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지강호(淸白之江湖)
이것은 당금 천하를 주름잡는 두 인물에 대한 강호인의 존경의 표시였다.
청(靑)은 소림사 출신의 청천하일불(靑天下一佛) 덕경(德勁)과 백(白)은 지금 이곳에 있는 백염주선(白鹽酒仙) 홍관주(洪寬主)를 일컫는 말이었다.
둘 다 세수가 백이십을 넘겼으며 그렇기에 배분 상으로 현 강호에서 최고 위치에 있었다.
두 사람 다 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른 초인이라 알려져 있지만 아무도 그 진실한 무공은 모른다. 이미 현실을 초월한 사람들이기에…….
혹자는 이미 죽었다고도 했는데 사실 그럴 수도 있었다.
워낙 신룡과도 같은 인물들이라 그 흔적을 찾기조차 어려웠으나 마치 헛소문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당패성과 일행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현 당가의 가주 천밀무격 당세극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그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에잉, 쯧쯧, 요즘 애들은 담이 약하단 말이야? 내가 어디 가기만 하면 다들 이래. 요기 요놈만 빼고.”
혀를 차던 홍관주는 장난기 짙은 미소로 무정을 흘겨보며 말했다.
무정은 이 노인에 대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우선은 적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노인장, 내게 무슨 볼일이 있소?”
딴에는 정중한 표현이었다. 하나 일행은 턱이 빠질 정도로 경악했다.
지나가던 촌부에게 하는 말이라면 정말 무정으로선 최대의 경어였다. 하지만 지금 무정의 앞에 서 있는 노인은 지나가는 촌부가 아니었다.
급히 명경은 손을 들며 무정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 순간 무정을 제외한 일행에게 머릿속으로부터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홋홋홋, 나서지들 말거라. 이 녀석과 할 말이 좀 있으니.-
입을 울리는 전음이 아니었다. 불문에서 말하는 혜광심어(慧光心語)와 같은 무형의 기로 공기를 울려 고막으로 전하는 초상승의 수법이었다.
명경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참견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홋홋, 고놈 말본새 하고는. 네놈이 소뢰음사의 마라불과 두 제자를 죽인 것이냐?”
“…….”
무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라불은 확실히 자신이 죽였다. 하지만 두 제자는 아니었다. 아마도 타마륵과 마가난타를 말하는 것 같은데 마가난타에게 중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무정의 입이 열렸다.
“맞는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있소.”
“음?”
이번에는 홍관주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홍관주는 무정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 말을 이으라는 것인 듯한데 무정은 그 모습에서 잠시 패도 구서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입가에 흐린 미소가 걸리며 말을 이었다.
“마라불은 확실히 내가 죽였소. 하나 두 제자는 아니오. 한 명은 마가난타라는 대제자라던데 그는 중상을 입었을 뿐 죽지 않았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타마륵이라는 라마였는데 손 하나 까딱한 적이 없소.”
“…….”
무정의 말이 끝나자 홍관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문이 그렇게 나 있었다. 하나 소문이란 것은 믿을 게 못 되는 법.
다행히 마라불을 죽인 것을 시인하는 것을 보니 뭔가 한 수 있기는 있는 놈 같았다.
그러나 그런 말이 은둔해 있는 자신에게까지 왔다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어쩐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크게 소문을 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홍관주의 생각에 관계없이 무정은 지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는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장난감, 거의 어린아이가 신기한 장난감을 보는 듯한 표정에 점차 그의 눈이 침잠해졌다. 그때였다.
“홋홋홋, 좋아. 그럼 그 말이 사실인지 한번 보도록 할까? 따라와라, 아이야.”
홍관주는 바로 신형을 돌려 객잔 뒤로 나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정황으로 볼 때 홍관주는 무정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듯했다.
연륜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또 배분으로 보나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당패성은 무정을 말리려다 흠칫했다. 무정은 이미 나가고 있었다.
“휴~”
어쩌면 저 두 사람의 성정은 비슷한 것도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일행도 뒤질세라 걸음을 빨리했다.
객잔 뒤의 공터는 생각보다 넓었다. 약 오 장의 폭에 십 장 정도의 길이였고 가운데 우물이 하나 있었다.
