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은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켰다. 흩날리는 금발 머리가 그의 눈에 띄었다. 금발이란 것이 그리 희귀한 머리색은 아니었지만 루산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에데사 백작이 낳은 희대의 바람둥이라고 자칭하는 그는 한번 본 여성의 어느 사소한 특징까지도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저건 사릴 카리즈 공녀의 머리카락이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금방 사라졌지만 루산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약간 주저했다. 따라붙어서 말이라도 걸면서 호의를 사볼까? 아니면 지나치면서 눈도장이나 찍고 말까?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까. 루산의 갈등은 아쉽게도 뚝 끊겼다. 계속해서 사릴을 보고 걷던 루산은 바로 앞에서 나타난 사람을 미처 보지 못하여 그만 부딪혀버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루산은 말을 더듬는 상대방의 복장을 흘겨보았다. 시종의 복색이었다. 얼굴엔 감히 귀족과 부딪혀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산은 불쾌했지만 그래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자신의 실수였다. 앞을 제대로 안 보고 걸어 다녔으니, 와서 박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는 손을 들어 시종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옷을 툭툭 털면서 사릴이 지나간 곳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멀리 가 있어서, 우연을 가장하고 말을 걸기엔 어색해보였다. 차라리 이게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사릴 카리즈의 성격이 어떤지 루산은 아직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첫 만남이 비교적 최악에 속하는 사릴과 루산의 사이였다. 그가 카에리를 따라다녔을 때의 일이었다. 생각보다 멀게 느껴지는 일이었지만 불과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루산은 카리즈 영애가 타고 온 마차의 외양을 깔보는 말을 했다. 그녀가 듣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그 대가는 혹독했다. 루산은 사릴이 그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좋은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선 무척 노력해야 할 정도로.
이게 다, 카에리 때문이었다. 사실 쫓아다닌 건 루산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카에리가 먼저 험담을 시작했는지 아닌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루산이 머릿속으로 강조하는 것은, 자신은 단지 카에리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해 말을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사릴 공녀께서 훨씬 낫잖아?’
그리고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외모로 보나, 가문의 위세로 보나 카에리보다 사릴 카리즈 공작 영애가 훨씬 나은 여자라는 것. 루산은 자신이 다다른 결론에 만족하기로 했다. 앞으로 일주일 후, 학기가 시작한다. 루산이 진정으로 다가가는 건 그 후가 될 것이다. 루산은 일단 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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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아는 가만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이 학원에 왔을 때 마주했던 귀족 사내 중 하나였다.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꽤 번드르르한 모습에 껄렁한 이미지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릴을 발견하고 그 뒤를 쫓던 남자는 어느 시종과 부딪히고, 한동안 머뭇거리다 결국 자리를 떴다.
안테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사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주 앉는 정원의 한 구석에 가서 앉았다. 앤은 어디 갔지?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릴의 시녀는 머리카락도 비추지 않았다. 정말, 말 한 번을 안 듣는구나.
분명 요즘 낌새가 안 좋으니 아가씨 곁에 딱 달라붙어 있으라고 했는데도. 안테아는 숨을 느릿하게 내뱉었다. 최대한 화를 죽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 놀기 좋아하는 시녀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사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반기는 소리였다. 안테아는 그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찡그렸다. 리란 펠이었다. 사릴이 소개해주었던, 어릴 적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다던 친구.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안테아는 그런 자신의 감정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누가 시비를 걸어도 담담하게 듣던 그였다. 며칠을 빵 하나로 버틸 때도, 어느 귀족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도 그 특유의 심법(心法),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통과시키는 법으로 잘 넘겨왔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심각하게 짜증나 있는 상태였다.
“네 기사님하고 시녀는?”
“안테아 경은 잠시 볼 일 있다고 가던데? 앤은 조금 쉬게 했어. 딱히 일도 없으니까.”
사릴과 리란의 대화가 들렸다. 안테아는 다시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았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한숨소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앤을 책망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인의 말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고, 주인의 분위기를 따르는 시녀일 뿐이니까. 결국 문제는 사릴이었다.
사릴은 심각한 안전불감증에 걸려있었다. 적어도 안테아의 판단은 그랬다.
처음 로디니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 안테아는 보이지 않는 큰 손을 느꼈다. 귀족 집안 곳곳에 퍼져 있는 대마도서, 인타넬의 존재. 그걸 읽고 취미에 탐독할 만큼 여유 있는 귀족들. 이 사실과 지금 카른 학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안테아는 잠시 사릴에게서 눈을 떼고 정원 곳곳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곳곳에 사릴을 훔쳐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이렇게 수상한 인간들이 많을까. 사릴은 마치 시장에 싸게 나온 싱싱한 과일 같았다. 탐욕스러운 눈길들이 그녀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만 해도, 아까 그 남자까지 합해서 벌써 네 번째였다. 거기다가 그 놈의 쪽지까지 있지 않은가. 만약 누군가가 이 일을 퍼뜨린다면, 그건 더 이상 사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카리즈 공작 가문의 일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 아가씨는 너무 말짱하고 말끔하게 학원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안테아는 그녀가 꼭, 둥지 밖을 막 벗어난 아기새 같이 느껴졌다. 순진하고 순순해서 너무 위태로워 보이는.
