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카른 학원이군요.”
“예, 아가씨.”
사릴의 혼잣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앤과 안테아는 서로 마주보았다. 사릴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건물이었다. 안테아는 가만히 앤을 바라보았고 앤은 살짝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오는 내내 저 모양이었다.
안테아가 대하기 힘든 사람인 건 맞지만 저렇게까지 신경 쓰이나 하던 사릴은 이내 생각을 정정했다. 그는 앤이 실수한 것을 감싸주는-물론 그 이유까지 앤이 알지는 못하지만-행위를 했고 그래서 앤은 고마운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거였다.
“이제 저기에 마차가 설 겁니다.”
물론 안테아가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생긴 것도 한 몫 하고 있겠지만.
안테아는 손을 뻗어 학원 한 쪽을 가리켰다. 덕분에 사릴은 이제야 그가 자세를 바꾸는 걸 볼 수 있었다. 실로 대단한 인내, 수련의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마차는 오는 길 내내 덜컹거렸고, 사릴은 허리가 아파 와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어야 했다.
마부가 못 모는 것도 아니고, 마차가 좋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황도로 향하는 길이 문제였다.
막 포장된 도로가 여기저기 깔리던 시절이었다. 햇수로 따지자면 벌써 수백 년은 될 법한 오래 전 이야기. 그 때의 황제는 세상의 중심이 황도라는 걸 알리고 싶어 했다. 지상 만인의 주인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는 명했다. 황도로 향하는 모든 길에는, 도로를 깔지 말라고. 그리고 이 황제의 전통을 받들어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고되고 험난했다.
어디까지나 전설이었지만, 사릴은 허리를 뒤틀며 이 이야기 속 황제를 마구 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안테아는 전혀 안색도 바꾸지 않고 정자세를 유지한 채 그 고난을 헤쳐왔다. 대단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테아 경은 그렇다 쳐도, 앤은 언제 와 봤어?”
“저야, 아가씨를 모시기 전에 이리저리 일하면서 떠돌아 보았는걸요.”
사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앤은 그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눈을 빛냈다.
“설레지 않으세요?”
“왜 네가 더 흥분하니?”
말은 조금 퉁명스럽게, 귀찮은 듯해도 사릴 역시 마음이 달뜬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놀랐다. 사람들하고 마주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는 걸 못하는 사릴에게 학원행은 아버지가 제시한 두 가지 길, 사교 모임에 데뷔하는 것과 학원에 가는 것 중 차악을 고른 것뿐이었는데. 지금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여행길에도 사릴은 즐거웠다.
“다 왔습니다. 아가씨.”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릴은 그러나 당장 내리지 않고 마차 안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학기가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따사로이 쏟아지는 햇살 아래, 남녀가 사이좋게 걷는 모습, 즐거운 듯 담소를 나누는 여자들. 보기만 해도 절로 따스해지는 훈훈한 광경들이었다.
안테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안 내리십니까? 사릴은 하아, 하고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였다.
“어머, 처음 보는 마차네요.”
“그러게요. 카에리 양.”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던 사릴의 기분을 삽시간에 망쳐버리는 말들이 이어졌다.
“어느 집안의 자제분이실까요?”
“글쎄요. 조금 실례일지는 모르겠지만 집안 사정이 불우하신 것 같군요.”
하는 말은 점잖았으나 그 말투는 무척이나 깔보고 비웃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여자의 꾸짖는 소리.
“실례예요. 루산. 그렇게 들리게 말하면 듣는 분이 얼마나 마음 아프겠어요?”
그러는 너도 충분히 들리게 모욕하고 있거든?
“역시! 카에리 양은 마음씨도 참 곱군요.”
“그나저나, 사정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학원에 보내주는 좋은 부모를 만난 분이신 것 같군요. 부럽습니다.”
루산이라는, 사릴의 마차를 비웃던 남자와는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끼어들었다. 귀족 사회 경험이 적은 사릴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로맨스 소설을 탐독한 그녀이기에 알 수 있던 걸까. 필시 이 남자들은 카에리 양이라는 여성을 사모해 그녀를 쫓아다니는 모임 같은 거겠지.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릴은 일부러 집안에 있는 마차 중 가장 허름한 것을 타고 왔다. 아버지는 극렬히 반대했고, 어머니도 우려의 뜻을 표했지만 그녀는 확고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제국 단 둘 뿐인 공작가의 자제인데다가,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카리즈 공작의 딸이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입성한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릴은 조용하고 평범한 생활을 원했다. 집안이나 보고 접근하는 사람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저건 좀 아니지.
“어쩌면 저렇게 무례할까! 아가씨. 듣지 마세요.”
