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린은 가끔 꿈을 꿨다. 새벽이슬이 태양에 스러지듯,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꾸다보니 조금 기억날 뿐. 물속에 몸이 가라앉았으나, 위험하다기보단 평온했다. 그 일 이후, 라이다와 베니슬린은 헤일린을 잠시 과잉보호했다. 일어났을 땐, 알페르고는 이미 변방으로 떠난 뒤였다.
"네 흉터가 마음에 드는구나. 요정과 일각수는 동족이나 마찬가지란다. 네게 고통을 준 장본인이 나타나는 순간, 내가 누군지 알게 될 것이다. 가련한 소녀여."
이제 대충 무슨 일인지 기억이 났다. 베니슬린은 정말 황족이 맞았으며, 알페르고는 제 기억에서 여전히 난봉꾼이었다. 때로 난봉꾼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재수없는 일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 닫힌 총대
마력의 벽이 불투명해졌다. 강력한 마력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헤일린과 알페르고는 서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제안을 하나 할까, 헬린."
"뭘까, 그게."
"제한 시간은 30분. 네가 날 이기면 무사히 보내주고, 이기지 못하면 죽일 거야."
"어째서?"
"난 지금 누구든 죽이고 싶거든. 그게 라리마인지 라리아인지 그 장애인 신부였는데, 네가 방해했으니까."
설득해야한다. 진정시켜야 한다. 그녀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날 죽이고 싶니?"
"그래. 넌 로제 페르나처럼 불타 죽는 건 어때? 넌 그것도 예쁠 거야."
생각보다 더 이성이 없었다. 로제 페르나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리나가 빌려준 검은 여성용으로, 헤일린이 들기엔 조금 길었으나 가벼웠다. 차분히 구두를 벗어 한쪽에 두었다. 알페르고는 헤일린이 검을 든 것도 어색해보였다. 저 앤 검술에 재능이 없었어. 아예 배우지도 않았지. 반면에 그는 검술 학점을 우수한 성적으로 받았다. 죽여야 해. 그의 머리는 살기로 가득차있었다. 마력은 그의 살기에 반응에 날카로웠다.
"한번도 고백한 적 없으면서, 이제와 이러지 말아줄래?"
그가 그녀의 검을 내려쳤다. 그녀는 유연하게 그의 공격을 받아쳤다. 왼발로 회전하는 방식, 약간 낮춘 자세 모두 그에게 익히 아는 것이었다. 그를 검술의 2등으로 만든, 로제 페르나의 검이었다.
"너야말로, 어느 사이에 검술을 배운 거지?"
그 재능은 가히 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승부욕을 단번에 무너뜨린 유일한 사람. 페르나 후작 가와 아놀드 공작가는 교류가 잦았다. 무가라는 공통점 때문에 친분이 두터웠다. 그녀의 검은 천재적이었고, 아버지마저 그녀의 재능을 칭찬했다. 질투할 수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질투했다. 로제 따위만 없다면 제가 1등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죽음이 기뻐야 했다. 그런데 허무하기만 했다. 이기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세상을 떠난 거야? 난 아직 널 이기지 못했는데. 그는 그녀의 죽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의 검술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젠 볼 수 없을 거라고, 이젠 대련하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검술, 로제 페르나의 것이지?"
"!"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헤일린 페리헬이 로제 페르나의 검술을 쓰고 있었다. 완벽히 복제한 듯, 그의 마음 속 질투심을 끌어내고 있었다. 빠른 공격에 그녀도 대응하느라 바빴다. 이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다칠까 염려되어 제국출신 의사들을 재촉했다.
"릴리에드 액입니다. 페닐에선 구하기 힘들어서 이것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타고 달렸다. 헤일린이 황성의 최신 경비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았으나,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헤일린은 원래 기사 훈련 같은 거 받지도 않았다. 체력엔 한계가 있을 거였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 몸에 마력을 둘러 상처를 최소화하고, 검에 마력을 집중해야해. 젠장, 저 마력으로 계속 공격받으면 검이 부러지고 말 거야. 공작가의 영식이라곤 하나 그녀와 경험 자체가 달랐다.
