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학원의 일정이 시작되는 건 약 이 주일 뒤였다. 그러나 사릴은 당장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벤 경이 쫓겨나는 등 어수선한 와중에, 그 주모자 격인 자신이 저택에 남아보았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어머니가 이미 학원 수속을 마쳐놓았기에, 사릴은 학원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사릴은 아직 안테아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만은 용서해준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다. 그녀와 그는 어차피 학원에 같이 동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릴의 호위기사로서 안테아 경은 학원에 다니는 내내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하고. 사릴이 용서해준다고 말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자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아, 눈 마주쳤다.
사릴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안테아는 담담한 것 같았다. 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녀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사릴은 내색하는 대신 저택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저 가요!”
“어딜 가느냐!”
마차에 오르려던 사릴은 멀리 들리는 말에 잠시 멈추었다. 그녀가 안테아를 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학원이요!”
복도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공작님!’이라던가, ‘비켜라!’하는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폭발하는 것 같은 광경과 함께, 카리즈 공작이 튀어나왔다.
“안 돼!”
“돼요!”
사릴이 공작의 말을 받아칠 때, 공작의 뒤로 공작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유 있게 걸어 나왔다. 공작이 사릴에게 뛰어가려 하자, 공작부인은 그의 뒷덜미를 확 낚아채었다.
“무슨 소리예요, 당신. 이미 수속도 끝냈는데.”
부인은 웃고 있었지만 사릴은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지금 약간 짜증이 나고 있다는 것을. 공작도 그 기세를 읽은 듯 살짝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아이고, 저 딸바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기사들, 사용인들, 심지어 마부까지. 다들 말은 안 해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공작은 더욱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당신, 잠깐 놔줄 수......”
“아니, 안 돼요.”
공작은 축 늘어졌다. 그리고,
“안테아 경!”
부르짖음. 안테아는 그 목소리에 호응해서 고개를 숙였다.
“......진짜, 진짜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여 나쁜 마음먹은 놈들이 붙는다면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네.”
“걱정, 하지 마십시오.”
저 인간이 제일 나쁜데. 사릴은 어제 있었던 접촉 사건이 생각나 얼굴이 달아오를 뻔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아, 그리고 나도 함께 가는 걸로 하지.”
“여보!”
“아버지!”
다행히도 공작부인과, 사릴의 철저한 만류로 인해 공작의 배웅은 저택 앞에서 그칠 수 있었다. 사릴은 출발도 안 했는데 어쩐지 지친 느낌이었다. 유난스러운 배웅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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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들었어요?”
제국 제일의 배움의 장소. 교육의 총본산. 모든 것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 가장 고요한 태풍의 눈. 이 모든 것은 황도 한 가운데에 위치한 카른 학원에 대한 경외를 잘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학원은 아직 방학 중이었지만, 영지가 먼 귀족들이나 굳이 왔다 갔다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학원에 남아 있었다. 총원의 반수 이상이 아직 학원 내에 있다는 뜻이었다. 점잖은 공간, 점잖은 사람들. 미네는 이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이번 학기에 카리즈 공작 영애가 들어오신다 하더군요.”
“아, 저도 들었어요.”
그리고 나도 들었지. 방금. 미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삼삼오오 모인 여식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곳곳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미네는 그 중 관심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 정말 기대되네요. 공작 영애께선 어떤 분일까요?”
“들리는 소문에는 너무 아름다우셔서, 카리즈 공작께서 엄청 신경 쓰시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볼 기회가 그렇게 적었군요!”
미네는 두 영애가 속삭이는 것에 집중하느라 순간적으로 앞에 있는 대화 상대를 잊고 있었다.
“저, 미네 님?”
대화 상대인 남자는 굉장히 공손했다. 미네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하셨죠?”
“대마법사, 로디니 경께서 학원에 교사로 들어오신다는 이야기를......”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로디니는 ‘경’이 아니다. 기사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닐뿐더러, 그는 무인이 아닌 마법사일 뿐이니까. 하지만 미네는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네. 그러니까 이번 1학년 마법 분야의 교사로 추천받아서 들어올 겁니다.”
카른 학원의 마법 교사, 에나스는 얼굴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나이의 마법사였다. 그러나 마법의 세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오로지 실력만이 상하를 나누는 잣대였다. 그 예로, 에나스는 자신의 조카뻘 나이밖에 되지 않는 미네에게 계속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
“이미 허가는 다 받았고,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로디니 님께서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괜찮습니다.”
미네의 말에서 공통점이라도 찾은 걸까, 에나스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풀어졌다. 그가 말했다.
“원래 마법사라는 자들이, 일반 사람들이 볼 때는 특이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학생들도 그런 것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닌데. 미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나스는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때였다. 큰 소리가 나더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정원을 뒤덮었다. 미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에나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정원 한복판에, 잘 가꾸어진 꽃들을 뭉개며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그 여파로 흙먼지가 일어났고 영애들은 급하게 호위들의 뒤로 숨었다. 호위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그 곳을 경계했다. 검을 뽑는 기사도 보였다. 미네는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기에, 달려가려는 에나스를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저건......”
미네의 말이 끝나기 전에,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제 마스터입니다.”
로디니 엘판은 의자에 앉아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에나스는 입을 쩍 벌렸다. 미네는 다 포기하고, 체념의 미소를 지으며 에나스에게 반문했다.
“저런 모습에도 적응이 되어 있습니까?”
당연히 아니었다. 미네는 에나스를 향해 살짝 인사하고, 로디니를 향해 걸어갔다. 첫 인상을 강하게 주려는 거라면 성공이었고, 좋게 주려고 했다면 대실패였다. 역시, 위대하신 대마법사 다운 짓거리였다.
그녀가 로디니 앞에 가 설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소란스러움에도 깨지 않으니, 정말 신경줄이 어디까지 굵은 걸까 궁금해졌다. 미네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일어나세요.”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로디니는 일어설 수 있었다. 미네가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잠잠해졌던 주위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미네? 벌써 도착했나?”
“아직 정신 덜 차리셨군요. 몇 대 다독여드립니까?”
“포, 폭력 반대.”
로디니는 겨우 눈을 떴다. 병든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미네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에나스에게만 보이도록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에나스는 어느 정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고, 미네는 영창을 외웠다.
미네와 로디니와 그의 컬렉션 7호 의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게 칼른 학원의 대마법사, 로디니의 첫 출근이었다.
“여기서 끝나길 다행이라 생각하십시오.”
미네는 멱살을 놓지 않고 말했다. 로디니는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들은 지금, 에나스가 알려준 집무실로 이동한 차였다. 로디니는 미네의 손을 톡톡 두들겨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의자에 도로 주저앉은 그는 미네에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돈이 궁해서 여기 취직한 것도 아닌데 잘 보일 필요가 있나?”
“아니, 이러다가 쫓겨나기라도 하면 돈이 궁해질 겁니다.”
미네는 그를 향해 말을 쏘아붙였다.
“조사한 바로, ‘천재의 사랑은 더럽다.’와 현재 연재 중단한 ‘공작의 꽃’의 작가는 카리즈 공작 영애, 사릴 카리즈 양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구요.”
로디니가 끼어들려는 걸, 미네는 미간을 찡그려서 막아세웠다.
“아시겠습니까? 저희는 그녀가 집필을 중단한 이유와, 그 원인을 파악하고 다시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좀 성실해지십시오.”
아직도 멍한 표정. 제발 멍청한 표정 짓지 마라, 이 인간아. 당신은 최연소 대마법사라고. 미네는 결국 금단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최후통첩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제대로 안 되면, 로디니 님의 의자 콜렉션을 전부 팔아치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