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사릴은 뒤를 돌아보았다. 카리즈 공작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철혈 대신이라 불리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공작. 그러나 자택 내에서는 그저 딸 바보로 불릴 일이 더 많은, 사릴이라는 자식을 둔 아버지.
“예?”
“작가님. 글 쓰셔야지요.”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아버지. 사릴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버지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작가님”
그녀를 몰아가는 아버지를 피해 뒤로 돌자,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평소에 보여주지 않는 옅은,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비웃음이었다.
“어머니?”
“글 쓰셔야지요.”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사릴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이 흥건하게 쏟아져서 이불이 젖을 지경이었다.
꿈이었다. 아니, 지나친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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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릴은 하루 종일 볕이 잘 드는 정원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시선은 둘 곳을 몰라 이리 저리 방황했다. 금발 머리를 매만지다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거나, 꽃들을 바라보거나 하면서. 언뜻 보기에 그녀는 아무 고민 없는 태평한 사람처럼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지나치게 복잡했다.
쪽지 때문이었다. 앤이 말하기를, 아침에 일어나 방으로 찾아왔을 때 문 앞에 놓여 있었다던 그 놈의 쪽지. 그녀는 의심해볼 만한 인간을 하나하나 되짚고 있는 중이었다.
첫째로, 안테아 경이 제밀 먼저 떠올랐다. 어제 있었던 로디니와의 회담 이후 싸늘하기만 한 말들을 하고 사라진 남자이기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릴은 이내 그 생각을 버렸다. 안테아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라고 봐도 좋을 생각이었다. 그 젊고 차가운 기사는 할 말이 있으면 말할 것이다. 그렇게 치졸한 방식으로 사람을 옭아매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은 로디니와 미네였다. 그들에 대해선 잘 모르는 사릴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움직일 이유가 있었다. 독촉하면서 사릴이 글을 쓰도록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로디니 엘판이 대마법사 자격으로 카른 학원에 선생 직위를 따낸 것도 다시 생각해보면 미심쩍었다. 지나친 망상이겠지만, 설마 나 하나 때문에 이 곳에 온 건 아니겠지.
그 때, 누군가 사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릴 카리즈!”
사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청색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녀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밝은 햇살에 창백한 피부가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왔구나.”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사릴은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란?”
그녀가 집에만 틀어박혀 생활하는 걸 좋아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알고 지내던 다른 귀족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리란 펠. 펠 백작가의 셋째 아들. 가문끼리의 친분이 꽤 두터운 편이기에 종종 카리즈 영지를 방문했던 그는 사릴과도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며 지냈었다.
리란 펠이 앓고 있던 병세가 악화되어 밖에 못 나오고, 그 병이 호전된 이후에는 학원에 들어가게 되어 카리즈 영지에 방문하는 일이 뚝 끊겼었다. 그 것 때문에 사릴도 한동안 우울한 적이 있었다. 리란 펠, 사릴 카리즈의 유일하다시피 한 이성 친구.
그런 그가 카른 학원의 학생이라는 것을, 사건들이 워낙 한꺼번에 터져서 잊고 있었다. 리란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릴은 가만 그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손에 입을 맞추었다. 본래대로라면 반대로 해야 하는 인사다. 기사가 레이디의 손을 잡고 행하는 인사.
“잊지 않았구나.”
“벌써 잊으면 안 되지. 몇 년밖에 안 된 일인데.”
그건 둘만의 장난이었다. 스스로를 조숙하다고 여기고, 방 안에서 나오는 걸 귀찮아하던 꼬마 아가씨와 지병 때문에 밖으로 잘 못 돌아다니던 도련님은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사가 있었고 그래서 쉬이 친해졌다. 둘은 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란은 공작가의 서재에 훨씬 많은 책이 있다고 부러워했었다. 기사의 인사법을 바꿔서 해보자고 한 건 그런 이야기 와중이었다.
‘왜 항상 기사가 먼저 인사하고, 레이디는 손을 내밀고 있어야 하지?’
그런 뻔한 방식을 비틀어보자고 시작한 일종의 유희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사릴은 리란이 서 있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 앉자고 손짓했다. 리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창 떠들썩하던데. 너하고 안테아 경 때문에.”