"약속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어, 헬린. 이제 끝낼까?"
그는 제압에 성공했다. 검은 저 멀리, 바닥에 내던져진 그녀의 몸으로 제 몸을 올려 반항을 무의미하게 하려 했다. 그녀는 반항했으나 남성의 체중에 반항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몸부림에 치마가 말려올라갔다. 로제의 검 따위, 배울 만한 게 아니야. 내 검술이 더 완벽하다고! 그는 헤일린에게서 로제를 분리시키기로 했다.
"내가 로제에게서 분리시켜줄게. 넌 가만히 내 보호만 받으면 돼."
"윽, 이거 놔! 안 놔?"
"싫은데."
그는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희열감에 기분이 좋아 감정 조절이 힘들어졌다. 마력의 벽이 얇아져 투명해졌다. 약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각하, 지금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들어가야 합니다!"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계가 얇아져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드문드문, 작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일린! 괜찮습니까? 그가 서둘러 피로연장에 들어섰다.
"오지마, 아드리안."
"알페르고, 그만두십시오."
그는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거친 싸움에 헤일린의 옷은 군데군데 구져져있었다. 그녀의 목 가까이의 칼이 있었다. 마력의 벽은 여전히 두꺼웠다. 아드리안이 마력을 쓴다해도 그전에 헤일린이 죽을 게 분명했다.
"헤일린."
이대로 헤일린이 죽는 걸 지켜봐야하나? 헤일린이 죽으면 알페르고를 죽이고 저도 죽을 작정이었다. 헤일린이 없는 세상은 지옥이었으니까. 상사의 동생이라고 봐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
헤일린의 허벅지에 가죽총대가 있었다. 알페르고는 이성을 잃어 헤일린의 목만 노린 듯 했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그 거리에서 조준을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헤일린이 사격을 잘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총을 쓰세요! 헤일린!"
웅웅대는 음파가 그녀의 귀에 박혔다. 베니슬린이 준 총이라면 알페르고의 심장이나 머리를 노려 즉사시킬 수 있었다. 총을 쏴요, 제발! 그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왜 총을 쏘지 않는 겁니까? 헤일린은 그의 말을 들었음이 분명한데도 총대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제발, 살아야 해요."
알페르고를 죽여서라도, 살아야 해요. 벨페르고 님은 내가 설득할 거니까. 제발 죽여요! 음습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참에 수배자로 만들어서 제 저택 은밀한 곳에 가둬두어도 괜찮을 거였다.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평생.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아랫배가 저릿해져오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총을 쓰지 그래? 나도 날 조절할 수가 없거든.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흥분되서 미치겠어."
"알, 알페르고."
"널 진짜로 죽일 거야. 지금 당장 날 사랑하겠다고 말해."
아마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건 진심인 모양이었다. 살기 어린 말에 묵혀둔 애정이 느껴졌다. 그는 그의 칼을 제 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알페르고의 눈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까 먹었던 약, 역시 그게 문제인 걸지도 몰라. 제 추측이 맞다면 알페르고는 중독 증상을 겪고 있는 게 맞을 거였다. 진정시켜야 해. 이성이 남아있다면 아직 가능성은 있었다.
"헤일린! 제발 쏴요!"
헤일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페르고의 눈을 지척에서 억지로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살아나니까.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제 이 난봉꾼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그녀가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죽이겠다고, 사랑을 명령하는 이에게 평온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가 정말 몰랐다고 생각해? 알페르고, 난 알고 있었어."
그가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에게서 몸을 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난봉꾼은 누군가의 과녁이었다. 헤일린은 제 생명을 걸고 화살을 대신 맞았다. 그의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 순간 그의 생명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