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린 칼날이 가슴을 뚫고 들어온다.
“……!”
“위대하신 대마검사 팔라칸이시여. 감사합니다. 진정으로 절 믿어주셔서.”
위대한 대마검사.
그래. 한때는 분명히 그렇게 불렸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일각에서 대성을 이루기란 힘든 법이다.
하지만 난 역사적 유례에 없이 전무후무하게 마법과 검, 두 가지 모두를 극한의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
세상 모든 검사들과 마법사들은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마검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바꿔 말하면 검과 마법 어느 쪽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한 마검사의 고정관념을 내가 깨뜨렸다.
위대한 대마검사 팔라칸!
그 이름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저 늙고 힘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어떻게… 이런…….”
살을 뚫고 들어와 심장에 박힌 칼날이 점점 더 내 숨통을 조여온다.
“당신이 외로운 사람이라 다행이었습니다, 스승님.”
외로운 사람이라.
그랬을 지도 모른다.
지난 20여 년 간, 난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내가 끊임없이 해 온 연구는 딱 하나뿐이었다.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금단의 마법. 신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 9서클의 마법.
‘체인지 소울(Change Soul)!’
나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말인즉, 죽어가는 내 육신을 버리고 건강한 새 육신을 얻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세간은 날 위대한 대마검사라 부르지만, 스스로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새로운 몸을 얻어 다시 한 번 검과 마법을 연구하고 싶었다.
이미 새로운 몸을 얻을 타깃도 정해놓은 상태다. 보름 후에 태어나게 될 모국의 왕세자다.
하지만… 그 연구가 완성되기 전에 예상치도 못했던 사단이 일어났다.
“메… 멜피스, 네가 왜 날……!”
나와 동고동락하며 수 년을 지내온 유일한 제자 멜피스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날카로운 눈으로 검을 더욱 깊게 박아 넣으며 읊조렸다.
“세상이 칭송하는 당신의 실력만큼 인품도 좋았다면 당신께서는 절 이토록 아끼고 믿어 주시지 않았겠지요.”
“지금 무슨… 말을…….”
“그간 그 지랄 같은 성격 받아주느라 어찌나 힘들었던지.”
“뭐, 뭣이!”
멜피스는 검을 힘껏 비틀었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제멋대로 뒤엉켜 버리는 역겨움이 일었다. 고통은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컸다.
“크아아아아악!”
“크크큭! 그렇게 놀란 얼굴 하지 마. 당신은 실력에 비해 너무 야망이 없었지. 나 같으면 이미 그 힘으로 대륙을 지배했을 거야. 그리고… 당신 때문에 이런 개떡 같은 약소국이 그나마 명맥을 이어간다고 생각했어? 과연 그럴까? 당신의 시야는 너무 좁았어.”
그러면서 멜피스는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책상 위의 내 연구 자료들을 모두 집어 들었다.
“당신의 연구 자료들로 당신 못지않은 수많은 마검사들을 만들어낼 거야. 그리고 내 조국은 대륙을 지배하게 되는 거지.”
내 조국.
…그런가.
멜피스는 나와 다른 탯줄을 달고 태어난 인간이었나?
내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가… 유일하게 날 이해해준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인간이… 내 명줄을 끊기 위해 접근한 스파이였었던가?
‘우습군.’
고통와 자조가 뒤섞인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마검사 팔라칸이 모든 것을 전수해주던 제자에게 칼을 맞다니.
아무리 내가 노쇠해서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늙은이라고 하더라도… 멜피스를 의심하고 있었다면 결코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하하하하하하하하!”
멜피스의 웃음소리가 밀폐된 연구실 안을 진동시켰다.
억울하다기 보다는 허무하고 공허했다.
피잇!
멜피스는 내 가슴에서 칼을 뽑아냈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야가 흐려지며 녀석의 얼굴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럼 잘 가시오, 팔라칸.”
멜피스는 내 연구 서적을 모두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체인지 소울의 마법 공식은 거의 다 완성되었다. 아직 조금의 오차가 있었기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여태껏 연구가 계속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런 오차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필사적으로 남은 힘을 쥐어짜내 마법 공식을 외워나갔다. 그러자 복부에서부터 맹렬한 마나의 기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멜피스는 혹시라도 내가 마법을 쓸까 봐 심장을 찌른 모양이지만, 난 다른 이들과 달리 복부의 단전이라는 곳에 마나를 모아놓았다.
“쿨럭!”
입으로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의식이 계속 흐려지고, 온몸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아직 죽을 수 없다! 이제 시전어만 외치면 체인지 소울이 발동된다.
“체… 체인지… 소울…….”
생기 잃은 시전어가 입술 사이를 겨우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러자 온몸이 빛으로 둘러싸였다.
거기까지.
내 기억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1화
어둡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너무나 포근한 기분이 든다.
이대로 영원히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될 만큼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날 어딘가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귀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뭐라고 하는 건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빛. 빛이 보인다.
내 머리 위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점점 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여인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고막을 자극했다.
