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릴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녀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날아왔다.
이게 설마 기사의 경지에 다다른 자만이 낼 수 있다는 무형기인가. 그럴 리가 없지. 사릴은 배시시 웃으며 뒤로 돌아섰다.
안테아 경이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릴은 미소를 딱 굳혔다. 그만큼 싸늘한 기색이었다.
“안 들어가십니까?”
평소에도 싸늘한 사내긴 했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무표정과 무뚝뚝함. 그게 안테아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은 싸늘함 정도로 표현되는 게 아니었다. 손대면 쩍쩍 얼어붙을 정도였다. 사릴은 시무룩해져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쳇, 안 넘어 가네. 사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반은 진심이었지만 반은 의도된 행동이었다.
사릴은 안테아가 그녀를 가엾게 보아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무슨 벽돌마냥 굳건하게 서 있기만 했다. 사릴은 고개를 내젓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릴은 들어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카리즈 공작은 엄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평소엔 안테아 정도로 냉정한 공작이지만 딸한테만은 유순하고 풀어지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나쁘게 말하자면, 소위 딸바보라는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의 딱딱한 모습에 사릴은 절로 긴장했다.
아버지 옆에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썩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늦었구나.”
“죄송해요.”
“앉아라.”
사릴은 고분고분 그 말에 따랐다. 앉으면서 사릴은 어머니를 흘긋 바라보았다. 뜻은 명확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단서를 알려 달라. 어머니는 사릴과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뜻 역시 명확했다. 분위기가 안 좋으니 일단 닥치라는 뜻이었다.
“사릴.”
“예.”
잠깐의 침묵 끝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사릴은 재빨리 대답했다.
“생각을 정했단다.”
“무슨?”
“널 사교계에 데뷔시킬 거란다.”
카리즈 공작의 말에 사릴은 멍해졌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아버지, 소녀 나이 이제 겨우 열아홉입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몸의 준비 또한 미흡하오니 부디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릴은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떤 말투로 하는지도 모른 채 마구 말을 쏟아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모님은 물론이고 시종들의 눈초리마저 심상치 않았다. 그제야 사릴은 자신의 말투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낯선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귀족 영애들은 보통 열넷, 늦어도 열여섯까지 두 개의 진로 중 하나를 택한다. 사교계에 데뷔해 하하호호 거리며 우아한 티파티를 즐기다가 결혼을 하는 것과, 학원에 들어가 공부하며 교양을 쌓고 결혼을 하는 것. 어찌되었건 결론은 결혼이었다.
“겨우 열아홉이라고.”
“네.”
공작은 끙 소리를 내고는 턱을 괴었다. 사릴은 몸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옆을 보니 어머니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저건 일종의 예비 동작이자 경고였다. 이제 곧 폭발하니 알아서들 피하라는, 공작이 가진 특유의 몸동작.
“겨우, 열아홉! 사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 네 또래들은 이미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아니면 이미 학원에 들어가 그 나이에 맞는 교양을 쌓고 있거나!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기나 하니? 카리즈 공작가의 영애께서는 무척 멍청하거나 못생기거나, 심한 병에 앓고 있다는 등 헛소리들을 잔뜩 듣고 오는 길이다!”
아아, 결국 원인제공은 그 망할 놈의 귀족들이군. 사릴은 이를 갈려다가 딱 멈추었다.
지금은 최대한 가련하고 불쌍한 연기를 해야 할 때였다. 물론 카리즈 공작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세력가였다. 면전에 대고 저딴 말을 지껄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빙빙 둘러서 혹은 좋은 말로 포장해서 비꼬았겠지.
딸바보의 훌륭한 표본인 아버지는 분통이 터졌고.
“그러니, 아무 말 마라! 이미 결정한 일이다.”
“하, 하지만 아버님......”
사릴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공작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여리고 약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공작에게 무언가 잘못하거나 원하는 게 있을 때 사용하는 사릴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작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쳇, 안 통하네.’
사릴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차라리 학원을 가겠습니다.”
뜻밖의 말이었던 듯, 공작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가?”
“왜 의심하는 말투이시죠?”
“아, 아니다.”
공작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릴은 바짝 긴장했다. 그녀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도가 학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교계에 오르게 되면 곧장 혼사 이야기가 오가겠지. 공작가의 외동딸. 누구나 탐을 낼만한 혼인이니까. 사릴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학원에 들어간다면 최소한의 유예는 바랄 수 있다.
사릴은 얼른 어머니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지원을 바란다는 뜻이었다.
“사릴이 뜻이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요.”
역시 어머니! 사릴은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였다. 공작은 흔들리는 기색이었다. 사릴은 여기서 결정타를 날려야 할 순간임을 직감했다.
공작은 결국 항복했다. 장장 이십분에 걸친 사릴의 애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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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 오늘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아가씨.”
사릴이 되도 않는, 그러니까 아버지인 공작 외엔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을 애교를 부린 끝에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사릴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아주 잘 알았다. 사릴은 몸을 돌려 안테아를 노려보았다.
“안테아 경.”
“해명, 해주셔야겠습니다.”
사릴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변명할까, 사실대로 말할까. 왜 하필이면 이 인간이야!
제국 단 두 개뿐인 공작 작위의 카리즈 가문이다. 그만큼 저택의 크기도 엄청났다.
사릴은 큰 저택 안의 여러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누구를 떠올려도 이 청년, 안테아 경에게 걸린 것보다 최악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부모님만 제외하면.
“이, 일단 제 방으로 오세요.”
안테아는 고개를 숙여 명에 따른다는 뜻을 밝혔다. 사릴은 느릿하게 앞장서 걸었다. 그녀의 머리는 계속 팽팽하게 돌아갔다.
뒤에선 그녀에게 걸음을 맞추는 안테아의 발소리가 들렸다. 흡사 사신이 쫓아오는 것 같은 묵직한 존재감이었다.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오른 건 방 앞에 설 때였다.
‘흥, 어차피 이제 자주 안 볼 사람이잖아. 입단속만 시키면 되지 않을까?’
그 입단속이란 걸 어떻게 시켜야 할지는 생각해 볼 문제지만. 사릴은 문을 열고 안테아를 맞이했다.
“시작할까요?”
사릴은 의자에 앉아서, 문제의 그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안테아는 살짝 인상을 썼다.
“어디까지 읽으셨나요?”
“첫 장까지만 보았습니다.”
“왜 보셨나요? 제 사생활입니다. 안테아 경. 함부로 읽으시면 안 되는데요.”
안테아의 약점. 사릴은 그것을 파고들었다. 너도 나도 잘못했으니 서로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자.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건’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이 무척 찝찝했다. 역시, 안테아는 결코 굴하지 않을 기세였다.
“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같이 그걸 들고 공작님께 찾아가시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걸 아버지께 보여 드리라고요?”
안테아의 뜻을 사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너도 나도 잘못했으니 같이 공작에게 혼나보자, 라는 일종의 자폭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사릴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되었건 간에, 나는 내가 이걸 썼다고 부모님께 알리고 싶지 않아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안테아 경? 부디 부탁인데 비밀로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 이 정도가 딱 적당한 말투였다. 말을 마친 사릴은 안테아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보고 말았다.
무슨 뜻이지? 왜 저러는 거야? 사릴은 의아했다. 그리고 이내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걸 아가씨가 쓰셨습니까.”
“무슨 말이죠.”
“저는, 단지, 아가씨가 흥밋거리로 읽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가씨가 저자인 줄은 몰랐는데......”
망했다. 사릴 카리즈. 오늘 아주 그냥 제대로 망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