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이 천천히 걸어오자 세 놈이 신형을 추스르며 뒤로 물러났다. 놈들도 무정의 살기에 압도된 듯 보였다.
문득 그의 눈이 미려군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는데 재갈 물린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냈지만 무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살려달라는 것일 터이다.
그의 머릿속에 한 소녀의 영상이 떠오른다. 머리만 남겨진 소녀.
그리고 미려군의 얼굴이 겹쳐졌다. 갑자기 머리만 있는 소녀의 눈이 떠졌다. 그 눈에서는 핏빛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화아(花兒)가 울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무정은 결심했다.
“…….”
무정의 마음에서 소리 없는 외침이 들렸다. 그의 몸은 마음의 외침을 들은 듯 급작스럽게 반응했다.
무정이 거칠게 피풍의를 벗어 던지자 그의 살기가 폭발하듯 한층 더 짙어졌고 서서히 묵빛 기류가 안개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양손 가득 힘이 들어갔다.
그런 무정을 바라보던 요위굉은 이를 악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겨우 무정이 내는 살기를 떨친 그는 곧바로 바지를 추슬렀다.
시익…식…
대충 끈으로 동여매고 눈을 돌린 순간 무정의 모습이 보였다. 피풍의 아래 드러난 무정의 몸이었다.
“……!”
엄청난 근육과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굉장한 실전 경험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기에 그의 본능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웬 놈이냐! 감히 어르신의……!”
요위굉은 아직도 살기에 정신을 못 차리는 두 동생을 깨우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허나 채 자신의 말을 맺을 수도 없었다.
무정이 섬전 같은 움직임으로 둘째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벌렸던 입을 꽉 다물며 그도 둘째에게 신형을 날렸다.
달려가는 무정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죽은 동생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전장의 감각만은 여전했다.
목표는 다른 사람이지만 다가오는 요위굉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사물이 느리게 보이는 가운데 그의 신형은 마치 자신처럼 빨랐다.
요위굉의 긴 팔이 휘어져 들어왔다. 그러자 무정은 방향을 바꾸어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파파팡!
가죽 북을 격타하듯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요란했다. 무정이 차분히 맞대응을 시작하자 그의 몸에서 묵빛 기류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어우러지기 시작한 곳은 맨 처음 무정이 노리던 둘째, 요위중의 눈앞이었다. 일장도 채 안 떨어진 곳이지만 요위중은 멍한 기분이었다.
그저 어슴푸레한 그림자와 격타음 이외에는 알 수 없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둘째 요위중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형인 요위굉의 무공은 상당했다. 소림의 사대금강조차 아래로 볼 정도니 말할 것도 없었다. 강호에 널리 알려진 소림에 낭패를 봤다는 이야기는 사실 옳지 않았다.
그때는 일부러 낭패한 척한 것이다. 그래야 대수롭지 않게 보일 것이기에…….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대형은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도 동수를 이루는 상대인 것이다. 그 점이 요위중의 안색을 파랗게 질리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무정과 상대하는 요위굉은 그 나름대로 경악하는 중이었다.
속도도, 힘도, 위력도 자신보다 요위굉의 아래가 아닌 상대였고 게다가 저 묵기가 점점 짙어지면서 위력도 배가되고 있었다.
그는 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사십여 초 이상 손을 섞어도 정타(正打)를 못 날리고 있었는데 특히 저 묵빛 수갑은 재질이 무엇인지 자신의 십이성 공력에도 깨지지 않고 오히려 그는 점차 손이 저려옴을 느꼈다.
상대인 무정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치기커녕 오히려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점점 압박해오는 강도가 강해지는 것 같자 요위굉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파파파파팡!
여전히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은 계속되었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공세였던 처음과 달리 이젠 완벽하게 수세로 돌아섰다.
지켜보는 누구나 그가 밀리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요위중은 무언가를 하려 했다. 뭔가 조금이라도 그의 대형에게 도움이 되려는 일을 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벌거벗겨진 미려군을 보는 순간 들었던 것으로 놈이 오자마자 이 여인과 눈을 마주쳤던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살기를 띠며 려군의 목울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 만일을 대비해 인질로라도 잡으려는 것이다.
