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다급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눈이 흔들리고 손은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사릴 카리즈는 방 안에 떡 하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생겼다. 아니, 그냥 잘생겼다. 사릴은 슬쩍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그녀의 책상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
이윽고 남자가 사릴을 불렀다. 사릴은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아닐 거야. 아직, 다 읽진 않았을 거야.
“이건, 뭡니까?”
“아아, 아니!”
사릴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 약점을 감추기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것. 그것이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 사릴은 눈에 힘을 주고 남자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그러는 안테아 경,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거죠?”
천재 소리를 듣는 젊은 기사. 카리즈 공작가의 자랑, 안테아는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사릴은 희망을 느꼈다. 분명 안테아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안테아는 잠시 멈춰 섰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사릴은 재차 물었다.
“왜 함부로 숙녀의 방에 침입한 거죠?”
“......공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사릴은 순간 멍해졌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알고 계신건가? 사릴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식사 때까지만 해도 그런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사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테아는 약간 물러서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를 모시고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다행이다.”
“네?”
사릴은 안도감에 휘청거릴 뻔 했다. 그렇구나. 아직 아무도 모르는구나. 들킨 게 아니었어. 조금 진정한 사릴은 다시 원래의 말투로 말했다.
“그럼, 안테아 경, 아버지가 절 데리고 오라고 해서 방문했고, 내가 말이 없자 들어와 본 것뿐이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사릴의 명랑한 말투에 안테아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정중한 태도였다. 사릴은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안테아가 ‘저것’에 손대지 않고 이 방을 나가는 것. 그 전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안테아가 고개를 들며 자연스럽게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사릴은 급하게 달려가 안테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깜짝 놀란 듯 손을 탁 하고 빼내었다. 정적이 흘렀다. 안테아가 낮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자기 오셔서......”
사릴은 애써 웃었다.
“그럼 가요!”
안테아가 급히 사과하자 사릴은 바로 말을 받았다. 그러나 안테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완강한 힘으로 사릴을 떼어낸 다음,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아가씨. 대답 해주셔야겠습니다.”
사릴은 눈 끝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안테아는 물었다. 변함없이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사릴은 조금 사나워진 기색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건 뭡니까?”
사릴은 직감했다. 이 남자, 봤구나.
사릴 카리즈 공작 영애, 제국에 단 두 개 뿐인 위세 높은 공작가의 외동딸. 그런 그녀에겐 남들과 다른 비밀이 하나 있다. 그녀가 작가라는 것이었다. 떳떳하지 않느냐고, 얼마나 고상하고 훌륭한 직업이냐고? 만약 누군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사릴은 그녀의 소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읽다가 빨개진 양 볼을 부여잡고 사릴을 쳐다보겠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안테아처럼.
사릴은 야한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 얼굴이 홧홧해질 정도로 달아오르는 문장과 전개. 그게 그녀의 자랑이자 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