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은 채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태청관 도사 맹검이 숨을 급히 들이키며 두 눈을 번쩍 떴다.
날카로운 왼쪽 눈과 달리, 오른쪽 눈에는 희끄무레한 막이 덮여 있었다. 곧바로 서수필을 집어든 맹검은 글씨도, 그림도 아닌 것을 마구 휘갈겨 내렸다.
그 앞에는 권승휘와 그의 아비 권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맹검의 서수필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맹검의 붓이 멈추었다. 권승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답이 나왔는가?”
권전이 답을 재촉했다.
“어서 대답을 해보게. 승휘께서 아들을 낳으실 수 있겠는가?”
맹검의 입에서 노인의 것 같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승휘께서는……,”
권승휘와 권전이 동시에 마른 침을 삼켰다.
“아들로 인해 귀한 이름을 얻을 운이십니다.”
권승휘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아들로 인해 귀한 이름을 얻는다면……, 원자 애기씨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권전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물었다. 맹검이 청색 벽라의 도복의 소매를 여미며 종이 하나를 건넸다. 종이에는 날짜와 시가 적혀 있었다.
“이날 이때 합방을 하시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잉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권승휘가 종이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왼쪽 볼에만 팬 볼우물이 쌜룩거렸다. 날짜를 본 권전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날은 세자저하의 탄일이 아닙니까? 저하께선 지금 종학에 나가 계시고요.”
“탄일 전에는 궁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만약 안 돌아오신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합궁을 해야지요.”
“다만 한 가지……,”
권승휘와 권전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승휘께선 아드님과의 인연이 짧습니다.”
“이, 인연이 짧다니……, 그 무슨 말인가?”
권승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승휘께서 아드님을 안으실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안전이라고 허튼소리를 주워 삼기는가!”
권전이 노기 어린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 소리가 문지방을 넘지는 않았다.
“인연을 기, 길게 하면 되지 않느냐? 부적을 쓴다거나 기도를 올린다거나, 굿을 할 수도 있고 말이야. 도사는 공력이 높으니 그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그렇지?”
권승휘가 바짝 다가앉았다. 맹검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늘이 정해놓은 길을 한낱 인간이 어찌 바꾸겠사옵니까? 이 생에 주어지는 복을 감사히 여기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무엄하다! 어디 한낱 도사 나부랭이가 감히 승휘를 가르치려 드는 게야?”
권전이 눈썹을 찌푸린 얼굴로 서안을 탕탕 두드렸다.
“송구하옵니다.”
말은 그리 하면서도 권전을 바라보는 맹검의 얼굴은 고인 물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권전이 맹검을 내쫓다시피 내보냈다.
“아버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원자를 낳을 수는 있으나 원자와의 인연이 짧다니요?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랍니까?”
권승휘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망울로 권전을 보았다.
“승휘, 저자가 한동안 칩거를 했다더니 정신이 어찌된 것이 분명합니다. 저자보다 훨씬 뛰어난 도사로 수소문해보겠습니다.”
권승휘가 불안이 가시지 않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권전이 딸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도사들이란 원래 허무맹랑한 소리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자들이 아닙니까? 마음을 불안하게 한 뒤, 그걸 핑계 삼아 재물이나 자리를 얻으려는 속셈일 것입니다.”
권승휘의 고개가 자잘하게 흔들리더니 비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세자빈입니다.”
“예?”
“세자빈이 내 아들을 빼앗아간다는 뜻입니다!”
“승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세자빈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분명 저 이가 내 앞길을 가로막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한 시도 떠나질 않았단 말입니다!”
“승휘, 우선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세자빈이 입궁한 지 칠 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승휘인 제가 아들을 낳으면 어찌 됩니까? 저의 아들이 세자빈의 양자가 되지 않습니까?”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으로……,”
“형식적이라구요? 저의 아들을 안아볼 수도 없고, 아들을 어미라 부를 수도 없고, 아들이 보위에 오른다 한들 후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영광도 명예도 없이, 외딴 궁에 처박혀 입 한 번 벙긋 못하고 여생을 살아야 하거늘! 그것이 어찌 형식적인 것이라 하십니까, 아버님!”
권승휘는 있지도 않은 아들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파들파들 떨었다. 자식을 지키려 이를 드러내는 맹수와도 같은 딸의 모습에 권전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 고민하던 권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전하께 적서간 차별을 철폐해 달라 상소를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유생들을 움직여 권당을 하게하고, 신료들 중에도 뜻을 같이 할 이들을 모아보겠나이다. 신료들의 말을 무시했던 선대왕과는 달리, 전하께서는 늘 신료들의 의견에 귀를 열어두시니……,”
“아니오. 전하께선 그리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찌 단언하십니까?”
