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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사랑 후에 사랑
작가 : 삼송이
작품등록일 : 2017.6.26

버스 가스 폭발 사고의 생존자, 윤 사라. 그녀는 19살 때 일어난 사고로 인해 기억 소거 수술을 받고 과거를 잃어버린다. 수술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던 중, 자신의 상담사가 일을 그만둔다는 메일을 받는다. 사라는 상담사를 만나기 위해 담당 의사인 박 노아에게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거대 기업 회장인 윤 태오를 찾아간다. 태오는 사라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고, 상담사 대신 노아 박사와 긴밀한 관계가 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한 사라는 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사라의 과거를 알고 있는 두 사람, 상담사 K와 노아 박사. 사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며 잃어버렸던 과거를 하나씩 기억해 나간다.

 
마지막 메일
작성일 : 17-06-26 21:06     조회 : 401     추천 : 1     분량 : 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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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후에 사랑 >

 1화: 마지막 메일

 

  교통사고가 났다. 도로가 시뻘겋게 물들고, 삶의 마지막 비명들이 사방에서 난무했다. 그 지옥 같은 장소에 내가 있었다. 축 늘어진 사지를 질질 끌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따금 파도처럼 밀려드는 매캐한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콱 부여잡은 채, 도와달라며 절규했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바싹 마른 목구멍이 쫙 찢어졌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핏방울이 외부 공기와 만나 걸쭉하게 녹아내렸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대신 설명해주시길, 나는 어렵사리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제한적인 삶을 살았다고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이야기할 수도, 물조차 양껏 마실 수 없었다고. 여러 갈래의 링거 호스를 보며 숨을 쉴 뿐이었다고.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의도 없이 기억 제거 수술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무조건 믿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과거는 사라졌고, 현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찝찝한 흔적들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으면 살기 힘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아주 먼 미래까지 살아남고 싶었다.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이 전부 사라지고, 은하가 일그러져서 궤도 밖으로 튕겨 나갈 때까지. 악착같이 숨을 쉬고 두 다리로 단단히 서 있고 싶었다.

 

 01

 

 “ 트라우마 센터에서 메일이 왔습니다. ”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나는 부스스하게 뻗친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멍하니 앉아서 주변을 살폈다. 방 안은 어제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입 베어 물고 만 토스트나 아무렇게 내던진 양말들, 빼곡히 쌓인 컵과 죽은 지 오래된 선인장들이 오래된 유적지처럼 제 자리를 지켰다.

 

 “ 트라우마 센터에서 메일ㅇ… ”

 “ 알겠어. ”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침대 협탁에 울려둔 생수병을 집어, 입 구멍을 틀어막듯이 거칠게 물을 들이켰다. 새벽 동안 이어진 갈증을 급히 해결한 뒤에야 잠이 깼다. 블라인드 너머에서 일렁대는 5월의 태양은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완전히 대낮이었다. 나는 침대에 늘어진 블라인드 줄을 천천히 말면서 간헐적으로 빛나는 핸드폰에 질문했다.

 

 “ 누가 보낸 메일이야? ”

 

 뻔한 질문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발송인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핸드폰의 답변을 들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정돈되지 않은 도시의 풍경을 보면서.

 

 “ 노아 박사와 상담사 K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어느 것부터 먼저 확인하시겠습니까? ”

 “ 노아 박사부터. ”

 “ 사라,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번 달이 지나면 기억 소거 후유증 치료가 완전히 끝납니다. 정말 긴 여정이었죠? 우리 둘 다 열심히… ”

 

 박 노아 박사, 아버지의 후원을 받는 신경외과 의사이다. 아버지께서 발굴한 인재는 노아 박사 외에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그가 제일 돋보였다. 그는 서른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뇌 회로를 만들어 기억을 소거하는 치료법을 개발했다. 게다가 얼굴마저 잘생겼으니깐.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치료를 받는 내내 그의 싱그러운 갈색 눈동자와 부드럽게 꺾인 눈매, 적당히 불그스름한 뺨과 입술에 끌렸다. 말투도 자상하고, 마음씨도 착하고, 하지만….

 

 “ 노아 박사의 메일이 끝났습니다. 다음 메일을 읽을까요? ”

 “ 어? 어, 그래. ”

 “ 알겠습니다. 상담사 K의 메일을 읽겠습니다. ”

 

 나는 뜨뜻하게 데워진 창문 유리에 손을 얹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바닥을 마주 대고 있는 상상을 했다. 심장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두근, 두근, 두근. 유리 너머에서 낯선 심장 고동 소리가 내 손바닥을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상담사 K의 메일을 들을 때마다 늘 묘한 황홀감이 느껴졌다.

 

 “ 사라, 이번 달이 지나면 후유증 치료가 끝난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군요. 축하해요. 선물을 준비하고 싶지만 규칙상 그럴 순 없으니, 사라를 위해 시를 썼어요. ”

 

 상담사 K의 시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이 잠시 멈췄다. 나는 그 짧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더 굳게 눈을 감았다. 영혼을 스르륵 놓아버렸고 미모사처럼 움츠러든 신경세포를 일일이 세웠다. 상담사 K,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내 심장을 정확히 관통할 수 있도록. 그의 시가 내 혈관을 통해 온몸을 나돌며 몸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많은 감각을 열어둔 채, 그를 기다렸다.

 

 “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시였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남은 흔적 일부가 입 밖으로 쏟아졌다. 나는 소주를 다발로 들이켠 주정뱅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렸다.

