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 번째 만남이군. 우리도 가벼운 인연은 아니야.”
여전히 세스타스 국왕은 절대적인 위엄을 팍팍 내뿜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만하게 반쯤 감긴 그의 눈이 나를 주시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바론 국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했던 나머지 분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그래? 한데, 타르가는 어디 있나?”
“디트리히 백작의 안내에 따라 국경 관문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런가?”
세스타스 국왕은 디트리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디트리히 백작이 대답과 함께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데 그때…
“급보입니다, 폐하!”
뒤에서부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장이었다.
세스타스 국왕이 시종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이더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남쪽 국경 관문이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았다 하옵니다! 추운 계절로 접어들면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몬스터들이 쳐들어온 듯합니다!”
“남쪽 국경 관문의 문은 닫아놓지 않았는가?”
“이번에 클라드 왕국 측에서 가져온 타르가를 운반하느라 성문을 열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세스타스 국왕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 타르가는 어찌 되었지?”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더불어 타르가를 운송하던 클라드 왕국의 병사들도 하나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참 곤란한 상황이구나.”
나는 대번에 이게 어찌 돌아가는 판국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스타스 국왕은 완전히 우리나라를 날로 먹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다.
몬스터의 습격?
웃기고 자빠졌네! 개새끼가!
디트리히 백작은 근심 어린 척 연기를 하려 했지만, 입꼬리가 자꾸만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일단 문지기 병사를 돌려보낸 세스타스 국왕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의 거래는 완벽히 성립되지 않은 듯하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클라드 왕국에서는 분명히 보내달라던 만큼의 타르가를 운반해왔…….”
“아아,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그 타르가들은 우리에게 확실히 넘겨주기도 전에 약탈당하지 않았나? 그건 순전히 자네들의 실수이네. 노력은 가상했지만, 이제 타르가의 재배 시기도 지나버렸으니 일 년이 지나기 전에 약속했던 수량을 맞추기는 불가능하겠군. 인공적인 기후를 만들어 재배한다고 해도… 타르가가 자라는 한 달 동안 일 년은 지나가 버리지.”
나는 세스타스 국왕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클라드 왕국의 땅덩어리 반을 갖겠다.”
“싫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거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세스타스 국왕은 비릿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카펫의 양옆으로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한 번 더 거절하면 자네들의 목숨은 없네.”
과연 그럴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절합니다.”
“그렇군. 잘 가게.”
국왕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모든 기사들이 나와 호위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리는 입성하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당한 터라 도저히 공격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끝까지 저질이군.”
내가 짧게 읊조리는 사이…
푸욱!
기사의 검 하나가 복부를 뚫고 들어왔다. 세스타스 국왕과 디트리히 백작이 그 광경을 보며 웃고 있었다.
푸욱!
다시 하나의 검이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난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세스타스 국왕만을 노려봤다. 그러자 국왕이 내게 물었다.
“유언이라도 남기겠나?”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 제가 넘겨주었던 팔라칸의 유물은 잘 가지고 계십니까?”
“…….”
그 말에 세스타스 국왕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연구를 많이 해보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 마법이 꼭 사람에게만 시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뭣이라?”
나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약탈당한 타르가가… 가짜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 보군요.”
내 얘기에 세스타스 국왕은 한참 말이 없다가 섬뜩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쥐새끼가 머리를 좀 굴렸나 보군. 하지만 어찌 되었든 계약은 무너졌고,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죽어? 웃기고 있네.
“유언이 좀 길어지는군요. 근데 이걸 어쩌죠? 나도 본체가 아니라 가짜인데.”
“뭐라고!”
“말했잖습니까. 그레이트 클론의 최대 장점은 가짜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본체 역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성대한 대접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만.”
“이안! 네 이놈!”
내가 가짜의 눈으로 마지막에 본 광경은 고함을 지르는 세스타스 국왕의 얼굴이었다.
***
“정말 대단하십니다.”
글루번은 경외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물론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뒤에 쭉 늘어선 타르가의 수레와 그 수레를 지키는 병사들을 보며 물었다.
“자네들의 복제체를 공격한 것은 몬스터던가?”
“바론 왕국의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우리들은 현재 바론 왕국 국경 관문에서 5백 미터 정도 떨어진 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자, 그럼 제대로 된 거래를 하러 가볼까?”
***
국경 관문에는 이미 디트리히 백작과 세스타스 국왕이 나와 있었다.
