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요?”
사릴이 물어왔다. 안테아는 약간 미심쩍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놀리는 건가? 기사씩이나 되어서 외설적인 것을 밝히는 놈이라고? 그러나 사릴의 표정은 진지했다.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안테아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표정이 이번에는 얼빠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참 다채롭다. 평소에도 좋게 말하자면 백치미가 넘치는 분이고, 나쁘게 보자면 생각 없이 해맑은 아가씨이긴 했다. 그런데 지금 저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안테아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읽었을 때는 잘 몰랐다. 애초에 그는 책이란 것을 접해볼 기회가 무척이나 적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호기심과, 일상을 벗어나는 배덕의 두근거림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그런 종류의 책을, 읽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공작가 내에서 안테아의 입지는 최악이었다. 실력?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최상위에 속해 있다. 신임? 카리즈 공작은 거의 무조건적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두터웠다. 문제는 그 외에 모든 것이었다.
특히 벤, 기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작자가 컸다. 안테아가 오기 전 기사들을 이끌던 장(長)이었던 그는 여러모로 안테아에게 유감이 많았고, 그건 다른 기사들이 그를 적대하는 구조를 이끌어내기 충분한 이유였다. 때문에 안테아는 잘못 움직여, 흉잡힐 일을 해선 안 되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공작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어, 언제부터요?”
사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럼, 안 되는 일이지. 사릴은 숨을 조금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잠깐 1장만 보았을 뿐이다. 그랬는데도 뒷내용이 궁금해졌다. 분명 야한 걸 주된 소재로 잡은 소설일 것이고 그 중에서도 동성애라는 키워드를 원하는 사람들이 읽을 소설이다. 그런데 그 약간의 문장들이 안테아를 뒤흔들었다. 책이라고는 관심도 없고 ‘그런 분야’에도 흥미 없는 그를.
사릴 아가씨. 그거 아십니까? 당신 재능은 정말 악마의 재능입니다. 안테아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퀴퀴한 침묵이 방에 가라앉았다. 안테아는 괜히 사릴의 손에 잡혀 있는 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책은 다시 빛나지 않았다.
--
이게 무슨, 소설에서나 보는 설정이지?
“아가씨?”
안테아는 결국 그 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나갔다. 대신 앤이 돌아왔다. 사릴은 멍하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쳐다보고 있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그 날 어쩌구, 운운하며 근심스럽게 말하는 앤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조금 쉬시는 게......”
“그래, 그게 좋겠어!”
사릴은 앤의 말을 자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앤이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밖으로 밀어내었다. 아니, 아가씨! 하고 황당하게 외치는 앤을.
“내가 나오거나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마.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렇게 혼자 방에 남은 사릴은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차근차근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명 안테아는 그녀의 가장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 방에 자꾸 찾아오고 아무도 없는 숙녀의 방에 들어선다는 건 평소의 안테아 경의 행실로 볼 때 절대 하지 않을 짓이다. 첫 번째는 아버지 명령으로 그럴 수 있다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분명 올 이유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그 고백.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증거가 아닌가? 사릴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 빨개진 건 아니겠지? 그녀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안테아 경이 진짜 날 좋아하는구나.
공작의 딸과 그 기사의 사랑. 분명 어긋나 있다. 뭐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사릴은 여러 가지 걱정과 격정에 몸을 뒹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왜 연락이 안 오지?
사릴은 가만 책을 들여다보았다. 겉보기엔 평범한 책이다. 하지만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은 이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책이기도 했다.
책은 귀족의 전유물이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책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그 가문의 권세가 얼마나 크냐는 것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책을 만드는 데는 많은 인력과 시간과 재력이 필요하다. 종이 자체는 구하기 까다로운 물품이 아니다. 문제는 그 종이에 무엇이 쓰이고 어떻게 전해지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쓰고 그걸 그대로 복사하면 책이 대량으로 퍼지게 될 테지만, 그런 기술은 제국에 없었다. 따라서 책 하나를 보급하기 위해선 필사가들이 필수였고, 그들이 책 하나를 끝내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책값이 비싸지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할 수 있느냐, 하면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마법사들은 그런 보급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꺼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들만이 누리던 마법의 혜택 같은 것들이 글로 쓰여 퍼지는 것이 싫었기에.
그 불문율을 깬 것, 더 나아가 수많은 문학의 보급을 열었던 것이 이 마도서, 인타넬의 등장이었다. 하나의 책이지만 수많은 내용이 떠오르는 그야말로 마도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책.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가격일 테지만, ‘문학의 부흥을 위해’라는 웃기는 이유로 귀족가 곳곳에 퍼지기 시작한 마도서.
사릴은 그 마도서에 글을 써, 연재를 하는 작가였다.
“분명 오늘인데. 왜 연락이 안 오지?”
글을 올리겠다고 한 기한이 지났다. 연락이 올 터인데. 사릴은 의아해서 마도서를 쓰다듬었다. 요즘 영 글을 쓸 생각이 들지 않아 한동안 미뤄두었던 일이었다.
“아니, 그건!”
그 때였다.
“이게 뭔가 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릴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바깥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앤의 목소리였다. 그 상대는, 아마 벤 경의 목소리 같았다. 영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사릴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문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벤 경과 앤. 안테아 경. 그 외에 다른 하인들과 시녀들, 기사들까지. 평소의 활기찬 저택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혹스러움과 수근거림이 더 컸다.
사릴은 가만 그 면면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일의 중심은 벤 경과 앤, 두 사람인 것 같았다.
사릴은 약간 불쾌해졌다. 벤이라는 저 사내는 실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은 자였다. 아마, 안테아 경을 따돌리는 치졸한 짓을 한다는 것을 들어서일지도 몰랐다. 편견이 생긴 걸까? 그래도 감히 자신의 시녀를 건드리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사릴은 벤의 손에 들려 있는 걸 보고 말았다. 하나의 책이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들떠 있는 마음을 차갑게 식혀주는 불길함. 앤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벤은 히죽거리며 사릴을 돌아보았다.
“아가씨.”“벤 경. 제 시녀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와. 설마 저거, 아니겠지? 사릴은 설마 하는 마음에 앤을 바라보았다. 앤은 감히 그녀와 눈도 못 마주치겠다는 듯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지요, 아주 큰 잘못입니다! 이런 외설을 몸가짐이 단정해야 하는 아가씨의 시녀가 읽고 있다니요!”
설마는 역시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걸, 사릴은 다시 깨달았다. 정말 저거 내 소설이구나. 그 때였다.
“무슨 일이냐.”
일순간 조용해지는 공간. 사릴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였다. 엄숙하기 그지없는 걸음걸이였다. 벤과 앤, 안테아 등 사릴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무슨 일이냐 물었다. 벤 경.”
그 뒤에는 어머니까지 서 있었다. 이건, 진짜 큰일이다. 벤 경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추태입니까! 아가씨의 시녀가 되는 이가, 이런 외설스러운 소설을 품고 있다니 말입니다!”
멍해지는 기분, 그래. 오늘 하루만 몇 번이나 느끼는지 모르겠다. 벤 경은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보고 씩 웃었다. 한 대 때리고 싶은 웃음이었다.
“그게 뭐라고 이러는 것인가.”
“일단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저건 저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벤은 목을 가다듬고는, 몹시 수치스럽다는 듯, 그러나 즐거이 책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제 1장. 접근 금지. 젊은 기사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의 주인이 그를 부르지 않는 것이. 왜 그러시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