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이 좋다.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재하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한걸음씩 나아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이번에는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알을 굴려보았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재하를 바라보았다. 재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심호흡을 하고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재하가 천천히 피아노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수줍은 어린아이 같던 손가락이 어느새 발레리나처럼 건반 위를 뛰어다녔다.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격렬하게 피아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재하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포근하면서도 편안한 연주에 몸을 맡겼다.
재하가 연주를 마치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 중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야단스럽게 환호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박수와 환호. 재하에게 아무런 의미 없었다. 재하가 일어나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보았다. 역시 그 사람은 없었다.
‘역시 아닌 건가?’
재하가 인사를 하다 여자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는 꽃을 들고 있었다. 재하가 지긋이 여자 친구를 바라보았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에서 그 사람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포니테일을 빼고는 그 사람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재하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늘 연주 멋졌어!”
연주가 끝나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하며 여자친구가 신나게 재잘거리는데. 막상당사자인 재하는 이 모든 것이 담담했다. 아무 상관없었다. 어디를 가던, 무어를 먹던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그 사람과 함께가 아니니까.
“고마워.”
재하는 그녀가 건네는 꽃을 받았다. 복숭아 빛으로 물든 동백꽃이었다. 일부러 이런 꽃을 준비한 건가? 재하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꽃을 어디에다 버릴까 생각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무어가 그리 신났는지 재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어 줬으면 싶었다. 그래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물어보는 것에 대답했다. 무심하지 않고 그렇다고 성실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갈래?”
식사를 마친 후 그녀가 조심스레 재하에게 물어보았다. 재하가 아무리 티를 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유독 말이 없는 모습에 지쳤나 싶었다. 그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리. 순간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재하가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중요한 것을 몰랐다. 재하는 연주로 지친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말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재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모텔 간판이 분홍 빛깔을 내며 발광하고 있었다.
“아, 잠깐……”
모텔로 들어가자마자 재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키스를 하며 몸을 부딪치자 움찔움찔 움직였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재하가 능숙하게 옷을 벗겼다.
재하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어깨부터 내려가는 손길에는 욕망이 가득 찼다. 목에 키스를 하자 온 몸이 불타오르는 듯 했다.
서로를 향한 몸놀림은 점차 과격해지고 재하가 그녀를 힘껏 안았다. 그 이후 재하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그녀는 재하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밀려오는 쾌락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재하가 놀라웠다. 운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힘이 있을까? 더구나 연주회를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리도 열정적인 그가 존경스러웠다.
“자기 힘이 좋네? 오늘 연주하느라 힘든 거 아니었어?’
한 차례 끝나고 숨을 고르며 그녀가 얘기했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려 재하를 겨우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화장이 번졌었다.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침대 주변에는 급하게 벗어 던진 옷들이 난장판을 이루었다.
“별로……”
재하가 그녀에게 다가가 키스를 했다. 둘은 다시 몸을 뒤섞었다. 그 후 몇 차례나 사랑을 나누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쾌락도 깊어졌다. 재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쳐도 금방 회복하고 달려들었다. 그렇게 늦은 새벽이 되고 나서야 재하는 멈췄다.
“오늘 굉장했어!”
그녀가 재하의 품에 안겼다. 허리가 뻐근하기는 했으나 이정도 쾌락에 허리 정도야 가볍게 내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이었다. 몸으로 느껴지는 쾌락에 이성이 날아갈 정도였다. 재하를 바라보았다. 깡마른 몸이지만 그간 어떤 남자보다도 자신을 만족해주었다고 확신했다.
재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어를 보는 지 알 수 없었다. 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역시 아니구나.”
재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처음에는 땀 때문에 그러나? 싶었다. 하지만 점차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몸을 씻은 재하는 침대 주위에 놓인 옷을 차례로 입었다. 한결 같이 짓는 무심한 표정이 눈에 밟혔다.
“무슨 일 있어? 집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불안한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재하가 옷을 입고는 동백꽃을 들었다. 그리고는 쓰레기통을 향해 던져버렸다. 덜컹. 꽃잎이 공중에서 흩날리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 헤어지자.”
재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뒤늦게 그녀가 일어나 무어라고 얘기했지만 이미 떠난 뒤였다. 얼른 핸드폰을 들고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바라보았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재하가 집으로 들어간 것은 오후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 카페에서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목소리, 얼굴, 작은 추억 하나 빼놓지 않고 밤을 새며 머릿속에서 그려 나갔다.
“또 여자 문제냐?”
재하의 아버지가 팔짱을 끼고 재하를 맞이했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똑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여자와 더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의 만남.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아버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래도 이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 다른 사람 눈에 눈물 나오게 하면 피 눈물 흘리게 된다는 말도 모르냐?”
재하가 신발을 벗고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지긋이 쳐다보면서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셨나요? 상관 마세요.”
“됐다. 그건 다음에 얘기하자. 것보다 오늘은 손님이 왔으니 인사라도 해라.”
“됐어요. 전 방에서 쉴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재하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 하고 거실로 향했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잠에 빠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속에서 그 사람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재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거실에서 멍하니 눈을 뜨고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이게 현실이 맞는 걸까?
그토록 바라던 소라가 있었다. 평생을 당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아버지가 뒤 따라와 무어라 얘기하는 데 들리지 않았다. 오직 당신만 보였다. 당신의 얼굴만 보였고, 당신의 목소리만 들렸고, 당신만 느껴졌다.
“응? 나 기억 안나?”
“소라누나…… 맞죠?”
“응. 잘 기억하네.”
그 맑은 목소리는 여전했다. 작음 몸집도 앳돼 보이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세월의 흔적이 남기는 했으나 기억 속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 재하는 말을 잃었다. 얼마나 바랬던가? 아니 얼마나 간절했지? 다시는 못 만나리라 생각했다. 평생을 당신 생각 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오랜만이야 재하야.”
가슴이 울렁거렸다. 재하가 미소를 지으며 소라에게 다가갔다. 환하게 웃는 자신이 낯설었다. 얼마 만에 미소를 지어보는 걸까?
“소라누나!”
재하는 소라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삶을 살아가면 기적이 찾아온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꿈을 이루는 순간일 수도 있고, 복권에 당첨되는 순간일 수도 있고,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수술에 성공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재하에게도 기적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