세스타스 국왕의 얼굴은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희희낙락하며 국왕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국왕 폐하께서 나와주셨으면 했습니다. 워낙 의심이 많으신 분인지라 두 눈으로 확인시켜 드리지 않으면 안 될 듯해서 말입니다.”
말을 마치며 나는 수레를 끄는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주변을 삼엄히 경계하며 국경 안으로 수레들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수레까지 완벽하게 넘겨준 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계약은 확실히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에 날 가만히 노려보던 세스타스 국왕이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 좋아. 이번에는 내가 완벽히 당했군. 엄청난 연극이었어.”
“폐하께서 준비한 연극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재주였습니다.”
“패배를 인정하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잔머리를 굴려 살아남긴 어려울 것이야.”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요. 그럼 저희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디트리히 백작의 얼굴은 이미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나는 고소함을 느끼며 말에 올랐다.
그리고 유유히 관문에서 멀어져 갔다.
클라드 왕국으로 복귀하는 내내 기사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질러대며 키득거렸다.
우리는 바론 왕국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열리지 않는 국제 만찬회.
더불어 힘없는 작은 소국에서는 열어볼 생각도 못하는 국제 만찬회.
그것이 바로 우리 클라드 왕국에서 열리게 되었다.
최근 국제 만찬회를 연 나라는 바론 왕국이었다.
바로 세스타스 국왕의 딸인 메르나 공주의 열여덟 번째 생일 겸, 성인식을 기념해서 열렸던 만찬회가 그것이었다.
물론 내가 한 번 죽을 위기를 넘긴 만찬회이기도 하다.
국제 만찬회에는 근접한 나라의 유명 인사들이 찾아든다.
국제 만찬회를 여는 이유는 커다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국력을 자랑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반면, 국제 만찬회에 참가하는 타국 사람들의 목적은 얼마나 국력이 발전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때문에 약소국이 국제 만찬회를 열지 못하는 이유는 타국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참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라드 왕국은 이제 달라졌다.
다크니안의 영지를 정복하고, 타르가를 재배함으로써 눈에 띄게 국력이 발전했다.
타르가의 생산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당연히 타르가가 주식인 바론 왕국으로서는 부족한 양을 우리 왕국에서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내가 그 돈으로 가장 먼저 한 것은 궁전 기사단의 갑옷을 맞춰준 것이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투박한 철갑옷은 모두 벗어버리고, 은도금이 된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시켜 버렸다.
그렇게 하고 나니 빈곤해 보이던 예전과 달리 더욱 늠름하고 멋질 수가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전국에 퍼져 있는 기사들의 갑옷을 맞춰주었고, 마지막으로 병사들의 갑옷을 맞춰주었다.
더불어 항상 부족했던 무기들 역시 대량으로 보급했다.
기사와 병사들에게 있어서 이제 난 개차반 왕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늘 경외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에효! 불쌍한 녀석들.
이제 갑옷 때문에 쪽팔려서 고개 못 들고 다니진 않겠지.
이후로 내가 한 일은 정말 궁해 보였던 관문의 성벽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관한 것을 모두 프리실라에게 일임했다.
지원은 얼마든지 해줄 테니 적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기관 성벽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에 프리실라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씨익 웃더니 이렇게 말했었다.
“얼마든지 지원해준다… 그 말이죠?”
“나라가 파산할 지경까지 가서는 안 되고…….”
프리실라는 농담을 진담처럼 던져 버리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바론 왕국과의 계약을 무사히 끝마친 뒤 1년.
클라드 왕국은 빠르게 발전했다.
인구수는 점점 늘어났고, 국가 수익도 높아져 갔다.
늘 침체기에 있던 시장은 갈수록 활기를 찾았다.
프리실라의 지도하에 진행된 기관 성벽은 이제 막바지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서 클라드 왕국의 국제 만찬회가 열린 것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참 대단한 발전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아쉬움의 발원지는 다크니안의 남쪽 해안이었다.
다크니안의 남쪽 해안으로는 대륙 지도상으로 ‘그리어드’라는 이름의 섬이 표기되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나는 기사들을 이끌고 그 섬에 직접 가보기로 했지만,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도 못한 채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그 섬에는 온갖 이름 모를 정체불명의 몬스터들이 가득 머물고 있었다.
그리어드 섬에는 1백여 년 전, 미친 마법사 베르함이 터를 잡고, 몬스터들로 여러 가지 생체 실험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지금껏 그 얘기가 헛소문이겠거니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