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릴은 짜증이 나는 한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리란 펠의 성격에 딱 맞아떨어지는 장난이기도 하거니와, 그게 다른 사람에게 걸린 것이 아닌 그저 리란의 장난일 뿐이라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테아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차마 화를 내지 못하니 참는다는 티를 팍팍 드러내었다. 소용없어요, 안테아. 이 인간은 눈치 없기로는 세상 모든 사람을 통틀어도 부족할 정도라고. 그녀 예상대로, 리란은 무슨 일이냐는 듯 안테아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한없이 순수한 미소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리란은 그 말을 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사릴은 그 둘의 모습을 보다가, 못 참고 웃음을 살짝 터뜨렸다. 두 남자는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안테아 경의 성격을 이제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격이라기보다는 약점이라고 할까. 그 동안 몰랐던 자신이 한심하게까지 느껴졌다. 안테아는 능글맞거나 순진한 태도에 무척이나 약했다. 강하게 밀면 강하게 반발하고, 비아냥거리면 쉽게 무시하지만 짖궂은 장난에는 자기 태도를 잃어버리며, 순수하게 웃는 사람에겐 화도 못 내는 거였다.
안테아는 사릴마저 웃자 결국 화를 누그러뜨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리란은 그녀를 돌아보며 즐겁게 말했다. 자신이 보낸 장난이 성공적이어서 자못 기쁜 모양이었다.
“연락 바랍니다, 사릴 경. 보라색 종이에 적어서 말이야, 아주 재질 좋은 종이에 보냈는데. 초대장처럼.”
응?
“그런 쪽지가 아니었는데.”
사릴과 리란, 안테아와 앤. 네 사람 사이에 정원의 한낮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리란의 질문에, 사릴은 품고 있던 쪽지를 꺼내 들었다. 절대 보라색은 아니었다. 깨끗한 흰 종이였다. 게다가 내용도 달랐다.
‘연락바랍니다, 사릴 경.’
만약 리란이 보낸 내용대로라면 사릴도 짐작했을 터였다. 사릴에게 기사 칭호를 붙이며 장난을 치는 건 리란 펠,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쪽지의 내용은 ‘잘 읽고 있습니다. 작가님.’이었으니까.
한참을 골똘히 살피던 리란은 이내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쓴 게 아닌데?”
그건 누가 봐도 아는 거잖아. 이 바보야. 사릴은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열이 다시 뻗치는 느낌이 들었다. 앤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 시녀를 향해 살짝 웃어주며 사릴은 머리를 꾹 눌렀다. 그 웃음이 문제였던 건지, 그녀가 남자들을 둘러보자 표정이 다들 심각해져 있었다.
“왜 그래?”
“잠깐 어지러워서.”
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쐐기를 박았다.
“아무튼 이건, 내가 보낸 게 아니야.”
“그렇다면, 리란이 보낸 쪽지는 대체 어디로......?”
분명해졌다. 이건 정말로 들킨 거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모두, 로디니 때문이다. 사릴은 이를 지긋하게 물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안테아에게 말했다.
“안테아 경, 따라오시겠어요? 지금 이 일을 수습해야 할 인간을 만나러 갑니다.”
안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릴은 몸을 돌려, 앤에게 그리고 리란에게 말했다. 작별 인사였다.
“이따가 보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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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이라는 시녀마저 떠나가고 혼자가 된 리란은 웃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보여주지 못한 미소였다. 이 얼굴을 보여준다면 그녀 역시 도망치겠지. 내 어머니처럼. 그래서는 안 된다. 또다시 그런 참담한 실패를 겪을 수는 없었다.
그게 그의 최초의 실패였다.
리란 펠, 창백한 피부에 대조되는 짙고 푸른 머리색을 가진, 항상 병을 앓고 있는 아이.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펠 백작가 내에서 귀찮기만 한 존재. 다행히 병으로 인해 후계 다툼에서는 멀어져 있는, 그래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존재. 그런 리란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둘째 형, 가란 펠.
