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은 일단 경계는 풀었다. 눈치를 보니 당패성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고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명경과 명각은 불호를 외며 일행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모두의 혈도가 풀리며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명각과 명경은 불자들답게 사람들의 혈도를 풀어준 뒤 이번에는 부상자들을 살펴보기까지 해주었다.
당패성은 굳어진 몸을 움직이며 몸을 풀었고 당혜와 미려군은 봇짐에서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들은 고개를 들어 이미 어두워진 밤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참으로 기나긴 악몽 같은 하루일 터였다.
새로이 나타난 명각이란 사람은 백보신수(百步神手)란 별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대로 백보신권(百步神拳)의 달인이었다. 일대제자 중 권격으로 최고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물론 현재의 화후는 오십 보 정도의 위력에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꾸준히 수련한다면 언젠가 진실한 백보신권을 터득할 유일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같이 온 명경(明憬)이란 승려는 부지승(不智僧)이라 불리는데 무공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며 스스로 그렇게 불리길 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그가 모르는 무공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명경도 지금 무정을 갸웃거리며 보고 있었다.
도대체가 무슨 무공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특히 묵빛 기류를 유형화(有形化)시킨다는 당패성의 말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기도 했다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분명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어쨌든 이후 잘 수습이 되어 일행은 지금 불가에 동그랗게 모여 있었고 당소국과 조일 사태도 이젠 정신을 차렸다.
조일 사태는 명각이 자신의 내공을 사용해 더 이상의 부상을 막고 상세를 겨우 호전시켰으며 당소국은 당패성이 금창약(金瘡藥)을 바르고 환단(丸丹)을 삼키게 해 겨우 급한 고비를 넘겼다.
명각과 명경은 이후 요위굉 삼 형제의 사체를 모아 구덩이를 판 후 안장했다.
불자답게 그들은 잠시나마 독경(讀經)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상황을 끝마쳤다.
시간은 이경을 지나 삼경으로 가고 있었다. 무정은 때늦은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당패성 일행은 밥 먹을 기분도 아니었고 기운도 없었다.
그냥 답답한 듯이 건포만 매만지고 있다. 착잡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었을까? 당패성이 입을 열었다.
“한데 대사님들은 이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설마 하니 저희를 돕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당패성의 말에 일행의 눈이 모였다. 명각은 삼십 대 중반의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넉넉한 몸집에 보이는 후덕한 웃음이 인자해 보이는 스님이었다.
“핫핫, 이거 소승이 부끄럽습니다. 그렇습니다, 당 소협. 실은 다른 일을 보다 마침 이곳에 요위굉이 출몰한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 근처 관도를 지나다가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들른 것뿐입니다. 아미타불…….”
껄껄거리며 웃는 명각을 보며 당패성은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그의 무공은 상당한 것 같았다.
관도에서 기척을 느끼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당패성의 말은 계속되었다.
“음, 대사님, 혹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될는지요?”
당패성의 질문에 명각은 난감한 눈치를 보였다.
장문인의 명을 받아 외부인에게 알리기가 좀 뭣했던 것이었는데 하나 대답은 명각이 아니라 명경 스님이 이미 답하고 있었다.
“사형, 어차피 비밀도 아닌데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실은 저희는 이번에 감숙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감숙으로 간다는 말에 무정의 눈이 반짝였다. 왠지 친숙한 느낌에 뭔가 짐작이 될 듯했다. 당패성은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아하, 이제 보니 소뢰음사의 마라불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당패성의 말에 명각과 명경은 미소 지었다.
그 일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들었던 것으로 근 두 달여쯤 전에 소뢰음사의 장로이자 서장 마불삼존(魔佛三尊)의 일인인 마라불이 감숙성 외곽에서 명군에게 죽은 일이 강호에 알려졌다.
아마도 명각과 명경은 소림을 대표해 이 일을 조사하러 나온 듯했다.
무정은 몰랐지만 마라불은 중원에서도 상당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약 일 년에 한 번 꼴로 중원에 나타나 이곳저곳의 무림 방파를 휘젓고 다녔는데 그의 마라혈해공과 뇌격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의 손에 죽은 무림인들도 부지기수였지만 그 누구도 소뢰음사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에 함부로 그를 건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당 소협. 한데 사실 그는 명군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더군요.”
“네에? 아니 그럼……?”
의외의 말에 당패성과 일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병사(病死)? 그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무위를 가진 자가 제 몸 하나 간수 못해 병사했다는 것은 도대체가 턱도 없는 확률이었다.
당패성뿐만이 아니라 모두 궁금한 눈치였다. 그의 무공은 여타 문파의 장문인만큼이나 강했기에 군소 방파의 장문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소림의 정천혜불(情天慧佛) 무학(懋學)장문인 정도는 돼야 확실히 승리를 장담할 정도였다. 한데 군부대의 합격술이 아니라면 어떻게 죽였겠는가?
명경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단 한 사람의 손에 죽었다고 합니다. 군문에 들리는 소문을 종합해 보니 그 사람은 용현천호소의 낭인대 대주라 합니다.”
당패성, 미려군, 당혜, 심지어 이제 몸을 추스른 당소국과 조일 사태도 침음을 흘렸다.