리란도 안테아를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알지? 사릴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분명 리란이 발길을 끊은 건 안테아가 기사로 들어오기 전인 것 같았는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리란은 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는지 웃으며 말해주었다.
“지금 유명인사야. 사릴 아가씨. 그 안테아 경도.”
“어떤 식으로?”
“음, 그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불안하게. 리란은 묘하게 웃으며 뜸을 들였다. 쉬이 입을 열지 않는 폼이 꼭 안 좋은 소리를 하기 전의 예비 동작 같았다.
“안테아 경은 잘생겼는데 차갑기가 그지없어서 그게 매력적이라고 하는 소리가 있고, 사릴 카리즈 공녀께서는.”
“공녀께서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 사릴은 인상을 썼다.
“왜 그렇게 극과 극인거야, 안테아 경이나 나나 똑같이 행동했는데.”
“아니지, 적어도 안테아 경은 남자를 끌어안고 뒹굴진 않았잖아.”
사릴은 가만히 리란을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꼬집었다. 여전히 부드러웠다. 여느 여자의 피부보다 더 곱고 말랑거렸다. 그러나 사릴은 동시에 위화감 역시 느꼈다.
많이, 컸구나. 아까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는데, 리란은 전보다 훨씬 훤칠해져 있었다. 예전에는 사릴과 키가 비슷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분간이 안 갈 지경의 미소년이었다면 지금은 완연히 남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사릴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리란이 그녀의 손을 잡자 깜짝 놀라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리란은 놔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왜 그녀가 놀라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사릴은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놀리려고 온 거야, 위로하려고 온 거야?”
“반가워서 온 거지.”
“알았으니까 손 좀 놔줄래?”
리란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왜 이러지.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여러 가지 일로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가. 이 녀석한테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손을 잡힌 순간 심장이 약간 빠르게 뛰었다. 사릴은 고개를 조금 저으며, 오랜만에 봐서 적응이 안 되었나, 하고 넘어갔다.
“아. 저기.”
리란의 말에 사릴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안테아 경이었다. 옆에는 앤이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무슨 강제로 산책시켜 짜증난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끌려오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분위기가 성난 물소가 접근하는 것 같아서 사릴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리란은 그저 손을 흔들며 즐겁게 물어볼 뿐이었다.
“안테아 경이신 것 같은데?”
넌 저 기세가 보이지 않나 보구나. 사릴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테아가 오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와서 말하겠지 싶었다.
안테아는 그녀의 앞에 섰다.
“아가씨.”
“네, 안테아 경.”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안테아는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다. 그는 사릴 옆에 앉아 있는 리란을 보며 물었다.
“이 분은?”
“처음 보겠군요. 두 사람. 여기는 펠 백작가의 삼남, 리란 펠이라고 해요. 리란, 이쪽은 안테아 경.”
안테아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리란 역시 예를 갖추어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게 안테아가 가진 인내의 한계였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시죠?”
사릴이 묻자, 그는 숨을 잠깐 멈추더니 말을 쏟아냈다.
“왜 진작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걸요?”
“그, 이상한 쪽지가 와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런 걸 신경 쓰고 관리하는 게 제 일입니다.”
“하지만 안테아 경이 어제 삐져서 가버렸잖아요!”
묻는 게 그거냐. 사릴은 짜증나서 말했다.
“누가 삐졌다고 하는 겁니까?”
너요, 이 인간아. 앤의 상태를 보건대, 그녀는 안테아에게 들들 볶여서 잘 요리된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사릴은 눈을 치켜뜨고 안테아를 마주했다.
“아무튼 별 거 아니에요. 안테아 경이 이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요.”
“아닙니다. 저는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그걸 보냈는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아, 그거. 내가 보낸 건데.”
한창 설전이 벌어지려던 찰나,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던 리란이 그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뭐?”
“예?”
뭐라구요? 리란 펠 도련님? 뭐라고 했나요? 리란은 해맑게 웃으며, 사릴에게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왜, 글 쓰는 거 좋아했잖아.”
그랬지. 지금도 그렇고. 사릴은 입을 약간 벌리고 이 원수덩어리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락이 닿았으면 해서 적었지. 작가님, 하고. 장난이었는데.”
이 백치미의 전형적 인물 같은 인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