“아아아아아악!”
너무나 고통스러운 듯한 여인의 목소리.
“조금만… 조금만 힘을 내시오, 부인!”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
왜 힘을 내라는 거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날 밀어내는 힘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더! 더 힘을 주시는 겁니다, 마마!”
마마? 왕비를 말하는 건가?
가만.
지금 이것은 혹시… 왕비가 아이를 출산하고 있는 광경인가?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나?
설마… 설마 내 연구가 성공한 것인가?
체인지 소울이 성공한 것인가!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만약 정말 체인지 소울이 성공한 것이라면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환희에 가득 차 있는 사이, 날 자궁 밖으로 밀어내려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점점 더 벌어졌고, 빛은 더욱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꺄아아아아악!”
왕비의 힘찬 비명과 함께 내 몸이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누군가가 나를 받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겠다. 아직 눈이 떠지지 않는다.
철썩!
그때 둔탁한 손이 내 엉덩이를 때렸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입이 벌려지며 앙칼진 목소리로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응애~! 응애~!”
“됐어! 됐어요, 엘리자베스! 아들이야! 아들이라고!”
흥분한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다행히 사내자식으로 태어났나 보군.
한데… 이상했다.
왕이 날 품에 안는 느낌이며, 그의 목소리며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왜일까? 아직 갓난아기이기 때문일까?
갓난아기일 때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 지금 이게 정상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법은 분명히 성공했다.
지금 이 몸은 나의 새로운 몸이 된 것이다.
물론 왕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뒤로도 내 귀에는 한참 동안 왕과 왕비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
-생후 한 달.
“잘 잤니, 이안?”
‘이안 하르넬 지크프리트.’
그것이 왕자인 내 이름이다.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 가장 흉이 적고 길한 날, 뛰어난 작명가가 하늘의 별을 보고 지어주었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그저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한 호칭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새로운 몸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빛을 본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내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겠다.
이놈의 몸뚱이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자꾸 통제권을 벗어났다.
똥이 마려우면 울고 보채다가 싸버리고, 입에 넣어선 안 될 더러운 것들도 서슴없이 집어넣었다.
아무리 아기의 몸을 얻었다고 해도 내 정신은 성인이니 사리분별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은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엘리자베스 왕비가 날 안아들었다.
“자, 우리 이안, 맘마 먹자.”
맘마 먹자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의 고민들은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누가 뭐래도 이때만큼은 딴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왕이 아니고서야 왕비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탱탱한 가슴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엘리자베스 왕비는 절세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 왕비의 가슴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는 것이다.
왕비는 옷섶을 열어 한쪽 가슴을 꺼내놓았다.
그녀의 하얗고 탐스러운 가슴이 내 육신을 유혹했다.
그러자 젖 냄새를 맡은 육신은 본능적으로 분홍빛 유두를 입에 물고 열심히 빨아대기 시작했다.
겉만 보자면 어미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성스러운 장면이지만, 속사정은 정반대다.
아… 엄마와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데.
-생후 반년.
클라드 왕국의 왕 에르반 하르넬 지크프리트와 그의 반려자인 왕비 엘리자베스 지크프리트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그들의 아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행복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 준 당사자인 나는 시궁창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이제 내 몸은 바닥을 열심히 기어 다닐 정도로 근육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여전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듯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본 역사가 없다.
아무리 아기의 몸이라고 하지만 이건 이상했다.
왜… 왜 내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일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뭔가…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생후 1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럽게 말 안 듣는 종업원을 둔 가게 주인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걷고 있었다. 그 넓은 왕성의 여기저기를 천진난만하게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몸은 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분명히 오줌이 마렵다는 신호가 오고 있는데, 밖으로 나가 해결하기는커녕 쪽팔리기 그지없게도 붉은 고급 카펫 위에다 지려 버렸다.
한 번은 이제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는 몸뚱이가 네 발로 엉금엉금 기다가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었다.
난 필사적으로 밖으로 나가 변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이놈의 몸뚱이는 역시나 무뇌아처럼 행동하며 엎드린 자세 그대로 바닥에다 변을 뿜어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제 앞가림 못하는 동물이라도 본능적으로 제 변은 먹지 않는다.
그래,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며 순리이자 진리이다.
그러나 이 정신 나간 몸뚱이가 변을 보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후진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서서 후진했다면 변을 밟는 불상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엎드린 채로 후진을 한 것이다.
변이 있는 것을 몰랐느냐?
그것도 아니다.
내 두 눈은 점점 가까워지는 변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친 몸뚱이가 이상한 웃음까지 흘리며 계속 후진을 거듭한 결과… 변은 결국 내 얼굴 바로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고, 하필 그때 팔에 힘이 풀렸다.
철퍼덕!
이런 미친! 개 같은!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내 배에서 나온 변이라지만 냄새가 너무했다.
이 망할 몸뚱이는 동네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변에 얼굴을 처박았다.
숨이 컥컥 막혀 왔다.