무정은 습관처럼 지형을 기억했다. 서서히 땅을 밟으며 생각보다 무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충격을 흡수하기는 좋지만 그만큼 운신하기에 힘이 많이 드는 지형이다.
홍관주는 무정이 하는 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기본을 충실히 이행하는 무정이 보였다. 그의 고개가 끄떡여졌다.
무턱대고 싸우는 것보다 멍청한 짓거리는 없다. 지형지물을 충분히 익히는 것이 일격필살을 주로 하는 자객의 기본이 아닌가?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청죽을 땅바닥에 깊숙이 꽂으며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홋홋, 아이야, 언제든 와라. 준비는 다 되었단다. 홋홋홋.”
아직 이도 강건한 홍관주는 이 빠진 웃음을 내며 무정을 도발했다. 청죽은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뜻인 듯했다. 하나 무정은 그런 도발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이보다 수십 배는 더 독한 소리도 들어온 그였다. 이 정도는 귀여운 정도?
그는 피풍의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사 척 이십 촌의 초우를 들었다.
쩌엉!
맑은 도명과 함께 그의 거도가 뽑혔다. 언제나 하던 대로 비스듬히 왼팔을 앞으로 내고 초우를 살짝 땅에 늘어뜨렸다.
홍관주는 그런 무정의 모습에 서서히 긴장하며 대비했다. 아무리 현격한 무공의 차이라도 저놈은 마라불을 죽인 놈이다. 무언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 척의 작은 노인의 기도는 대단했다. 무정은 저 노인이라면 언제까지 저렇게 자연스럽게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선공이다.
파팍!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무른 땅이 파이며 삼 장이 넘던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
홍관주는 이런 땅에서도 발끝을 세우며 지면을 박차오는 무정에게 감탄했다.
확실히 빠른 몸놀림이었지만 그것은 범인들의 눈에나 그런 것이고 그의 눈에는 그다지 빨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심히 무정을 살폈다. 이런 정도라면 마라불을 이기는 것은 요원했을 것이다. 실망감이라고나 할까? 일말의 기대가 사라지는 듯한 홍관주였다.
그때였다.
약 일 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무정의 신형이 우측으로 가는 듯하더니 잔상을 남기며 좌측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오는 도세(刀勢).
무정이 좌우로 한 번씩 발을 디디며 신형을 움직여 도를 휘두른 것인데 실로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이었다.
더구나 다가오는 속도와 좌우로 움직이는 속도의 차이가 거의 배 이상이 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눈은 이상한 습성이 있어 등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아무리 빨라도 잘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등속도로 움직이면 다음 방향을 예측하여 보기 때문이다. 무정은 이런 습성을 역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헛!”
홍관주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신형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정의 공격이 적절했다 해도 상대는 무림인 중에서도 무공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홍관주는 날아오는 도의 움직임에 몸을 맞추어 신형을 미끄러뜨렸다. 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무정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마치 홍관주의 몸이 초우에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건 자신의 도가 충분히 보인다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무정과 홍관주의 눈이 마주쳤다. 홍관주가 눈을 빛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이 싸움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홍관주는 무정이 미는 대로 그대로 밀리더니 급기야 초우의 사정권을 벗어났다. 순간 그는 도를 왼손으로 옮겼다. 도만 가지고는 힘들 것 같았다. 그의 왼발이 땅을 박차고 힘차게 도약했다.
홍관주는 실망감을 버렸다. 이놈은 실전의 황제였다.
작은 차이지만 속임수를 변초로 사용하는 무림인과는 달리 이놈은 몸과 상황을 이용했다. 역시 뭔가 있기는 있는 놈이었다.
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놈이 왼손으로 무기를 옮겼다. 아마도 근접전을 노리는 것 같은데 그 점이라면 그도 한 수 하기에 홍관주는 서서히 내력을 올렸다. 그리고는 저 산만한 덩치를 향해 나갔다.
파바앙! 파방! 파파바바바방!
반 각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홍관주는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무정을 상대했다. 그러나 내심은 달랐다.
그의 몸에 무정의 공격이 닿기 전에 막아내는 정도였다.
내력에서 월등한 우위를 갖고 있지 못했다면 홍관주는 지금쯤 서서히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오로지 수비만 하고 있기에. 공격이 간간히 섞이게 되면 눈앞의 무정은 충분히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파팡!
