심정으로, 그런 연약한 마음가짐으로 자꾸 어제를 들췄다. 몸과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엉겁결에 일주일이 지날 무렵, 기어코 일이 터졌다. 엄청난 두통이 찾아왔다.

 

 “ 핸, 핸드폰…! ”

 

 나는 벽장을 신경질적으로 뒤졌다. 작은 돌부리조차 없는 밋밋한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는 것 같았다. 엄지손톱이 벌어지고, 우후죽순으로 쏟아진 물건들이 허벅다리에 떨어지면서 피부가 퍼렇게 물들었다. 아프지 않았다. 아예 감각이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지글지글 타오르는 목구멍을 열었다가 좁히길 반복하며 핸드폰을 찾았다.

 

 “ 문자...보내줘. 응급........ ”

 “ … ”

 

 핸드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퓨즈가 나간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배터리가 없었다. 한 주 동안 벽장 속 어둠에 방치된 채 차게 식은 모양이었다. 나 또한 방바닥에 쓰러져서 초라한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부정맥이 서서히 움찔거렸다. 작동을 멈춘 뇌 안에서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포기하지 말자, 살아야 한다.’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ㄴ..ㅗ....ㅇ..ㅏ...ㅂ..ㅏ...ㄱ..ㅅ...ㅏ..... ”

 

 나는 핸드폰의 비상 전원 버튼을 누르고 직접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거의 동물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었다면 애초에 약을 먹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고, 몸뚱이를 짐짝처럼 하대하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것을 후회했다. 고개 숙일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노아 박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에게 찾아간 것, 아버지의 말마저 무시한 채 좋을 대로 행동한 것, 상담사 K를 만나기 위해 준비했던 여러 가지, 섀도우, 하이힐, 유치한 감사카드, 향수와 불완전한 행복에 흠뻑 빠진 나, 아는 게 없는 나, 그냥 나. 이런 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너, K.

  마룻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볼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쓰러진 건지, 뒤로 넘어진 건지. 추측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이 부서졌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잘 준비를 했다. 창밖은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다. 몇 줄기의 빛이 두꺼운 블라인드 천을 뚫고 콧방울을 내리쬈다. 피가 주룩 흘렀다. 달고 비릿한 냄새가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K가 있었다. 방 안 어딘가에서 K의 숨소리가 들렸다. 바다가 백사장을 적시며 모래를 옮기듯 자연스럽게, ‘잘 해결될 거야, 괜찮아.’라고 속삭였다.

 

 03

 

  눈을 떴을 땐, 노아 박사의 다부진 팔뚝이 보였다. 그는 긴 셔츠를 대충 말아 올린 채, 링거 줄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뚝을 따라 눈동자를 느리게 굴리면서 잠꼬대하듯 인사를 건넸다.

 

 “ 박사님, 안녕하세요. ”

 

 인사가 끝나자마자, 노아 박사의 한쪽 팔이 슥 올라갔다. 이마를 짚고 있는 것 같았다. 셔츠의 팔 주름이 가슴팍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서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미간을 짚고 있는 그의 얼굴이 형광등 근처를 맴돌았다.

 

 “ 하…. 사라. ”

 

 한숨이 섞인 낮은 목소리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슬쩍 등을 돌려 누웠다. 노아 박사가 무슨 말을 하든, 할 말이 없었다. 무조건 내가 잘못한 일이었다. 그에게 예측할 수 없는 서늘한 구석이 있고, 아버지처럼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해도. 엄연히 지금껏 주치의로서 최선을 다 했는데, 집착이 심한 남자친구로 여기고 숨어버렸다. 그리고 죽음 비슷한 고비를 만나고서야 허겁지겁 연락했으니깐, 얼마나 최악의 환자인가. 나는 핑곗거리도 없을뿐더러, 나불댈만한 힘도 없었다.

 

 “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요. ”

 

 노아 박사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주절주절 떠들었다. 벨을 몇 번이나 눌렀는지,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문은 몇 분 정도 바라보았는지, 나의 진료 기록을 물어보는 아버지에게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그의 생색을 들으면서 K를 떠올렸다.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난 이후,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을까. 은퇴 비슷한 과정을 밟고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다.

 

 “ K는 어떻게 되었어요? ”

 

 무심결에 생각이 밖으로 나왔다. 아차, 싶었다. 나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황급히 눈치를 살폈다. 짜증으로 뒤덮인 노아 박사의 얼굴, 숨길 수 없는 불쾌감, 차갑게 얼어붙은 웃음, 질끈 나문 입술과 툭 붉어진 턱관절 등등. 오만가지 상상이 정수리 밖으로 빠져나갔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고, 베개를 뒤덮은 긴 머리카락 몇 줌을 주물럭거리며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 사라 ”

 

 노아 박사의 짧고 깊은 숨소리와 함께 ‘기기긱’ 소리가 났다. 분명 의자 다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적당히 마모된 검은 고무 패킹이 뒤로 밀리면서 마룻바닥을 긁는 소리가 도망치듯 사라졌다. 방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 K는 곧 분해 될 겁니다. ”

 

 나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볼이 따가웠고, 관자놀이가 팽팽하게 당겼다. 그리고 미지근한 숯불에 던져진 낙지처럼 온 신경이 발딱 섰다. 모든 게 느껴졌다. 노아 박사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 마다, 귓속에서 이상한 비프 음이 들렸다. 삐, 삐, 삐. 아주 익숙한 경고였다. 침몰하고 있는 배의 선내에서 울려 퍼지는 방송이던가, 화려하게 터지는 버스의 폭발음을 견디지 못한 고막의 비명이던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공포가 나를 뒤덮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 분해되면 끝이죠. 더는 상담사도, K도, 뭣도 아닌. ”

 

 노아 박사가 속삭였다. 그의 숨이 귓바퀴에 닿은 후 달팽이관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찔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링거액에 섞인 해열제가 뒤늦게 제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가 부드럽게 풀리고, 잔뜩 날이 선 직감과 본능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찜찜한 평화가 나를 마비시켰다.

 

 “ ...도와줘요. ”

 

 나는 어눌하게 대답했다. 마음 편히 잠을 잘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이 감겼다. 끔찍한 졸음이 쏟아졌다. 시간은 점점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고, 귓불을 매만지는 노아 박사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귀밑의 각진 턱으로, 축 쳐진 목을 살짝 훑었다가 다시 턱으로, 입 언저리로, 입술로.

 

 “ 내가 어떻게 해 줄까요. ”

 

 노아 박사는 웃고 있었다. 내 입술을 더듬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수명을 다한 건전지처럼 마지막 발악을 부리며 어떻게든 그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마와 눈언저리는 벌써 딱딱하게 굳었고, 광대 밑으로 스산한 기운이 사르르 퍼졌다.

 

 “....K..를...내게....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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