앤이 발끈하며 사릴에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나가서 따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사릴은 앤이 자기 몫만큼 화를 낸 덕분에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지 마, 앤. 저런 예의 없는 사람들 상대하면 똑같아지는 거야.”
사릴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앤을 달랬다. 앤은 좀처럼 진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릴은 그녀에게 신경을 쏟았고 안테아를 볼 겨를이 없었다.
덜컹, 하고 마차가 열렸다. 사릴과 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안테아는 이미 내린 후였다. 사릴은 당황해서 그를 따라 내려야 했다. 마차 밖에는 그녀의 예상대로 카에리 양이라는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안테아는 그들을 가만 둘러보았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안테아였다.
“어느 집안 자제분들이십니까?”
사릴은 그를 말리려 따라 붙었다가, 카에리 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당황하긴 했어도 아직 당당한, 그러니까 오만하기까지 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릴은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카에리 양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와 친해지기는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 가문의 이름이 무척 대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안테아의 싸늘한 목소리에 네 영식은 약간 물러섰다. 사릴은 어쩔 줄 몰라 안테아의 팔을 살짝 잡아 당겼다. 그러나 안테아의 팔은 딱딱한 나무 같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사내 한 명이 건방지다는 듯 소리쳤다.
“어디 기사이길래 이리도 무례한 건가?”
“오히려 되묻는 겁니까.”
안테아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사의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인사드립니다. 카리즈 공작가 기사 안테아, 카리즈 공작 영애 사릴 카리즈 아가씨를 모시고 학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일을 겪으면서 안테아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사릴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이 안테아라는 기사가 얼마나 싸늘하고 무시무시한 남자인지를.
“뭐라고......”
사릴은 무의식적으로 카에리 양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세 남자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사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름 호의적인 표시였다. 당신들이 무례를 저지르든 말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미소였다.
“그래서, 아가씨에게 무례를 저지른 여러분들의 성함을 듣고 싶습니다만.”
“아, 저! 죄송합니다!”
차가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안테아와 그녀의 미소가 조합되어 그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는 사실은, 카리즈 공작 영애께서는 무척이나 냉정하고 무서울 정도로 당당한 분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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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단 둘 뿐인 공작가의 여식이.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카리즈 공작의 딸. 그 호기심이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있었다. 덧붙여서, 첫 날 보여주었던 당당하고 품위 넘치는 모습이라는 소문까지 함께.
“내 학원 생활은 끝났어.”
사릴은 중얼거렸다. 분명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릴의 우는 소리에 앤이 쩔쩔맸다.
“차라리 내 가문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
사릴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 네 영식은 꽤나 활발한 성격이었고 학원에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소문이 쫙 퍼진 건 그들의 공로였다. 아니 그 전에,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 안테아 때문이었다. 사릴은 그녀 주위에서 수군거리다가 말을 멈추거나, 흘긋 흘긋 쳐다보면서도 사릴이 바라보면 두려운 듯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러면 잘 된 일일 거야. 차라리 혼자 조용히 다니면서, 소설이나 쓰는 생활이나 하자. 이보다 더 나쁜 시작이 있겠어? 사릴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복도를 거닐던 그녀 앞에, 그녀만큼이나 외로운 남자가 나타났다. 안테아 경이었다.
그 역시 첫 날의 모습이 인상 깊게 와전되어 ‘누구라도 카리즈 공작가를 무시하거나 무례를 저지르면 칼로 벨 듯한 사나운 남자’라는 모습이 되었다. 실제로 안테아는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기도 했고. 그래도 사릴보다 그가 나은 건, 그런 그에게 매력을 느낀 아가씨들이 한 눈에 반해 그를 멀찍이 떨어져서나마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안테아 경.”
“아가씨.”
그 때였다. 이보다 나쁜 출발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사릴이 얼마나 안일한지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군가 그녀의 앞에 툭 튀어나왔다.
“로디니 님! 갑자기 그러시면......”
어떤 남자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급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남자가 멍하니 서 있는 사릴에게 말을 걸었다.
“아, 찾아다녔습니다. 카리즈 아가씨!”
로디니라구요?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로디니? 그 때 앤이 소리쳤다.
“대마법사 로디니 엘판!”
사릴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 분명, 로디니라는 이름은 흔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로디니는 오로지 젊은 대마법사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마스터가 워낙 철이 없어서......”
아아니! 잠깐!
여자의 목소리는 달려온 여파로 꽤 커져 있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사릴은 급하게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막지 못한 여자의 눈이 약간 커졌다. 사릴 역시 예상보다 더 강하게 달려든 감이 없지 않았다. 원래라면 입만 막으려고 했던 것인데, 멈추지 못한 그녀는 여자의 품에 안겨 버렸다.
덕분에, 사릴 카리즈 공작 영애께서는 여성 취향이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