“수많은 서자를 두신 분입니다. 적서 차별을 없애면 선대왕 때의 아귀다툼이 반복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어찌 그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권승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제가 세자빈이 되는 것입니다.”
“승휘, 말씀을 가려 하십시오. 듣는 귀가 많습니다.”
권전이 주위를 살피며 속삭였다.
“제가 세자빈이 되면 아들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세자빈이 버젓이 있는데 어찌…….”
“세자빈이야 쫓아내면 되지요.”
권승휘가 생각에 골몰한 듯 허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처음 보는 딸의 사나운 표정에 권전의 손바닥에서 진득한 땀이 배어나왔다. 평생 궁에서 일하며 온갖 권모술책에는 제법 도가 텄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 감히 떠올리지 못한 일이었다.
권전이 목소리를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추고 빠르게 속삭였다.
“세자빈을 쫓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칼을 잘못 놀렸다가 되려 우리가 그 칼날에 베일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칼을 잘 놀려야지요.”
“적당한 빌미를 만들어낸다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선 이미 세자빈을 한 번 내쫓으신 분입니다. 세자빈을 두 번이나 내쫓으면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릴 것이 뻔한데 그런 처분을 내리시겠습니까? 전하께선 유난히 사람들의 말에 민감한 분이 아니십니까?”
“아버님께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 한 번 내쫓았으니 두 번도 내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뭐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일이지 않습니까? 아버님 말씀대로 전하께선 털끝만큼의 흠결도 견디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 성정이 우리 편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권전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없애야지요.”
한쪽 입 꼬리를 올린 권승휘를 권전이 낯선 사람 보듯 보았다. 한없이 순하고 천진하던 딸이 궁 사람이 다 되었다는 생각에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일었다.
권승휘는 자신을 야차 보듯 보는 아비의 시선을 외면했다.
궁이 어떤 곳인가? 매일같이 보이지 않는 칼바람이 불고,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목을 찔러대는 곳이었다.
다들 웃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웃고 있지 않은 곳이 궁이었고, 내가 높아지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찍어 누르는 곳이 궁이었다.
그런 궁에서 다섯 해를 버텼다. 이리 변하지 않고선 다섯 해는커녕 닷새도 버틸 수 없었으리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습니다. 적당한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니 아버님께선 대비에 만전을 기해주세요.”
권전이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향의 탄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는 내일이면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월은 떠오르는 해를 붙들고 싶은 심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월의 마음 따위는 알 바 없다는 듯, 해는 힘차게 두둥실 떠올랐다.
월만큼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가 또 있었으니 바로 석가이였다.
삼짇날 이후 석가이는 자책과 후회로 머리를 수시로 쥐어뜯는 바람에 숱 많던 머리가 반절은 줄어든 듯하였다.
조반상을 내온 석가이가 털썩 주저앉았다.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이 시커멨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석가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끝내 석가이가 쿨찌럭거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밥상머리에서 눈물바람이냐.”
보다 못한 월이 한마디 했다.
“제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저를 말리셨어야죠. 제가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걸 마노라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그날이 어떤 날인데, 운명의 정인과 드디어 이어질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이었단 말입니다. 마노라께서 술만 못 먹게 해주셨어도 제가 소쌍 악공과 그리 허무하게 헤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또 그 소리냐? 내가 너와 운명의 정인을 일부러 갈라놓기라도 했단 말이냐?”
월이 지겹다는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입이 써서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잖아요.”
석가이가 울먹이며 맞받았다. 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나를 탓하려무나.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다. 니가 궁에 들어온 것도 내 탓, 니가 운명의 정인과 어긋난 것도 내 탓, 니가 술을 먹으면 개가 되는 것도 내 탓.”
“안 되겠어요!”
석가이가 발딱 일어났다.
“저잣거리로 나가봐야겠어요.”
“저잣거리엘?”
“예. 그분을 뵈어야겠어요.”
“저잣거리에 가면 그 사람이 있다더냐?”
석가이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인상까지 써가며 집중하던 석가이가 눈을 번쩍 떴다.
“나왔어요!”
“뭐가 말이냐?”
“소쌍 악공이요.”
“그걸 니가 어찌 아느냐?”
“운명의 정인끼린 태래파시가 통하거든요.”
“태래파시? 그건 또 뭐냐?”
석가이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통할 태, 올 래, 물결 파, 화살 시! 운명의 상대에게서 물결과 화살처럼 오는 특별한 기운 말이에요. 지금 분명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서 절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마노라, 저 나갔다 올게요.”
