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릴은 분명 저 글을 알고 있다. 당연하다. 자신이 쓴 글이니까. 하지만 어째서, 복사본 따위 없을 책이 저기 있는지. 설마 다른 마도서를 앤이 가지고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학의 부흥이라는 이름하에 배급하는 마도서, 인타넬이었지만 적어도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부인들, 혹은 부유한 중인들은 되야 얻을 수 있는 거였으니까.
앤은 글을 안다. 사릴이 직접 가르쳐주었으니까 확실하다. 그리고 앤은 그녀의 방에 제법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사릴은 굳이 책을 숨겨놓지 않는다. 앤 정도를 제외하고는 공작 부부도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 그녀의 방이었으니까. 이 모든 사실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공작은 물론, 공작부인과 여타 다른 하인들과 시녀 역시 어두운 표정이었다. 사릴 자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미소라도 띄고 있는 건 벤밖에 없었다.
“그만. 언제까지 읽고 있을 셈이냐?”
아버지가 차갑게 벤의 강독을 끊었다. 벤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래서 그게 누구에게서 나왔단 말이냐?”
사릴은 눈을 감을 뻔했다. 앤. 뭐라고 할 수도 없지. 애초에 내 잘못이다. 단속을 철저히 하지 않은 죄. 벤은 아주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앤이라는 이 시녀......”
“접니다.”
사릴은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에서 누가, 끼어든단 말인가? 그녀의 시선이 이동한 곳에는 놀라운 인간이 손을 살짝 들고 있었다.
“안테아 경.”
사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벤의 눈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더 사악한 미소를 띄며 웃고 있었다. 안테아 경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저 시녀에게 저걸 맡겼습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릴은 입을 살짝 벌렸다. 아버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아버지, 공작과 안테아 경 둘만이 아는 걸로 되어 버렸다. 공작은 안테아를 끌고 사라지며 해산을 명했고, 사람들은 일제히 흩어졌다. 안테아 덕분에 포화에서 벗어난 앤은 사릴이 챙겨서 데려왔다.
“무슨 짓이야.”
“아가씨. 절......”
“변명하지 마. 설명이나 해. 언제부터 알았는지, 저게 왜 밖에 나돌아 다니는지. 그리고 왜 벤 경 손에 저게 들어갔는지.”
앤은 결국 울었다. 사릴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물러서면 안 된다. 최소한 납득이 가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야 앤에 대한 배신감을 지우고, 그녀를 믿을 수 있다. 사릴은 목소리를 약간 부드럽게 하고, 앤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다시 말했다.
“설명해줘. 안테아 경에게 폐를 끼쳤잖아? 나는 알아야 한다고.”
앤은 서서히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사릴은 그런 그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사건의 전말이 새어나왔다.
벤은 기사다. 그러나 그는 성이 없다.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공작의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카리즈 공작의 사람 부리는 방식에 출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릴도 딱히 출신에 편견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안테아 경 역시 성이 없는 평민 출신이었으니. 그녀와 저택 내 사람들이 벤이라는 작자를 꺼리는 건 그 출신 때문이 아니라, 인성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카리즈 공작은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고, 뒤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릴은 부정했다. 공작의 인선이 잘못된 경우는 이번 한 번 뿐이었다.
사릴도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벤 경 같은 사람을 쓰는 거냐고. 아버지는 대답을 회피했다. 아마 말 못할 뭔가가 있는 거겠지. 사릴은 아버지를 존중했고, 그건 자신의 권한이 아니기에 그냥 넘겼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벤에게 구애 받았다고?”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구애도 아니고, 거의 반강제적으로 희롱한 거라고?”
역시, 끄덕임. 사릴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벤이 질 나쁜 언사와 행동을 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보니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한심한 짓을 하는 바람에......”
사릴은 앤의 손을 잡았다. 어쩌겠니. 호기심은 사람도 죽인다는데. 그리고 네가 읽는 걸로 안 그치고 손수 써서 책을 만든 것도 내 잘못이지. 내 글이 워낙 뛰어나야 말이지.
“걱정마. 내가 다 생각이 있어.”
사릴의 말에 앤은 눈을 깜박였다.
“앤, 내가 누구니? 나 이래봬도 그 유명한 카리즈 가문 핏줄이야. 응?”
카리즈 가문은 제국 내 단 두 개 뿐인 공작 가문이다. 유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릴이 말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앤도 알고 있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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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릴은 저택 복도로 나섰다. 앤은 방에 그대로 두고서였다. 만약 그녀를 밖으로 내보낸다면 이상한 추문에 휩쓸리거나 기사들에게 붙들릴 수도 있었다. 그 때였다. 복도를 걷던 그녀의 눈에 한 기사가 들어왔다. 안테아였다. 사릴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도망이나 쳐요.”
안테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시선이 사릴에게 와 박혔다. 오늘 일어난 소동과는 전혀 관련 없다는 듯 담담한 눈. 사릴은 부러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
“무슨 소리입니까.”
“어차피 내 호위로 학원, 따라오는 거잖아요?”
안테아는 동의의 고갯짓을 했다.
“그럼 이대로 대충 변명한 다음, 도망쳐요. 아버지는 안테아 경을 믿고 있으니까 일단 멀어지면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있겠죠. 관용을 베풀 수도 있고.”
“그래선 안 됩니다.”
이 답답한 인간.
“뭐가 안 돼요? 기사로의 자존심? 그게 밥 먹여줘요?”
사릴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이대로 있다간 안테아 경, 아버지한테 찍혀요. 여기 발도 못 붙인다구요.”
그냥 쫓겨나면 양반이지. 안테아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십니까?”
왜냐고?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렇게 말할 용기는 사릴에게 없었다. 그녀는 대신 다른 말을 던졌다.
“날 도와줬잖아요. 앤한테 다 들었어요. 안테아 경, 경은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쓴 거죠?”
안테아가 나섦으로 인해 앤은 공작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벤이라는 인간 역시 안테아를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공격의 방향을 바꾸었다. 덕분에 앤과 연관되어 사릴의 비밀이 드러날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안테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가씨를 도와준 게 아닙니다.”
이 빡빡하고,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간.
“그저 벤이라는 인간이 어떤 자인지 알기에, 그 모습이 보기 싫어 그랬을 뿐입니다.”
그냥 솔직해지면 어디가 덧날까. 사릴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안테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사릴은 계속 걸어갔고 그는 계속 물러섰다. 이윽고 안테아를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창가로 몰아간 그녀는 몸을 바짝 당기고, 고개를 들어 안테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합격이에요. 안테아 경.”
사릴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안테아의 색다른 반응이 재미있었다.
“네?”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안테아는 눈을 깜박였다.
“저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격언 아시나요?”
“네.”
“네가 뭘 하든 상관없다. 내 것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원래는 좀 더 고상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격언이었다. 그러나 사릴은 툭 까놓고 말해버렸다. 말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이 뭘 하든 기본적으로 무관심하게 방관한다. 그러나 내 것을 건드리는 순간, 모든 힘을 다해 지키고 복수한다. 지금 사릴에게 있어 벤이 그런 존재였다.
“착각하지 마시죠. 안테아 경. 당신을 돕는 게 아니라, 내 시녀를 건드린 값을 받아낼 뿐이니까.”
물론, 거짓말이다. 사릴은 안테아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쑥 심술이 솟아나 약간 싸늘하게 말했다. 안테아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벤, 이 인간. 내가 네 인생 어떻게 끝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사릴은 피식 웃었다. 시녀들의 정보망을 우습게보면 안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다. 사릴은 비열한 수로 벤을 상대하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