시원한 격타음과 함께 무정의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눈앞의 노인은 강했다. 그의 도와 권격이 합쳐진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의 신형은 노인보다 느렸고 내력도 그가 더 강한 것 같았다.
조막만한 노인이라고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실전이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무정은 중원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의 윗 단계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과 동시에 잠시나마 숨겨져 있던 그의 전장에서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무정의 참담함과는 별도로 지켜보는 일행도 참담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손을 섞는 모습이 간간히 보일 뿐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소림의 명각만이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너무나도 익숙한 엄청난 살기가 당패성에게 느껴졌다. 당패성은 이 살기를 잘 알고 있었다.
무정이었다. 그의 눈이 무정에게 향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묵기가 그의 몸에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홍관주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무정의 기도가 완전히 변했다. 아까는 일류 고수 급 정도였던 그의 기도는 어느새 일파의 장문인에 필적하는 수준이 되었다.
홍관주는 이제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신의 내공을 고루 퍼뜨렸다. 삼 갑자가 넘는 공력이 그의 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파팍!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전면에서 들렸다. 무정이 전력으로 달려오다 갑자기 홍관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홍관주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스름한 붉은 노을 사이로 무정의 신형이 참마도를 두 손으로 맞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홍관주도 아차 하는 순간 놓칠 만큼 아까의 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편안히 있을 수 없다는 듯 홍관주의 두 손이 하늘을 향했다. 당금 강호의 전설로 불릴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성명절기(盛名絶技) 용화번천장(龍華륙天掌)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무정은 도신에 걸린 묵기들이 공기를 밀면서 느껴지는 묵직함을 손으로 가늠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최고가 아니었다. 이윽고 그의 뽑혀진 신형이 공중의 정점에 도달하더니 바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었다. 그는 활처럼 만든 신형을 벼락같이 펼치면서 초우를 내리그었다.
엄청난 규모와 속도의 묵기가 노인에게 쏟아지자 무정의 눈에 노인의 두 손에 허연 안개가 서리는 것이 보였다.
“노룡접일(努龍接日)!”
도저히 노인의 음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노한 용이 구름을 뚫고 해를 부순다는 초식의 이름처럼 회오리치는 허연 기류가 무정의 묵기와 부딪쳤다.
꽈두두두두둥!
엄청나게 큰 가죽 풍선이 폭발하듯 연속적으로 터지는 소리에 구경하던 일행은 귀를 막고 휘청거렸다. 소리만으로도 이럴진대 당사자들은 어떻겠는가?
자욱한 흙먼지가 물기를 머금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안개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그 흙먼지 안에서 두 사람의 신형은 보이지도 않았다.
휘이이잉!
한줄기 눈치 없는 바람이 와류를 형성하며 공터를 지나쳤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신형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
미려군의 가슴은 한없이 답답했다. 무정의 신형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왼팔을 다쳤는지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두 다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며 전신은 땀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쁜 호흡으로 입조차 벌어져 있었지만 그의 눈만큼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명각은 두 눈을 치켜떴다. 홍관주의 얼굴색이 창백해진 것을 본 것이다.
그는 홍관주를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백보신권을 수련할 때 간간이 지도해 주었던 그였기에 그의 내력과 무공 수위를 잘 알고 있다. 그런 홍관주의 혈색이 창백해지다니…….
당금 소림의 장문 정천혜불 무학 방장과의 비무 때도 십일성의 백보신권을 한 손으로 웃으며 흘린 그였다.
그런 그가 저리 낭패를 당한다는 것은 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홍관주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의 묵기는 정말 기이하다 못해 가공스러웠다.
처음 장을 내질렀을 때 그의 장은 무정의 묵기에 맞아 이리저리 튕기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치 수백 개의 구슬 속에 긴 창을 찔러 넣은 느낌이랄까?
그 후 홍관주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연속적으로 십여 장 이상을 날렸다. 결국 묵기는 뚫렸고 마지막 일 장은 놈의 왼쪽 어깨에 적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무정이 스스로 어깨를 갖다 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완벽한 패배라는 생각에 무정은 착잡했다. 어쩔 수 없는 실력 차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묵기가 파훼(破毁)되었다.
게다가 마지막 장은 왼 어깨의 갑주를 통해 튕기기는 했으나 그 위력은 뼛속까지 진탕되어 그 떨림이 지금 다리까지 흔들고 있는 것이다.
