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단순할수록 좋다. 복잡한 계획은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한번 꼬이면 답도 없을 정도로 진행되어 버리니까. 그리고 이 말이 떠오른다는 건, 사릴이 지금 벌인 일이 계획이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로 얇다는 뜻이었다. 우연이 우연히 겹쳐야 성공하는 도박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잘 하고 있는 거겠지.”
사릴은 배가 시큰거리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 모든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야한 소설을 쓴다는 걸 공작가 안의 누군가에게 걸리고, 그게 부모님 앞에 나타나고, 아버지 명령이라고 거짓말을 쳐서 벤을 속이고.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벤 경과 단 둘이 이야기했을 때는 긴장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워낙에 험상궂은 얼굴에다, 위압적인 덩치, 안 좋은 뒷이야기까지 겹쳐서 더 무서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아버지도 항상 말했는걸. 자기 건 자기가 지키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그게 ‘카리즈’란 성의 자부심이라고. 그녀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서자, 앤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아가씨!”
오구오구, 우리 앤. 울었어요? 사릴은 그녀를 향해 몸을 던지는 앤을 그대로 안았다. 폭 넓은 시녀복이 푹신하게 달라붙었다. 예전부터 그 느낌이 참 좋았다. 물론 시녀들은 흑백의 단순한 그 옷이 노동 복장이라 싫겠지만. 사릴은 손을 들어 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잘 될 거야.”
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사릴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씁쓸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자신도 믿기지 않는걸.
그래도 믿을 것이 없는 게 아니었다. 첫째, 벤은 음란하고 문란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에 시녀를 희롱하거나 집창촌을 들르는 등 품위 없는 행동을 해왔다.
둘째, 벤은 앤에 대해서 그가 보통 보이는 여성에 대한 집착을 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며, 안테아 경에 대해서는 극심한 증오를 보이곤 했다.
셋째, 어떤 시녀의 증언이 있었다. 벤 경의 처소를 청소했던 시녀가 발견한 건 그림책이었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 동화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성인의, 성인에 의한,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었다.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성행위들의 수위는 굉장했다고, 전해졌다.
넷째로, 오늘은 아버지께서 친히 관찰하시는 월례 훈련이 있는 날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으면 이용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사릴은 생각했다.
이제 곧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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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별 것 없지만 꽤 큰 행사였다. 공작의 기사들이, 자신의 주군 앞에서 그동안 놀고먹지 않고 이 정도로 수련에 정진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공작 저택 내의 사용인들이나, 근처에 사는 평민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공작도 그것이 대외적인 과시가 되기 때문에 보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따라서 월마다 열리는 이 훈련은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벤 경은 어디 있나.”
카리즈 공작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시끄러워야 할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기사들은 똑바로 사열해 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보였다. 사릴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에, 솔직히 놀랐다. 아무리 멍청해도 설마설마 했는데.
“누가 그를 불러오라.”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릴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날씨가 몹시 더웠다. 비교적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늘 하나 없는 곳에 무거운 갑주를 걸친 기사들은 오죽할까.
사람들 얼굴에 짜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몇몇 시녀들이 구경을 포기하고 사라질 즈음해서야 급하게 뛰어갔던 기사 뒤로 벤이 나타났다. 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공작은 그 기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둘이 속삭이는 모습에 이어 공작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려라. 기사들과, 시녀 앤만 남도록 하라.”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사용인들이 수군거리고,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기사들마저 당황한 기색이었다. 사릴은 앤을 따로 지적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너도 들어가라. 당신도.”
사릴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별 망설임 없이 등을 보이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다 전해 드렸단다.”
한 마디를 남긴 채.
사릴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고 항변했다.
“아니, 앤은 제 시녀잖아요. 같이 있을래요.”
역시 딸바보 속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공작은 사릴을 한 번 바라보고, 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릴은 앤의 손을 꼭 잡고선 무슨 일이 벌어지나, 자못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정리되고, 공작은 기사들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랑 장난치자는 거냐?”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해보도록. 이 카리즈 공작의 말이 많이 우습나?”
“아, 아닙니다.”
기사들은 일단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대답을 했다. 아버지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벤.”
“공작님. 억울합니다.”
벤이 큰 소리로 말했다. 공작은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그의 말을 쿨하게 무시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ㄷ. 벤이라는 이름 뒤에, 경이라는 칭호가 사라졌다. 그걸 느낀 건 사릴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동안 경들을 왜 풀어주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나? 어차피 말리고 명령을 내려고 뒤에서 딴 짓거리 하는 거, 잘 알고 있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기사들.
“돈으로 여자의 애정을 사도, 무슨 외설이나 낯 뜨거운 그림을 본다고 해도, 시녀들을 희롱한다고 해도 어느 선까지는 봐주었다. 직접적으로 추문이 걸리는 경우가 아니면. 왜? 경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믿었으니까. 주군인 이 내가 강제로 뜯어 말리면 불만을 품을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결과는.”
“아가씨께서.”
벤의 목소리가 공작의 말을 끊었다. 아버지가 사릴을 등지고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감히 내 말을 끊어, 라는 식으로 쏘아보고 계시겠지. 벤은 사릴을 노려보았다. 사릴은 움츠리지 않고 벤이 노려보는 걸 그대로 받아내었다.
“공작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상한 외설을 읽고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조사하면 그걸 바탕으로 처벌을 내린다고......”
“말이라고 하는 건가.”
사릴은 웃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이게 계획의 마지막 조건이었다. 카리즈 공작님, 그녀의 아버지께서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한다는 것. 다른 사람과 말이 서로 어긋날 때, 확실한 증거 없이 심증뿐이라면 사릴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 벤은 지금 그것을 간과하고 있는 거였다.
“끝까지 변명뿐이구나. 벤. 내가 널 왜 거두었는지 그 이유를 잊어버렸나?”
이제는 말투까지 바뀌었다. 정말로, 단단히 화났다는 증거였다.
“네 형 때문이다. 그런데 갈수록 실망만 안겨주는 거냐?”
“내가 싫어하는 게 세 개 있다, 벤. 변명만 늘어놓는 놈들, 약속을 못 지키는 놈들. 그리고 자신의 과오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새끼다.”
새끼!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 근엄한 아버지 입에서. 사릴은 뜨끔했다. 걸리면 나도 신나게 혼나겠지? 안테아와 눈이 마주쳤다. 평상시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는 사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짝 허물어졌다.
“내가 그런 명령을, 저 아이를 통해 전달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늦는 게 잘한 거냐?”
벤은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사릴이 바라마지 않던 이 연극의 피날레가 터졌다.
“그 외설이, 네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로 여러 사람을 음해했다는 것을 인정해라.”
공작의 선언에 사릴을 잡고 있던 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처절한, 흡사 울부짖음 같은 소리. 사릴은 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이 사람아. 평소에 행실을 곱게 썼어야지. 만약 그랬다면 저런 오해까지는 뒤집어쓰지 않았을 텐데. 공작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기사들이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겠지. 사릴은 불쑥 어떤 충동이 들었다. 조금 위험하겠지만, 뭐 어때.
“아가씨!”
벤이 그녀를 쳐다볼 때, 사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