월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좋을 대로 하거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석가이가 쓰개치마를 챙겨들고 쪼르르 달려 나갔다.
* * *
“승휘, 명하신 것을 사왔사옵니다.”
나인 단지가 단단히 여몄던 보자기를 풀렀다. 그 안에는 산삼 한 뿌리와 말린 잠자리 한 줌, 노루와 백마의 생식기가 들어 있었다. 모두 남성의 정력을 보하는 음식들이었다. 권승휘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잉어와 뱀장어는 수라간에 명해 오늘부터 고으라 했사옵니다.”
“잘했다. 이것들도 저하께서 탄일 저녁에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알겠사옵니다.”
“참, 종학의 수모에게선 연통이 왔더냐?”
“예. 빈궁께서 연 이틀 출타하신 외에는 계속 종학에만 머무르셨다 하옵니다.”
권승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출타해서 무얼 했는지는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였고?”
“예, 그것까진 아직……. 슬쩍슬쩍 물어봐도 그 석가이란 교전비가 말을 돌린다 하옵니다.”
“생긴 건 꼭 새망스런 초라니 같은 것이 입은 무거운 모양이구나.”
“송구하옵니다.”
단지가 고개를 한층 더 조아렸다. 아예 처음부터 사람을 붙일 걸 그랬나?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되었다. 너무 물어도 티가 날 것이니 적당히 하라 일러라.”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권승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월은 그림자처럼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은은한 묵향을 맡으니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했다. 필낭을 펼치고 낭미필을 꺼냈다. 아버지께서 특별히 이름난 필장에게 주문해 만든 것이었다. 오죽으로 만든 붓대가 월의 작은 손에 맞춤하게 들어왔다.
먹과 붓은 준비되었으니 이제 무얼 쓸지 정하기만 하면 된다. 잠시 고민하던 월은 간만에 시를 짓기로 했다.
방과후를 능가하는 시를 지어보리라. 다부지게 입술을 물고 붓을 들었다.
아버지께선 시를 지을 때 형식도, 운율도 생각지 말고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종이 위에 쏟아내라 하셨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통해 쓰여진다는 마음으로, 나는 그저 시의 붓이 되었다는 마음으로. 그것이면 충분하다 하셨다.
마침내 월의 붓이 설화지 위에 한 점을 찍었다. 붓이 완성한 글자는 너를 뜻하는 여汝 자였다. 월의 붓이 거침없이 다음 글자를 써 내렸다.
‘汝是’
점점 머릿속이 텅 비면서 세상에 오롯이 종이와 붓, 자신만 존재하는 듯했다. 시선(詩仙)이 내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월의 손이 일필휘지로 움직였다. 마침내 한 구절이 완성되었다.
‘汝是不汗黨’
여시불한당. 너는 나쁜 놈이다.
그래, 너는 참으로 나쁜 놈이다. 나쁜 놈도 그냥 나쁜 놈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아녀자를 꽃구경을 빌미로 끌어내어 희롱한, 세상에서 가장 저속하고 음흉하고 파렴치한 나쁜 놈!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어!”
월이 종이를 있는 힘껏 구겨뜨렸다.
그날 이후 월은 내내 분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 제 눈을 가리는 무례를 범하고도 사과 한 마디 없이 빙글거리던 얼굴이 눈꺼풀에 붙여놓은 듯 자꾸 어른거렸다.
생각해보면 칼자루 대신 제 팔을 잡으라고 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의 경계심을 허무는 게지. 한 번에 열을 내놓긴 어렵지만 다섯 다음에 열을 내놓기는 한결 수월하지 않던가.
칼자루를 잡게 하고, 팔을 잡게 하고, 눈을 가리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도대체 이놈은 무슨 짓을 하려 한 게야!
월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 머릿속에 스쳐간 불순한 상상을 떨쳐버리려 월이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석가이가 들어섰다. 월이 불에 덴 듯 튀어 올랐다.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느니라!”
석가이는 월을 힐끔 볼 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았다.
“뭘 아무것도 안 하고 계셔요? 글 쓰고 계셨구만.”
“하하, 그, 그래. 내가 글을 쓰던 참이었지. 글에 몰두한 나머지 헛말이 튀어나왔구나. 아버지께선 늘 시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하셨거든. 그래서 온 마음을 집중하여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석가이 네가 들어오니 이리 놀라지 않았겠느냐. 내가 딴짓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하하, 하하하.”
석가이가 관심 없다는 듯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렸다.
“헌데 표정이 왜 그러느냐? 운명의 정인을 못 만난 것이냐? 그 태래파시인지, 타래파시인지가 통하지 않은 게야?”
“…….”