단지 흘려낸 것이 이 정도라면……. 무정의 눈에 한줄기 절망감이 흘렀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이를 앙다물고 그는 전신의 기운을 가슴 쪽으로 올렸다.
그리곤 왼팔 쪽으로 집중시키는 것과 동시에 왼 무릎을 땅에 꿇고 왼손 주먹을 땅바닥에 박았다.
쿠웅!
“큭!”
한 자 이상 땅속으로 박힌 주먹은 묵직한 진동을 전해왔다. 왼팔의 근육이 비틀어지는 느낌에 무정의 잇새로 신음이 흘렀지만 저림이 서서히 가시고 새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무정은 앉은 상태로 눈을 들었다. 고통이 온다는 것은 신경이 무사하다는 뜻.
아직은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최후의 힘을 짜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뻗었던 일권이 필요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공간을… 찢는다……. 미는 것이 아니라 찢는다……. 점, 점을 향해 내 몸이 추가 되어 쏘아진다…….”
최대한 느낌을 기억해 내며 중얼거리는 그의 눈에 노인의 어깨가 얼핏 들어왔다. 그 어깨 위에 한 점이 찍혀 있었다. 드디어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파아아앗!
“허억!”
홍관주는 대경(大驚)했다.
놈은 앉아 있었다. 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삼 장이 넘는 거리였는데 한데 단 한순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이미 일 장 앞에 그가 있었다.
볼 수가 없었다. 무정의 신형은 상하좌우로 떨리며 무한한 잔상을 남기면서 다가왔다. 홍관주는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섭물진기(攝物眞氣)로 청죽을 감아 올렸지만 이미 무정의 초우는 그의 오른쪽 어깨 앞 일 촌 거리에 있었다.
홍관주는 힘껏 청죽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오십 년 전에 써보고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취팔선보(醉八仙步)를 펼쳤다.
까깡!
무정의 도와 청죽이 호쾌한 소리를 내며 비껴 나간 것을 시작으로 두 번째 접전이 시작되었다.
무정은 그의 신형을 쫓아 눈으로, 혹은 육감으로 치고, 막기 시작했고 홍관주는 반백 년 만에 자신이 아는 모든 무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다시 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개의 무정이 남긴 잔상과 홍관주의 이형환위(移形換位)에 가까운 흰 그림자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명각과 명경은 넋을 잃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 넋을 잃었다. 보이지도 않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나름대로의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나왔는지 조일 사태와 당소국의 모습도 보였다. 아니, 주위에 무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다 모여 있었다.
특히나 명경은 자신이 아는 것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것을 느꼈다. 내공의 차이, 그 내공의 차이는 아주 미세하게 나더라도 곧 패배를 의미한다.
헌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된 것인가? 말이 좋아 삼 갑자이지 삼 갑자면 이런 객잔 하나는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미증유의 거력이 지금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한데 저 무정이란 자는 모조리 받아내고 있다.
내공이라고는 저기 보이는 파악할 수 없는 묵기를 지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는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힘, 그리고 움직임. 흡사 십 년 전의 그자처럼…….
“설마… 정말 전단격류의 현신이란 말인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명경의 말에 일행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전단격류.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무공에 이해할 수 없는 내공, 그리고 움직임.
당패성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지금 진위 판단을 위해 최대한 안력을 집중했다. 하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할 것 같았다.
무정은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언젠가 오이랏트 족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체력은 진작 바닥이 났다. 더 이상은 체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이끄는 이 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 한 줌 호흡으로도 구름처럼 움직이는 느낌…….
문득 그는 뺨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바람을 느꼈다. 최단 시간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이 만들어낸 움직임.
공기를 찢고 가는 방법은 이제 마음먹은 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젠 눈으로 적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충분히 몸은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언제든 이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라면 공기를 찢을 때 그 파동으로 도 끝이 흔들리는 것이었으나 그 정도 문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문득 무정은 무언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발로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뒤로 튕기듯 물러섰다.
홍관주는 즐거웠다. 언제였던가,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맞이하여 모든 것을 내건 승부는 정말 기억 저편에 거의 잊혀 가고 있었다.
