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요?”
“뭐가 말입니까.”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건 착각일까?
“......아무 것도 아니에요.”
사릴은 몸을 돌려 그녀를 졸졸 따라오는 키 큰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안테아는 사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그녀가 왜 갑자기 멈추었는지 모른다는 눈이었다. 저걸 보건대, 그는 아직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사릴은 눈을 돌렸다. 역시, 사람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게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해 버린 안테아가 아닌가. 그녀는 그 생각을 하다가 짜증이 살짝 일었다.
분명히 들었다.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잠들기 위해 누우면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는 대화였는데, 잊을 수 없었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볼에 홍조를 띄웠던가? 손은 어떤 모양을 취하고 있었지? 그런 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세세한 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녀는 안테아가 무척 힘들게 말을 꺼냈던 걸로 기억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왜 나만 눈치 보고, 나만 신경 쓰는 것 같지? 다시 흘긋 보려고 했으나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간 짜증을 내거나, 괜히 신경 쓰는 걸 들킬 것 같아서였다.
그건 그렇고, 사릴이 안테아를 신경 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 놈의 고백 덕분에, 그녀는 안테아에게 부쩍 신경을 쓰고 있는 차였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평범한 무뚝뚝함이었던 그가 갑자기 이상 기류를 나타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런 거였지? 사릴은 오늘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란을 만나고 나서였다. 리란을 바라보는 안테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바라본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노려본다는 것이 잘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사릴은 일단 이 찝찝한 기분을 해소하려고 했다.
“저기, 안테아......”
“아, 작......”
그와 동시에, 로디니가 툭 튀어나왔다. 사릴을 뭔가가 휙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이내 균형을 잡았다. 그녀의 팔을 붙잡은 건 안테아였다. 사릴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팔을 뿌리쳤다. 안테아는 굳이 그녀의 팔을 다시 잡지 않았다.
속으로 너무 과하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이미 행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누가 마법사 아니라고 할까봐,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는 게 정말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미네가 칼 같은 동작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는 바람에, 작가님이라는 그 망할 호칭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사릴은 그런 둘을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그래도 두 사람 중 한 명이 일반적인 상식을 갖추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야, 네가 그러면 어떻게 하냐.
미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막았다. 로디니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사릴이 싸늘하게 바라보자 천천히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을 조금 진정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사릴에게 정중히 말을 걸었다.
“왜 찾아오셨습니까?”
“도와주실 일이 있어요.”
로디니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약간 흥분한 사릴을 진정시키며 로디니는 자신의 방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확실히 대마법사의 명성에다, 카른 학원의 선생에 대한 대우가 좋았는지 그의 방은 무척이나 컸다. 사릴은 들어서자마자 가득 차 있는 의자들의 향연에 발을 딱 멈춰 세웠다.
의자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창고처럼 마구 쌓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자들은 모두 잘 정돈되어 가지런하게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하나 같이 휘황찬란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것들이었다.
“들어오시죠.”
로디니는 미소를 지으며 사릴에게 말했다. 그녀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 의자들은 뭐죠?’하고 묻기를 원하는 것 같은 표정을, 로디니가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다 뭔......”
“아, 이건 제 의자 콜렉션들입니다.”
세상에 살다 살다 의자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사릴이 물어보자, 로디니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의자 하나하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건 잠 잘 때 좋고, 이건 일 할 때 집중력을 늘려주고, 이건 낮잠 잘 때 좋고...... 만약 안테아가 말을 끊지 않았다면 모든 의자를 소개해 줄 작정이었던 것 같았다.
“아가씨는 바쁜 몸이시니, 그쯤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긴, 알겠습니다.”
안테아의 말에 로디니가 수긍했다. 하지만 사릴은 궁금한 게 생겨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다 마법이 깃들어 있는 건가요?”
“아, 아니요.”
“이건 다 제 마스터가 게으름뱅이라서 그런 겁니다. 의자 위에서 자는 걸 숨쉬기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시거든요.”
로디니의 말에 미네가 끼어들었다.
“하실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릴 님.”
그제서야 머릿속을 지배하는 의자들에서 벗어난 사릴은 말했다.
“저, 협박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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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조용히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서 은은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책이었다. 마도서라는 증거이기도 하며, 사내가 원하는 글들을 옮기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사내는 이내 사그라든 빛을 보고, 책을 펼쳤다.
천재의 사랑은 더럽다. 작가 익명.
어떤 천재가 있었다. 검술의 대가이자 노력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남자였다. 검을 잡는 무인들의 손에 으레 새겨지기 마련인 굳은살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한 눈에 반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원정에 나섰다가 마주친 한 시골 처녀.
농부의 여식이자 농부의 아내인 젊은 여인은 어느 귀족이나 왕족보다도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힘든 농사일도, 항상 적들이나 몬스터들의 습격에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도 그녀의 피부는 맑았고 피부는 부드러웠다.
천재는 그런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다. 기사 작위를 받고 왕의 눈에도 들어 귀족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가 남의 아내를 탐하는 짓 따위는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사랑은 위대한 걸까, 아니면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걸까. 천재는 결국 여인을 안고 말았다. 더러운 사랑의 이야기. 이게 소설의 줄거리였다.
얼핏 보기에 굉장히 외설적이고 욕정에 가득 찬 소설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도 처음엔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 소설은 현재 널리고 널려 불쏘시개로 쓰기도 아까운, 야설일 뿐이라고. 그러나 심리 묘사나 글의 필력, 사람을 간 떨리게 하고 농밀하게 흥분시키는 그 매력이 그를 끌어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그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설 중반부, 급격하게 변하는 분위기에 놀라 일어났던 감정. 그 부분을 시작으로, 천재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쾌락 일변도의 소설 묘사는 점점 잔혹하게 망가져가는 천재를 비추며, 그의 사랑이 얼마나 덧 없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비뚤어진 그 욕망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이건 명작이다. 그리고 이걸 쓴 사람은 실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다시금,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거의 우연이었다.
사릴 카리즈. 밝은 금발을 지닌, 아름다운 공작가문의 아가씨.
드디어 찾았다. 그는 서서히 움직일 때를 가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