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각!
“크윽!”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렸건만 어깨를 조금 베이고 말았다.
입고 있던 잠옷이 찢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침대의 이불은 깔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너무 쉽군.”
어쌔신은 그리 말했다.
어쩐지 이안을 쉽게 죽이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는 않았다.
처음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그의 두 번째 공격이 짓쳐 들어왔다.
이안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볼품없이 바닥을 구른 뒤 벌떡 일어서니 벽의 한구석이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어쌔신은 살기 어린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푸른 달빛을 받은 검날은 더욱 시리게만 느껴졌다.
‘뭔가 이상해.’
이안은 그 검이 너무 석연찮았다. 어쌔신들은 저토록 긴 검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암기를 날리거나 작고 휴대하기 가벼운 칼을 사용한다.
은밀히 행동해야 하고, 일격필살을 노려야 하는 어쌔신의 특성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어쌔신은 롱 소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더불어 가장 이상한 것은 어쌔신이 사용하는 검술이었다.
그것은 기사들의 검법이었다.
지금껏 기사의 검술을 익힌 어쌔신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안이었다. 이안은 어쌔신의 정체에 대해 고심했다.
그러는 사이 어쌔신은 또 검을 휘둘렀다.
역시나 기사의 검술이었다.
‘끝이군!’
방구석에 등을 기대고 선 이안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어쌔신은 충분히 이안을 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안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마법 공식을 그려 내고 시전어를 외쳤다.
“매직 미사일!”
퍼엉!
어쌔신의 검은 갑자기 생겨난 빛 에너지 덩어리와 부딪쳤다.
이안은 어쌔신이 멈칫한 그 잠깐 동안 옆으로 몸을 날려 침대 곁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챙!
맑은 소리를 내며 뽑혀진 검을 어쌔신에게 겨누는 이안.
하지만 어쌔신은 차갑게 비소를 지을 뿐이었다.
‘또 온다!’
이안은 예리한 시선으로 어쌔신을 살폈다.
팔라칸으로 살아가던 시절 체검을 익히면서 사람의 인체에 대해 익혀 온 그다.
근육의 뒤틀림만으로도 어떠한 공격이 들어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의 눈에 어쌔신의 다리와 팔 근육이 미세하게 뒤틀리는 게 보였다. 분명히 앞으로 다가오면서 찌르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안은 공격 루트를 예상해서 미리 몸을 피해버렸다.
한데…
푸욱!
“커억!”
이안이 피하려던 곳으로 작은 단검이 날아들었다.
완전히 한 방 먹어버렸다.
어쌔신은 이안이 피할 곳을 예상해 단검을 날린 것이다.
오른쪽 가슴이 정신없이 아려 왔다.
고개를 내리니 통증이 이는 곳에 단검이 박혀 있었다.
가슴에서 삐져나온 피가 단검의 날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크으윽!”
다시 한 번 고통이 말도 못하게 사무쳤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2서클의 마나는 거의 다 모아진 상황이었다.
어쌔신과의 전투에서 최대한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얼른 2서클의 마나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이럴 때 제인트라도 나타나 도와준다면 좋겠건만…….’
물론 그가 깨어 있다면 소란이 이는 것을 알고 당장에 달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트는 이미 어쌔신이 뿌려 놓은 수면향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모든 것은 어쌔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쌔신은 고통스러워하는 이안에게 검을 내리쳤다.
일말의 사정도 없는 검이었다.
그 기세가 대단히 날카로웠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간 이번 공격으로 죽음에 이를지도 모를 판이었다.
그에 이안은 혼신의 힘으로 어쌔신의 검을 막았다.
카앙!
하지만 검은 힘없이 밀려 나갈 뿐이었다.
그대로 있다간 검이 밀리는 힘에 손목이 부러질 지경이었다.
이안은 결국 검을 놓아버렸다.
무리를 해서인지 가슴의 상처에선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시야가 흐리멍덩해졌다. 그런 이안을 보며 어쌔신은 비소를 띠었다.
“잘 가라, 왕자.”
‘안 돼! 이제,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어쌔신의 날카로운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검끝은 이안의 목을 노리며 짓쳐 들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이안의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마나의 폭발!
단전에서 거대한 힘이 일며 이안의 온몸을 훑다가 다시 단전으로 돌아와 하나의 고리를 형성했다.
2서클! 드디어 2서클에 도달한 것이다. 한 단계씩 서클을 올릴 때마다 마법사들의 몸은 아주 잠깐 동안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대자연의 기운인 마나가 고리의 형태를 형성하기 위해 한 번 폭발하면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지금 이안의 상태가 그랬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주 느려 터진 어쌔신의 검이었다.
이안은 이를 악물고 오른쪽 가슴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 단검으로 어쌔신의 검날을 빗겨 흘렸다.
카아아앙!
“……!”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믿지 못할 상황에 어쌔신은 놀란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폭출되었던 대자연의 기운으로 인해 가슴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완전히 상처가 나아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지혈은 완벽했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손이 어쌔신을 향했다.
“파이어볼(Fire Ball)!”
이안의 입술이 짧은 시전어를 뱉어내자 손에서 주먹만 한 불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어쌔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런!’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낭패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미 코앞에서 날아드는 파이어볼을 피하기란 늦어 있었다.
콰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뒤로 주욱 날아간 어쌔신은 벽에 그대로 부딪쳤다.
“크윽!”
머리에 충격이 엄청났다.
어쌔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어쌔신이 잘라놓은 이불의 천을 북 찢어 던지며 시전어를 외쳤다.
“바인딩(Binding)!”
2서클의 속박 마법이었다.
기다랗게 찢긴 천은 어쌔신의 몸을 친친 감아 속박시켰다.