당연히 목숨을 위협하려는 것이 잘 보여야 했다. 요위중은 가슴을 펴며 려군의 모습이 최대한 잘 보이도록 애썼다. 최소한 무정의 정신이 사나워질 정도로 말이다.
정말 그 생각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돕자는……. 그러나 그건 무정을 너무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파아아앙……
무정이 서 있던 자리에서 황토가 튀어 오르는 순간 그의 신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앞에서 상대하고 있던 요위굉 조차도 보지 못했다.
마침 요위굉이 난감하던 차였다. 단단한 수투 이외에 무정의 묵기는 점차 요위굉의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필패였던 것이다.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 요위중이 일을 벌였고 나름 잘한 짓이라 생각했었다. 그나마 셋 중 머리가 제일 좋은 녀석이기에 가능한 짓이었다.
헌데 그러던 무정의 신형이 사라졌다. 희뿌연 잔상을 남기며 둘째 쪽으로 사라졌다. 그것도 눈으로 쫓기 힘든 빠르기였다.
콰아앙!
“크억!”
요위중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팔을 뻗어 려군의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시커먼 묵기가 가슴을 강타했던 것이다.
불로 지진 듯한 통증도 같이 느껴졌다. 그 충격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 요위중은 고개를 내렸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
거대한 도 한 자루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순간 꿈인가 싶었지만 꿈은 아니었다. 곧이어 엄청난 고통과 함께 거대한 도가 가슴에서 쑥 빠져나갔으니까.
“어헉! 컥!”
요위중은 비틀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눈앞에 한 사내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 보였다.
요위굉과 상대하고 있던 무정이었다. 오른손에 거대한 도 한 자루를 든 채 어느새 요위중의 앞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요위굉은 저 뒤에서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후두두둑……
요위중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쓰러진 미려군의 하얀 살갗위로 점점이 뿌려진다. 말 그대로 핏빛 혈화가 그려진 셈이었다.
그 혈화를 바라보는 무정의 눈이 역팔자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분노가 전신을 휘감아오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리는 요위중의 사타구니를 발로 힘껏 차올렸다.
파아앙!
“꾸억…”
요위중은 공중으로 일 장 이상 떠올랐다. 그의 낭심 부위는 이미 으깨어져 선혈이 낭자했다. 죽고 사는 것을 떠나 더 이상 남자구실을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스릉…
무정의 손에 들려졌던 거대한 도가 들려졌다. 칙칙한 묵기를 감싼 초우는 한줄기 검은 묵기를 야공에 펼쳐 냈다.
파아아아아앗!
작은 소리가 울렸지만 그 위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검은 야공 속에서 요위중은 신형이 둘로 갈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터텅!
요위중의 신형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완전하게 둘로 갈라졌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벅지까지 묵기가 관통한 것이다.
요위중의 몸에서 나온 뿌연 피 안개가 무정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무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미려군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그녀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작고 파리한 입술이 움직였다.
“고, 고마… 워요.”
무정은 작은 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단 한 번도 말이 없던 화아가 고맙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왠지 이제 화아는 더 이상 꿈속에서 자신을 찾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은 한을 풀었다는 생각에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요위굉에게는 둘도 없는 악몽일 뿐이었다.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동생이 형체도 없이 걸레쪽처럼 찢겨 나가는 광경에 흉광(兇光)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피투성이가 된 양손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두 손에서 느껴졌다. 무정과 주먹을 교환하다 입은 상처였다.
단단한 청석에 한 치 가량 홈을 낼 만큼 연공한 주먹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된 것을 본다면 상대는 자신과 내력이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귀혼수는 내공을 익혀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공류(外功類)의 무공이었다.
격공장류(隔空掌類)의 무공이 아닌 관계로 육장끼리의 부딪침은 필수인데 저자의 기이한 묵기가 육장을 타고 넘어와 오장육부를 뒤흔들어 놓아 넘어오는 핏물을 삼킨 적이 벌써 몇 번이나 있었다.
요위굉은 결정을 해야 했다. 요위중마저 죽은 이상 확실히 도망치는 것이 상수였다. 놈의 경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지만 시도는 해봐야 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질 않았다.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여자의 재갈을 풀고는 미친놈처럼 미소 짓는 순간 열이 올라왔다. 요위굉과 셋째 요위명은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그는 갈등했다. 지금이 기회였고 바로 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놈은 무기도 들지 않았다.