당금 천하에 마라불을 홀로 격퇴할 수 있는 사람이 알려지지도 않은 자였다니 가히 입신지경의 무위를 지닌 사람이리라.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는지…….”
명경의 말은 계속되었다.
“마침 이곳 사천성 성도에서 낭인대에 있었다는 상귀와 하귀, 그리고 고죽노인이라는 시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합장을 하며 명경이 말을 맺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무정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렸다.
만나면 으르렁대는 세 사람이 결국 가장 친했던 것이다.
그리움일까? 있을 때는 몰라도 없을 땐 그립다더니 그들의 행동, 말투가 유난히도 그리워지는 무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대장이란 자의 인상착의가…….”
이번에는 옆의 명각이 입을 열었다.
“길게 기른 흑발에 체구는 육 척이 넘는 장신이요, 묵빛 수투와 철각반을 끼고 있으며 왼팔 전체에 묵빛 갑주를 차고 칠 척이 넘는 참마도를 애병으로 삼는다고 하더군요.”
명각의 눈이 무정에게 향했다. 그와 함께 모든 사람의 눈이 경악의 빛을 띤 채로 무정에게 향했다.
그냥 보기에도 무정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인데 명각은 얼굴을 굳히며 정중히 물었다.
“시주가 그분이 맞는지요? 그들이 말하는 감숙성 용현천호소 소속 낭인대 대주 무정 대장이십니까?”
당패성은 입을 벌렸다. 그는 오늘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이 무정이란 자는 그저 무공만 뛰어난 천둥벌거숭이가 아니었다.
무공의 높낮이는 제쳐 두고 그 경력만 하더라도 어쩌면 현 무림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수도 있는 것이다.
무정은 조금 난처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무언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면서 무정의 앞머리를 살랑이자 무정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그들은… 잘 있더이까?”
“아!”
“허어!”
“……!”
여기저기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당패성 일행은 지금 무정의 저 말이 긍정임을 나타내는 말이기에 새삼스레 높아만 보이는 무정에게 감탄했고 명각과 명경은 그의 얼굴이 준수함과 추함을 동시에 갖춘 이십 대 중반의 젊은 나이임을 짐작했기에 놀랐다.
“허허헛, 아미타불……. 무 시주가 이리도 젊으신 분인 줄은 미처 짐작 못했소이다. 아미타불…….”
다소 의외였는지 명각은 불호만 외웠다. 명경도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확실히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반백의 머리에 은거한 노기인이라더니……. 헛헛.”
명경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간 세간의 소문은 무성했다.
어림군의 화포에 당한 것이라는 둥 노기인의 손에 당한 것이라는 둥 별의별 소문이 다 있었다.
“확실히…….”
갑자기 무정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나온 말에 모두 무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사의 말씀처럼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소.”
당패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무정은 요위굉 삼 형제가 묻힌 봉분을 가리켰다.
“저 요위굉의 무공이 마라불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믿으시겠소?”
“무슨……?”
“헛!”
또다시 분분한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무정이 말한 대로 동급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마라불과 요위굉을 동시에 상대해 본 사람은 무정 외엔 없었으니……. 당패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오늘 무정이 없었다면 그들은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상대의 간계 때문만이 아니라 애당초 실력도 안 되는 데다 요위굉이 세 명이라는 것도 몰랐기에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온몸에 이는 한기를 가슴 가득 느끼며 갑자기 당패성이 벌떡 일어섰다.
“나 사천당문의 당패성, 무 대협의 구명지은(救命之恩)에 정식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포권하며 당패성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것이 시작이었다. 동작이 불편한 당소국을 제외하고는 조일 사태까지 일어나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무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냥 강호의 소문이란 것이 정말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이 한 일을 은연중에 각인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엉뚱한 결과였다.
어쨌든 그냥 있기는 좀 미안해졌기에 자연스레 일어섰는데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일어서는 모습에 명경과 명각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초우를 들고 인사하려다 그들이 맨손을 맞잡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기억하곤 자신도 어색하게나마 따라 했다.
“우연히 이리 된 것으로 인사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소. 그냥 운이 없었다고들 생각하시오.”
별로 할 말도 없어 무정은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명경 대사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하! 선재, 선재입니다! 무 시주가 이렇듯 사심이 없으시다니… 혼탁한 강호에 신룡이 출현했군요! 선재, 선재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사제. 혹 심성이 남다른 것은 아닌가 했는데 정말 부처님의 가호일세. 핫핫! 아미타불…….”
환하게 웃는 소림의 명경, 명각 대사를 보며 당패성은 다른 생각을 했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점창의 대제자 고주석의 표독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복수할 것이다. 점창파의 이름을 걸고.
처음 당패성은 무정과 거리를 둘 심산이었다. 무정보다는 점창의 무게 추가 더 기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점창이 아니라 청성까지 합친다고 해도 이젠 무정의 편을 들어야 했다.
구명지은의 명분도 있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에서 차기 방장으로 지목되는 명각 대사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두 문파는 과거에 마라불조차 상대를 못했다.
‘이보시오, 고 형. 웬만하면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요. 건드려 봤자 그대들만 손해일 터이니…….’
은근한 생각을 뇌까리며 당패성은 하늘을 보았다.
이미 이경이 훨씬 넘은 깊은 시각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지만 오늘은 그에게 있어 한평생 잊히지 않는 하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