어쌔신은 파이어볼의 충격이 생각보다 심함을 느꼈다.
천에 감긴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인지 대단히 쓰라렸다.
또한 머리를 부딪쳐서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어서려던 어쌔신은 다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안은 반쯤 타들어간 어쌔신의 복면을 거칠게 벗겨 낸 뒤, 머리채를 쥐고 얼굴을 확인했다.
한데, 그는…
“루페이 마네비올라.”
이안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로, 마네비올라 공작가의 장남이었다.
루페이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이안을 표독스레 노려봤다.
하지만 이안은 그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루페이가 왜 직접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안이 겁탈하려 했던 공작가의 딸이 바로 루페이의 여동생인 샤를 마네비올라였다.
앞전에도 언급했지만 샤를은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한 채 자살해버렸고, 이 사건으로 한 나라의 국왕이 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대단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비올라 공작은 쉽게 마음을 풀지 못했다.
더불어 여동생을 자식처럼 아끼던 루페이의 분노는 말도 못할 정도로 컸다.
루페이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야 이안은 비로소 어쌔신이 왜 기사의 검술을 썼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루페이는 어쌔신이 아니고 기사였다.
기사가 어쌔신의 흉내를 낸 것이다.
“크크큭! 결국… 복수도 못하고 가문의 치욕만 안은 채 죽게 되는군.”
루페이는 다 포기해버린 듯 그리 말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안을 죽이고 싶었다.
살인 청부?
당치도 않은 얘기였다.
이 쓰레기 같은 왕자를 손수 죽여 버리지 않는 한은 평생토록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루페이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더니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하지만 기억해라, 이안 왕자! 비록 내 육신이 죽어 없어질지라도 영혼으로 남아 너를 저주할 것이다! 내 가문에 남긴 상처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 말하는 루페이의 얼굴에는 검댕이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앞머리는 반 정도 타서 처절해 보였다.
“어차피 죽일 목숨이라면 어서 죽여라!”
루페이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격앙된 감정을 토해내는 그와 달리 이안은 심드렁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내가 왜?”
“뭐?”
“왜 죽여야 하는가? 그다지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크하하하! 끝까지 나와 장난을 하자는 것인가, 왕자!”
“지금이 장난할 타이밍인가?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말을 하며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니, 루페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만… 치욕은 이제 그만 주란 말이다!”
“정말 꽉 막힌 놈이로군. 알아듣게 설명해주마. 내가 너희 가문에, 그리고 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준 건 인정한다. 그래, 믿어지진 않겠지만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네 행동을 문제 삼을 생각은 전혀 없다. 한 번쯤은 겪어야 했을 일일 테니까.”
“그런 헛소리를 믿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이안은 대답 대신 루페이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천을 풀어주었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왜 오늘이지? 이런 짓을 하려면 더 일찍 저지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페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다.
“억누르고 억눌렀다. 내 동생을 욕보여 저승으로 몰고 간 왕자 같지도 않은 왕자에 대한 분노를. 아버지는 참으라 했지만, 날이 갈수록 내 가슴은 더한 분노로 끓어올랐다. 그러다 왕자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통쾌해했다. 하지만… 다시 깨어났다는 얘기에 하늘마저 날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한 것은 날이 갈수록 왕자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변해간다는 점이었어.”
루페이는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들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하늘이 벌하지 않으면 내가 대신 벌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페이가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한 그런 미소였다.
“진짜 변했군요, 왕자님. 이미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직… 아직 왕자님을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제 행동 역시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요. 죽이십시오.”
이안은 결연하게 말하는 루페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루페이, 오늘 네 예행연습은 훌륭했다.”
“…무슨?”
“리허설도 완벽했으니 다음번에는 꼭 상대국으로 가서 왕의 목을 가져오도록 해라. 하지만 예행연습이 ‘연습’으로 끝나길 바란다면 아직 해야 할 게 남아 있다. 근위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이 방에서 나가야 완벽하지 않겠나?”
그것은 이안의 말이 맞았다.
루페이가 이안의 방 근처에 있는 호위 기사들을 수면향으로 처리했다 해도, 이 정도의 소란이라면 슬슬 다른 곳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들이 눈치를 채고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루페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이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도저히 이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얘기들이 진심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안이 떨어뜨린 검을 들고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에 루페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역시 날 가지고 논 것이었습니까?”
아무런 대꾸도 없이 루페이의 앞으로 다가간 이안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루페이의 시선이 검끝으로 향했다.
“죽이십시오.”
루페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털썩.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높이 치켜든 검의 손잡이가 루페이의 가슴 근처에 위치하게 되었다.
“정녕 내 진심을 믿지 못하겠다면 이 검으로 내 목을 쳐라.”
“……!”
“내 멍청한 잘못으로 인해 한 나라의 국왕인 폐하께서는 마네비올라 공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지금은 왕자인 내가 공작의 아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모자라는가?”
“…….”
“지금 당장 내 진심을 알아달라 부탁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언젠가 네가 내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걸 알지도 못한 채 이대로 네가 죽어버리는 것은 나 스스로의 자존심이 용납 못한다.”
그때 이안의 뛰어난 청력에 먼 복도에서부터 달려오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감지되었다.
“근위대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어서 나가!”
결국 망설이던 루페이는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며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이안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벌컥!
타이밍도 좋게 근위대가 도착했다.
“왕자님! 별일 없으십니까?”
“자네들이 너무 늦게 도착한 걸 빼면 별일 없네.”
원래의 이안이었으면 이미 백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이안은 씁쓸하게 웃어버렸다.
‘…하긴 그걸 바라고 늦게 왔는지도 모르겠군. 이래저래 불쌍한 위치에 있구나,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