‘순진하다고는 할 수 없나.’
그녀가 쓴 소설을 보면 더 이상 그런 생각은 들지 않지만. 안테아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본연의 임무, 사릴 카리즈 공녀의 호위에 신경을 쏟았다. 오히려 안테아가 제일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한 채로.
그가 이 점을 무시할 수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입으로 뱉기엔 낯부끄러워 말해 본 적이 없었으나, 사실 그는 지금 이 학원 내에 그를 상대할 인간은 많아야 둘 정도라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 실력 차이 때문에, 다른 귀족의 호위 기사들이나 학원 내 위병은 마음먹고 은신한 안테아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디 안 좋아? 피곤해보여.”
리란 펠, 저 남자에게서는 께름칙한 냄새가 났다. 처음 봤을 때 느낄 수 있었다. 얇은 몸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자신을 최대한 감추려고 하지만 그 눈빛은 분명 희미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전장에서 가장 미쳐 날뛰는 광전사들의 눈빛에 닿아 있었다.
“아니, 그냥.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래.”
사릴의 말에 리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열은 안 나는데.”
열은 내가 나. 안테아는 부아가 치솟았다. 사릴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뭐라도 좋으니 가서 저 망할 손이랑 아가씨를 떼어놓고 싶었다. 리란이라는 저 놈의 표정이, 사릴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지.”
사릴은 또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테아는 한편으로 자신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그래, 이건 다 저 남자가 수상쩍어서, 그래서 아가씨와 친하게 지내면 위험할 것 같아서다. 결코 내가 딴 마음을 먹어서 다른 남자가 곁에 있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닐 거다. 난 호위 기사로서......
“으음. 무리하지마.”
리란이 이번에는 사릴의 손을 잡고 쓸어내렸다.
난, 호위 기사로서 그녀를 걱정할 뿐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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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그는 사릴을 불렀다. 사릴은 입에 펜을 살짝 물고 안테아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그녀의 체구에 비해 훨씬 큰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눈은 퀭했다. 안테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 의자를 보았다. 순백색 의자는 중간 중간 화려한 보석과 황금 장식이 되어 있었다. 아마 로디니 엘판의 작품일 터였다.
“아, 이거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본 사릴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로디니 엘판이 보냈어요. 돌려보내려 해도 도통 만날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니까, 일종의 뇌물인 셈인가? 안테아는 보석의 수를 세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크기나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차마 가격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릴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는 안테아를 보며 의아한 듯 물어왔다.
“그런데 왜 불렀어요?”
그녀는 펜을 흔들어보였다.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고 거리낄 일도 없기에, 그녀는 안테아가 오거나 말거나 당당하게 야설을 집필 중이었다. 안테아는 그런 그녀를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아가씨, 너무 무방비하신 거 아닙니까?”
“뭐라구요?”
“너무 안일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내가 뭘 했는데요?”
사릴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안테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테아는 차마 그 눈을 보면서 말할 자신이 없어서, 눈을 애먼 벽 쪽으로 향한 채로 있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저도 없고, 시녀도 안 데리고 혼자 다니시면 누가 뭘 하든지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면서 리란 펠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 쪽지는 명백한 협박의 의도가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미행했어요?”
사릴이 그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목소리가 급변했다.
“할 일 있었다면서요? 할 일이 나 미행하는 거였어요?”
“아니,”
“변명해 봐요.”
이거 지금, 화내는 거지? 물론 주인에게 비밀로 하고 미행을 했다는 건, 느끼기에 불편하거나 불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순수하게 좋은 의도로 시작한 거였다. 사릴이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자 그는 조금 서운해지는 걸 느꼈다.
“그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변명이면 화 낼 거니까요.”
사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테아는 여기서 물러서면 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살짝 사릴을 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그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는 그 유명한 소설을 쓰시는 분이니까 더 안전에 철저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도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할 일’을 하다가 찾아간 겁니다. 그리고 소설을 쓰시는 건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말끝마다 소설, 소설.”
사릴이 또 그의 말을 끊었다. 사릴에게서 이런 분위기가 나오는 건 이번으로 두 번째 목격하는 거였다. 첫 번째는, 벤 경을 모략으로 쫓아낼 때. 그녀의 아버지인 공작에게도 이런 식으로 혼난 적은 없는 안테아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은 사릴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떨 때 보면, 안테아 경은 나보다 내 소설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대로 말할까? 어떻게 하지? 예전에도 분명 안테아는 사릴에게 고백했었다. 품위 있고 점잖아야 할 공작의 기사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가씨 소설에 매료된 것 같다고. 그러나 사릴은 이제까지 그 발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까먹었나? 한 번 더 말해볼까. 안테아는 고민했다. 고민의 유예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당장 급한 불, 사릴의 화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안테아는 고개를 탁 들고, 사릴을 똑바로 보며 고백했다.
“맞습니다. 저, 저는 아가씨 ‘소설’을 좋아합니다.”
“네?”
“아가씨 소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시는 아가씨는 존경합니다.”
“......네?”
왜 저럴까. 안테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불을 끄려고 들이부은 게 물이 아닌, 기름인 것 같은 느낌. 사릴
“나가요.”
“아가씨?”
사릴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멱, 멱살? 어찌할 도리 없이 끌려간 안테아는 사릴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들어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당장 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