처음엔 얼마나 당황했는지…….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즐거운 긴장으로 변하며 그는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죽엽수(竹葉手), 항룡십팔장(亢龍十八掌), 타구봉법(打狗棒法) 등에 심지어 삼재검법(三才劍法)까지 그가 아는 모든 무공이 펼쳐지면서 변하고 있었다.
공수의 흐름이 물이 흐르듯 안정되어 가고 있었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백 개의 잔상 속에서도 꿋꿋이 무공을 펼칠 수 있었다.
그 역시 무아지경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초식들이 나왔다 사라지면서 그도 무정처럼 새로운 빛을 보았다.
그때였다. 무정의 신형이 뒤로 삼 장 이상을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음? 아니, 왜……?”
홍관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폭발적인 살기는 여전했지만 기세가 달랐다. 그의 모습이 눈에 보여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대단한 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그의 눈에 무정의 도가 지면과 수평이 되게 어깨 높이로 들려지는 것이 보였다.
홍관주는 긴장했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이렇게 긴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윽고 무정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긴박한 살기가 가슴을 저몄다.
홍관주는 무의식적으로 청죽을 잡아 손을 어깨 넓이로 들어 올려 손목을 뒤집어 몸 앞에 일 자로 세워놓았다.
카라락!
“……!”
내기를 채 청죽에 싣기도 전에 청죽이 잘려나갔다. 동시에 그의 옆구리에 느껴지는 이 뜨끔한 느낌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콰콰쾅!
뒤쪽의 우물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물이 완전히 박살 나고 그 앞에 무정이 도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몸에서 살기와 묵기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홍관주는 자신의 옆구리를 보았다. 옷이 삼 촌 정도 베어져 있었고 그 안의 살갗에 옅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
홍관주는 입을 벌렸다. 그냥 살짝 스친 정도여서 상처라고는 말할 수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은 적이 언제인지 기억에 없었다. 도대체 몇십 년 만인지…….
문제는 자신조차 느낄 수 없는 무정의 움직임,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무정의 움직임을. 불규칙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마치 긴 천이 나무 사이를 휘돌듯 그의 신형은 그렇게 움직였다.
너무나도 불규칙적이고 여태껏 했던 공격에 비한다면 수 배는 빠르고 현란한 공격에 그는 신형을 중간에 놓쳐 버린 것이다.
“…….”
아무 말 없이 홍관주는 무정을 보았다. 괴물이었다, 눈앞에 있는 저 무정이란 놈은.
그의 눈에 무정이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놈이 도를 등 뒤로 넣고 있었다.
사 척이 넘는 거도를 참으로 수월하게 넣으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미 살기도 묵기도 사라졌다.
홍관주도 청죽을 내렸다. 무정이 홍관주의 반 장 앞에 우뚝 서자 키 차이가 너무도 극명하게 났다. 완벽한 부조화였다.
“…졌소.”
고개를 까딱이며 무정이 말했다. 마지막 일격은 괜찮았다. 칼끝의 떨림도 없었다.
공기를 찢는 대신 그 공기의 흐름을 타는 것으로 바꾼 것이 주효하기는 했는데 조정이 되질 않았다.
그는 홍관주의 어깨를 겨냥했는데 어이없게 반대편 옆구리가 스친 것이다.
홍관주는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용호상박의 대결이었지만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무공의 고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만일 홍관주가 살기를 품고 덤볐다면 힘들기는 해도 확실히 그가 승리할 수 있었다.
한데 이건 비무였다. 그리고 자신은 한참 무엇인가 깨달을 만할 때였다.
“호홋, 이런 싹수없는 놈을 봤나? 야, 이놈아! 넌 지금 이 비무를 무슨 동네 시정잡배 쌈질로 생각하냐?”
기분이 확 내려간 홍관주는 체통도 잊고 무정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하지만 무정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아무런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홍관주는 미간을 찡그렸다.
“……?”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정의 얼굴을 살폈다.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 숨은 쉬고 있지만 그게 다였다.
무정은 이미 탈진하여 선채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한마디로 홍관주를 상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독한 놈!”
한마디 툭 뱉고서 그는 신형을 돌렸다. 대춧빛 얼굴이 번들거리는 땀에 더욱 상기되었다.
끝없이 툴툴대던 그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는데 십만 거지의 제왕답지 않게 시원한 목욕이 하고 싶어진 홍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