“그러게, 내 뭐라 했느냐? 분명 헛걸음할 거라 하지 않았어? 죽어도 그놈의 태래파시인지 뭔지가 통했다며 나가더니. 지금껏 기다리다만 온 게냐?”
“아뇨.”
“뭐가 아니란 게야?”
“만났어요. 운명의 정인.”
“그, 그자를 만났다고?”
월이 붓을 쥐고 흔드는 바람에 검은 먹물이 사방에 튀었다.
“저, 정말이냐? 그럼 지금껏 그자와 있다 온 게야?”
석가이가 월을 흘겨보며 얼굴에 튄 먹물을 닦았다.
“혹시 그자가 어디 가자고 하지 않더냐? 일부러 사람 많은 데로 데리고 가고선 막 등에 멨던 칼을 벗어가지고, 칼자루는 네가 쥐라 하고, 나중에는 자기 팔이 칼자루고 칼자루가 자기 팔이다, 뭐 이러면서……,”
“마노라, 대체 뭔 말을 하시는 거여요? 꿈이라도 꾸셨대요?”
“어? 어어, 꿈을 꾸었다기보다도, 뭐 꿈이라면 꿈같기도 하고, 다시 생각하기 싫은 악몽이긴 하다만…….”
석가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된대요.”
“그자가 널 겁박한 게로구나! 가면 아니 된다고 붙든 것이야. 너는 필사적으로 그자로부터 도망 나온 것이고. 그렇지? 내 말이 맞지?”
“아이 참, 그런 게 아니라요. 악공이랑 저랑은 안 된다구요!”
월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그자와 네가, 뭐가 아니 된다는 게야?”
“제가 고백했단 말이에요!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밥 지을 때도 생각나고, 다림질하다가도 떠오른다고 말했단 말이에요!”
석가이가 으헝,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그랬더냐?”
“근데 악공은 자기가 누굴 좋아할 자격이 없대요. 자긴 너무 못나고 부족해서 누군갈 좋아하는 게 너무 죄스럽고 염치없는 짓이라고, 자긴 나쁜 사람이니 좋은 사람 만나라고……, 나한테 좋은 사람은 악공님인데, 내가 진짜진짜 좋아하는데, 으헝!”
“천하의 나아쁜 놈!”
월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속셈이 빤했다. 석가이가 뜯어먹을 게 없어 뵈니 잘라버린 것이 분명했다. 푸서리에는 씨 안 뿌린다 이건가?
그런 주제에 다정한 말은 잘도 늘어놓는구나. 떼어내되 미움은 사지 않는다. 그래야 뒤탈이 없을 테니까.
이건 여자를 한두 번 후려본 솜씨가 아니었다. 노리개를 돌려준다는 말도 시커먼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날 내내 노리개의 ‘노’자도 안 꺼내지 않았던가.
그럼 자신이 노리개를 잃어버린 건 어찌 안 거지? 혹시 그날 부딪히면서 슬쩍 노리개를 채간 건가? 이제 보니 여자만 후리는 게 아니라 남의 물건까지 후리는 천하의 잡놈이 틀림없는데……,
“이거요.”
이건 뭐람? 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가이가 품에서 꺼내 서안에 올려놓은 것은 월이 잃어버렸던 쌍나비 노리개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놈이 수작을 부리려고 훔쳐간 건데, 그걸 왜 석가이가 들고 있는 거지?
“가져다 드리래요. 그날 깜박하고 못 돌려드렸다고.”
쌍나비 위로 분홍색 진달래 꽃송이가 곱게 묶여 있었다. 꽃잎을 만져보니 보드라운 것이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향기도 아직 진했다. 눈을 감고 진달래 향을 맡으니 지천으로 피었던 꽃무더기가 떠올랐다.
“흐음.”
이것 또한 수작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월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림 같은 풍경 한쪽에 역시 그림처럼 서 있던 한 사람. 자신의 쓰개치마를 들고 하늘을 보듯, 꽃을 보듯 자신을 보던 사람.
꽃을 보고 있었으나 등 뒤에 와 닿는 그의 시선을 보고 있었고, 꽃향을 맡았으나 그에게서 배어나는 향을 맡고 있었음을 그는 알았을까. 자신을 향하는 그 시선이 못내 아득하여 꽃을 보라 부른 마음을 알았을까.
“그리고 그날, 죄송했대요.”
“내게 죄송하다……, 했다고?”
석가이가 코를 팽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내게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서?”
월이 노리개에 시선을 붙박은 채 물었다.
“그걸 제가 어찌 알어요. 무슨 일이냐 몇 번을 물어도 다른 말은 않고 죄송하단 말만 하시던 걸요. 꼭 전해달라고, 아주 신신당부를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