그 중에서 리란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어머니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가란의 경우는 서로 동족임을 알아보았을 뿐,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리란 같은 부류의 인간은 동족에게 혐오를 느낄 뿐이니까.
자신이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자각했던 것은 무척이나 어릴 때였다. 그 때부터 리란은 몹시 앓아서, 어머니나 유모 등의 도움 없이는 저택 앞에 나가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 날은 꽤 날씨 좋은 초여름이었다. 풀내음이 어느 정도 올라오기 시작했고 리란은 그 냄새 속에서 어머니가 지켜보는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그가 발견한 건 벌레였다. 꽤나 큰 날개가 달려 있는, 어린 아이의 손바닥 정도의 벌레. 그건 땅에서 개미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아니 리란이 들여다볼 때 즈음 습격은 이미 성공해서, 개미들은 놈을 갈기갈기 해체시키고 있었다. 리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는 몰랐다. 그저 마음속에서 깊게 끓어오르는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달려왔다. 리란은 벌레를 가리키며, 어머니에게 이 웃긴 광경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보여주고 이 감정을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그 날의 외출은 이게 끝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리란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린 나이대의 아이들은 생각 없이 잔혹해질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소리. 순수하기에 오히려 더 잔혹하다고. 그러나 그건 위로일 뿐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리란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을 피하기 시작하고, 외출도 안 시켜주기 시작한 건 이 날 이후였다.
어머니는 본래 백작인 아버지의 눈에 들어 첩으로 들어온 평민이었다. 인자하고 상냥해서 다른 사용인들이나 본처인 백작부인하고도 마찰이 없었던 어머니는 리란이 웃음을 지은 이후로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몇 년이 지난 이후 어머니는 사라졌다.
어느 말이 맞을까.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어렸기에 그랬던 일이었을까.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리란 펠의 감정은 생명이 꺼져 가는 걸 목도할 때만 불탔다. 나머지, 그의 모습들은 모두 연기였다. 그 연기 연습은 책으로 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 어떤 감정을 품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오로지 배워서 알게 되었다. 리란에게 감정이란 것은 신기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리란은 사릴을 볼 때 무척이나 신기했다. 무언가가 죽어가거나 죽어 있는 광경이 아님에도, 책에 파묻혀 뚱한 표정을 짓던 금발 머리 소녀를 처음 본 순간 리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색감이 들어서는 느낌.
리란은 사릴에게 빠져들었다.
“그래. 이따가, 보자.”
리란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평소의 ‘유약하고 눈치 없는’ 도련님의 미소였다. 아까 맞잡았던 손을 들여다보았다. 예전 그녀의 온기 그대로의 손이었다. 부드럽고 말랑거리지만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당당한 손. 그 감촉을 다시 느낀 리란의 맥박이 빨라졌다.
사릴 카리즈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누군가의 간섭 따위는 참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지금 거슬리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자신의 쪽지를 치워버리고 다른 쪽지를 가져다놓은, 용기 있는 작자와 사릴의 곁에 있는 호위기사.
전자의 경우, 리란은 무슨 일인지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사릴이 창백하게 질릴 일이 뭘까? 그러나 사릴과 리란만이 쓰는 ‘작가’라는 이름을 다른 인간이 부르는 것만으로도 리란은 참을 수 없었다. 당장 그 인간의 머리를 자신의 앞에 가져다놓고 싶었다. 거기에다가 사릴이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걸 본 그였다. 당장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조금 미묘했다.
“안테아 경.”
리란은 그 기사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등장한 첫 날부터 이 학원 내 뭇 여성들을 두근거리게 하는 남자. 리란은 그런 기사가 사릴의 호위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실물을 보자, 과연,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남자라는 것을 인정했다.
다행히 사릴은 안테아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리란은 그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그녀를 위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리란 펠, 자신뿐이다. 어떤 누구도 그녀 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리란은 이를 꽉 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시작하자. 사릴.”
처음 본 그 순간의 그 다짐. 리란은 이 학원에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