하나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무공을 지닌 놈이었기에 그는 갈등했다.
그러나 그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눈을 치켜뜨고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셋째 요위명이 튀어나가자 요위굉은 아차 싶었다.
요위명이 이성을 잃은 것이다. 그는 땅을 박차고 나가면서 그를 말리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미 무정의 지척에 이른 후였다.
무릎 꿇은 상태 그대로 무정은 오른발에 힘을 주었고 또 한 번 황토가 튀어 올랐다. 움직임으로 봤을 때 요위명은 세 사람 중 제일 낮은 듯 했다.
굼벵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요위명을 보며 무정은 그의 오른편 대각으로 신형을 틀면서 초우를 휘둘렀다. 망설임이란 없었다.
스팟!
요위명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몸뚱이가 머리를 잃은 것도 모르고 앞으로 달려 나가자 무정은 고개를 돌려 요위굉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느새 일 장 근처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무정은 왼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떨어지기 시작하는 요위명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높이에서 밀어내듯이 돌려 찼다.
퍼엉!
“ ! ”
달려오던 요위굉의 눈이 커졌다. 두 눈이 벌건 머리통이 자신을 향해 섬전같이 날아오고 있다. 채 반 장도 안 되는 거리라 피할 수도 없었다.
날아오는 막내의 머리가 너무 빨랐기에 그는 쌍수를 들어 얼굴 앞에서 교차시켰다.
팍!
내공이 잔뜩 실린 두 손에 있어 의식 없는 사람의 머리는 두부나 마찬가지였다.
셋째의 머리가 두부처럼 허연 뇌수를 보이며 자신의 손에 부서지자 요위굉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무정의 신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또한 셋째 요위굉처럼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순간 요위굉은 허리 부근에서 뜨끔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는 일단 무시했다.
지금은 눈앞의 적이 우선이다. 도망이고 나발이고 간에 이젠 무슨 수를 쓰든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했다. 그는 신형을 멈추었다. 아니, 멈추고 싶었다.
한데 멈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앞으로 붉은 황토의 대지가 가까워졌다. 결국 그는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뒹굴었다.
좌아아악!
자신의 몸과 황톳빛 대지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위굉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없었다.
허리 아래 있어야 할 자신의 하체 부위가 없자 당황한 그가 눈을 돌리니 저만치 널브러진 자신의 하체가 보였다.
잘려 나간 하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그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무…무형…”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당패성은 혈도를 짚인 상태에서도 몸을 떨었다. 허나 무정의 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들이 철저히 당한 상대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무공이 높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임기응변은 생각도 못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의 눈에는 요위명이 달리다 목이 솟구치고 그 목 뒤에서 무정의 왼발이 잠깐 보이더니 달려오는 요위굉의 눈앞에서 뭔가 터지면서 그의 허리가 양단되는 것만 보였지만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달려오는 요위굉의 안면에 요위명의 머리를 차 보내고 그가 막는 틈에 왼 다리를 돌린 반동을 이용해 오른손에 쥔 참마도의 위력과 속도를 배가시켜 벤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빠르기에 중병기의 묘리를 이용한 소름 끼치도록 계산된 공격이었다.
그는 눈을 돌려 무정을 바라보았다. 사 척이 넘는 참마도가 그의 등 뒤 도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 일렁이던 묵빛 투기 같은 것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정이 자신의 파풍의를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부욱!
그는 자신의 파풍의를 두 손으로 찢었다. 파풍의라고 해봐야 면으로 만든 검은색 천이었지만 그는 한쪽을 펼쳐 미려군의 알몸을 덮어주었다.
부끄러울 만도 할 텐데 그녀는 온통 눈물 자국인 얼굴로 무정을 향해 살포시 웃고 있었다. 무정은 그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그녀를 들어 조일 사태 옆으로 데려다 뉘었다. 이후 신형을 돌려 당혜에게 다가갔다.
당혜는 죽고만 싶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치부를 보았다. 완전히 몸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다를 게 뭐 있겠는가?
게다가 왠지 자신이 묘한 매력을 느낀 남자가 다가오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펄럭!