그러면 얼른 있는 힘을 쥐어짜서 일어나야 하는데, 그냥 허우적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결국 온통 똥칠을 하고 나서야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발견되었다.
쪽팔려 뒈지겠네.
제발 엄마 노릇 좀 제대로 하란 말입니다! 자식새끼가 몸에다 똥을 처바를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생후 3년.
“자, 이안, 이걸 잡아보렴.”
자상하게 말하며 에르반 국왕, 그러니까 아빠는 공을 저 멀리 집어던졌다. 나는 하늘 높이 날아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떨어지는 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런? 하하하하! 너무 멀리 던졌나?”
…해보자는 거냐. 이제 겨우 10미터를 30초에 주파할까 말까 한 내게 저따위 공을 던져? 그러면서 입으로는 마치 바로 앞에다 던져 주는 양 ‘이걸 잡아 보렴.’이라고?
정말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작자가 하는 행동도 답답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건…
“공! 고옹!”
그 공을 주우러 가는 몸뚱이다.
제발 부탁인데 이런 덜떨어진 행동은 이제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하아! 이제는 이 몸뚱이에게 화낼 기운도 들지 않는다.
3년 전, 내가 연구했던 체인지 소울의 이론은 완벽했다. 다만 몇 가지의 오차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오차를 완전히 수정하지 않은 덕분에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부작용이 일어난 듯했다.
몸을 내 지배하에 두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3년이 지나는 동안 조금 익숙해진 것은 에르반 국왕과 엘리자베스 왕비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놈의 몸에 달린 입이 하도 그들을 아빠, 엄마라고 하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아빠와 엄마라는 호칭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돌보는 유모 마들렌과 이제 사십 줄을 바라보는 시종장 그렌드와도 많이 친숙해졌다.
물론 내 몸뚱이는 그들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친숙함을 표했지만, 내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어린애 취급하는 그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적응되지 않았다.
특히나 왕자님~ 왕자님~ 하며 내 얼굴에 까슬까슬한 털을 비벼 대는 그렌드는… 마법만 시전 가능하다면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들렌은 그렌드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날 빼앗아왔다.
“왕자님 피부에 병균이라도 옮으면 어떻게 해요!”
“벼, 병균이라니! 내 수염은 지상 최고로 깨끗하단 말이오!”
“닥쳐요!”
“다, 닥치라고오!”
마들렌과 그렌드는 항상 얼굴만 마주하면 그런 식으로 싸웠다.
마들렌은 나이 서른에 접어든 아줌마치곤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녀는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아, 내 머리카락은 청은발이고, 눈동자는 파란색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내 외모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어느 날 마들렌이 날 안고 거울을 보여 주며 ‘이게 왕자님 얼굴이에요~ 잘생기셨죠?’라고 하는 바람에 알 수 있었다.
뭐, 아직 아기 얼굴인지라 잘생겼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부모가 다 신수 훤한 탓에 못난 건 아니었다. 청은발은 엄마의 유전이고, 파란색 눈동자는 아빠 쪽 유전이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2가지 색은 은근히 매치가 잘되었기에 개인적으로 흡족한 마음이었다.
요새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문제점은 몸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과 매우 심심하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내 몸뚱이가 하는 짓이라곤 먹고 싸고 자고 하는 것이 전부다. 아, 가끔 이상한 것을 집어먹기도 하고, 위험한 것을 가지고 놀다가 손을 베기도 한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몸뚱이다.
나는 당장 세상 돌아가는 일이 궁금한데, 내 귀에 그런 이야기들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몸뚱이를 지배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하는 것이었다.
-생후 5년.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몸뚱이는 제멋대로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말도 어느 정도 배워서 유창하게 할 줄 안다.
그런데 이 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내 의사와 통일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더불어 몸이 잠들었지만 내 의식은 깨어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반대로 내가 잠들었을 때 몸이 깨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의식이 잠들어 있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의식 없는 몸이 자체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지금도… 지금도 그렇다.
“아빠, 배고파!”
“아빠, 똥 마려!”
“엄마, 나 아파!”
철딱서니 없는 몸뚱이는 오로지 스스로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얘기들만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와 엄마는 내 몸뚱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이건… 이건 몸이 내 의지를 벗어나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마치… 몸 안에 나 말고 또 다른 의식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단지 내 착각이었으면…
내가 예상하는 것이 빗나갔으면…….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난… 왕자의 영혼과 내 영혼을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니라, 왕자의 육신 속에 기생충처럼 숨어 사는 것일 뿐임을.
애초부터 왕자의 영혼은 계속 이 육신 안에 있었다.
그 속으로 내 영혼이 끼어든 것뿐이다.
당연히 육신은 원래의 주인인 왕자의 영혼을 택했고, 내 영혼은 마치 식물인간의 반대 경우처럼 의식만 살아버린 채 육신을 조종할 수 없는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체인지 소울의 수정하지 못한 작은 오차가 이런 불상사를 초래하고 말았다.
난…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왕자의 몸 안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건가?
체인지 소울은…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