 

 “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

 

 핸드폰은 내 혼잣말에 화답하듯 마지막 문장을 전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짧고 간결했다. 언제나 그렇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진심만 담아서 이해하기 쉬웠다.

 

 “ 이 시가 제 마음입니다. 사라, 안녕. 행복하게 지내세요. ”

 

 02

 

 “ 후유증 치료 상담사와 개인적으로 연락할 방법이 있나요? ”

 

 나는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을 휴대폰에 들이밀며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전화 상대는 노아 박사였다. 그는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처럼 따지듯이 묻는 나에게 작은 짜증조차 내지 않았다.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사근사근 대답했다.

 

 “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 없어요. ”

 “ 어째서요? ”

 “ 음…. 어째서냐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

 

 노아 박사는 머뭇거렸다. ‘아, 어, 음’ 같은 답답한 소리를 반복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나는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긴 머리카락이 뒤엉킨 바닥에 주저앉아서 그가 다시 말을 시작하길 바랐다.

 

 “ 미안해요, 사라. 그게 규칙이에요. ”

 

 나는 햇빛에 달궈진 두 발등을 보면서 조용히 생각을 삭혔다. 미안하다고 대답한 이유가 무엇인지. 만나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그래 봤자 환자와 상담사일 뿐인데, 규칙을 들먹이며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철저히 없애는 이유가,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속만 메스꺼웠고, 빈혈 비슷한 어지럼증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 … 정말 안 되나요? 계속 연락하겠다는 게 아녜요. 그냥, 잠깐이요. 늘 메일을 보내줘서 고맙고 많은 위로를 받았고….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고 싶어요. 그게 전부예요. ”

 

 나는 절박했다. 할 수 있다면 내 뇌를 그대로 도려내서 노아 박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통통한 복숭앗빛 주름이 슬픔으로 메마른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면 금방 이해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번 내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피했다. 마치 상자를 주물럭거리는 판도라의 흰 손을 거칠게 묶어버리듯이 아주 철저했다.

 

 “ 사라, 그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

 

 노아 박사는 또박또박 말했다. 한낱 의사인 자신이 마음대로 자르고 이어 붙일 수 있는 규칙이 아니라고, 트라우마 센터를 설립하기 전부터 이어진 오랜 역사라면서 나를 설득했다. 상담사를 만나지 말자고 했다. 지금의 우울은 잠시 스쳐 갈 뿐이라고 했다. 자꾸 미래를 생각하자고 했다. 하고 싶었던 것, 먹고 싶었던 것, 보고 싶었던 것…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 아버지. ”

 “ 네? ”

 “ 아버지요. 아버지께 직접 물어볼게요. ”

 

 노아 박사와 나 사이서 짧은 적막이 흘렀다. 나는 빈속에 침 한 방울을 떨어뜨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규칙은 물론, 과거조차 까먹었지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내 아버지, 노아 박사가 두려워하는 규칙을 만들고 나의 탄생과 함께 사라진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03

 

 “ 허, 상담사를 만나겠다니. ”

 

 아버지는 한쪽 눈썹을 움찔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뇌가 파랗게 변해서 덜컥 멈춰 버릴 것 같았고, 당장 손톱을 물어뜯고 싶었다. 바짝 자른 엄지손톱을 까득까득 씹은 후, 앙증맞게 고인 핏방울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갈까. 대문을 빈틈없이 잠그고 꿉꿉한 옷장 속에 기어들어 갈까. 나프탈렌 냄새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쪽잠을 잘까… 온갖 충동이 들었으나, 꾹 참았다.

 

 “ 네, 상담사를 만나서 고마움을 전ㅎ… ”

 “ 고마움? 네가 고마워할 게 있었던가? ”

 “ 아, 그게… ”

 

 나는 횡설수설 떠들었다. 상담사가 글을 잘 쓴다든지, 불면증 치료에 큰 도움을 주었다든지,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든지. 레몬에이드를 파는 어린아이처럼 설명했다. 최악이었다. 회장실 바닥을 메꾼 흰 대리석을 쳐다보며 실패를 확신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의 반응이 두려웠다.

 

 “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엄연히 서비스야. ”

 

 아버지의 그림자가 대리석을 시커멓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등골이 싸했다. 악어가죽으로 만든 구두가 머리를 찧는 소리를 들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무서웠다. 눈 한번 끔벅이지 않고 얼어붙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아버지가 겁났다. 그 빈틈없는 완벽함이 끔찍하고, 고급스러운 행동과 매너들이 소름 돋았다.

 

 “ 얘야, 상담사는 제 일을 한 것뿐이다. 내가 낸 돈 만큼. ”

 “ 하, 하지만… ”

 “ ‘하지만’ 은 없어. ”

 

 나는 어깨를 짓누른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크고 단단했다. 병아리와 메추리 새끼, 작은 토끼나 갓 태어난 강아지 따위를 통째로 뭉갤 수 있는 크기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는 작고 하찮았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했다니, 너무 무모했다. 멍청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었다.

 

 “ 주변을 살펴보면 상담사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

 

 아버지는 자상하게 말했다. 잔뜩 움츠러든 내 어깨를 사정없이 꾹꾹 누르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내 뜻을 거스르지 마라,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너는 그냥 가만히 서서 숨 쉬고 있어라… 아버지의 뜻이 앙상한 어깨뼈를 뚫고, 구부러진 척추를 콱 움켜잡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 건강하고 올바른 사람을 사귀는 게 좋겠구나. 예를 들면, 노아 박사같이 괜찮은 남자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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