기다란 천이 활짝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맨살에 와 닿는 감촉도 느껴지며 입에 물린 재갈도 풀어졌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단단한 근육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가볍게 들려지면서 그의 체취(體臭)가 그녀의 콧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땀과 피비린내가 섞인 역겨운 내음. 하지만 그녀는 불쾌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내려졌다. 미려군의 옆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착 가라앉은 당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정은 돌리던 신형을 멈췄다.
“날… 죽여줘요!”
“당혜야!”
당혹스러운 당패성의 목소리가 흘렀다. 자존심이 센 당혜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자결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의 눈이 무정을 향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의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무정이 몸을 돌려 걸어간 것이다.
“아니면 혈도라도 풀어줘요, 자결할 테니. 부탁이에요.”
당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당패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건 투정이었다. 험한 꼴을 겪은 후 어른에게 울며불며 떼쓰는 아이의 투정.
당패성은 무정을 보았다. 당소국의 옷을 찢고 출혈을 막으며 지혈하는 것이 상당히 숙달된 솜씨였다.
“무형, 그러지 말고 혈도를 짚는 것이 나을 것이오.”
무정은 당패성의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나 곧 계속하기 시작했다.
“난… 혈도를 짚을 줄 모르오.”
“……?”
당패성의 눈이 커졌다. 무정이 하는 것을 보고 설마 했었다.
자신의 혈도를 풀어주면 같이 모든 수습을 할 텐데 그는 혼자 하고 있었다. 당패성은 알량한 자존심에 혈도를 풀어달라는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무정이 혈도를 못 짚는다니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이다.
일견(一見)하기에도 놀라운 내공을 지니고 있는데 혈을 못 짚다니……. 당패성은 난감함을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혈도가 풀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당신! 제발 죽여달라니까요!”
“…….”
“무정!”
악을 쓰는 당혜의 목소리에 당패성의 상념이 멈추었다. 아무리 투정이라지만 도가 지나치다.
그가 막 입을 열어 당혜를 진정시키려 할 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수하들 중에…….”
무정이 일어나 조일 사태 쪽으로 신형을 돌렸다.
“국일(菊壹)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조일 사태의 상세는 얕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공으로 인한 상처이기에 무정은 잠시 난감했다.
“어느 날 그 친구의 아내가 부락민들과 함께 우량하 족에게 끌려갔지.”
별수 없이 그는 사태를 편안하게 눕혔다. 그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 여인은 돌아왔다.”
무정은 주변을 살폈다.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주위의 관솔을 모았다.
“색노(色奴)가 되었었다 하더군. 게다가 말도 안 들었는지 눈도 한쪽 뽑혔고 온몸에는 가죽 채찍으로 맞아 흉측한 흉터가 남아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남편에게 말했다. 죽여 달라고…….”
무정은 품속에서 기름 주머니를 꺼내 조금 부었다.
“남편이 그러더군. 살아 돌아와 고맙다고. 그리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그가 부싯돌을 켜 불을 붙이자 작은 관솔들이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정은 고개를 들고 당혜의 눈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죽여달라고? 일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내가 말한 것은 감숙의 변방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국일이란 친구의 경우는 천우신조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
“그보다 더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그곳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산다. 그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빌어먹을 하늘을 원망하면서도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
당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한스러웠다.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하늘이 미웠다.
투정이라는 것은 그녀 자신도 잘 안다. 그래도 이유 없이 눈물을 쏟으며 투정해 보고 싶었다. 무정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 거라 생각하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무심한 사내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좀 더 두꺼운 나무들로 불을 살렸다.
“…….”
그때였다. 무정의 감각에 낯선 자의 시선이 걸리자 그는 중앙의 공터로 나가 섰다.
“…….”
저기 관도 쪽의 작은 소로 옆에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다.
어슴푸레 어두운 숲 속에서 두 명의 신형이 관도로 나오자 무정은 왼쪽 어깨를 앞으로 기울였다. 여차하면 선공이었다. 한데 그자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오는 것 같았다.
“혹… 거기 계신 소협은 일수십격 당패성 소협이 아니신지……?”
나직한 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오던 그들의 머리가 무정이 피운 불빛으로 번들거리는 것이 보이자 무정은 흠칫했다. 승려였다.
그는 습관적으로 뒤로 한 발 뺐다. 역시 선입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무정은 군에서 본 승려의 기억이 너무나 또렷했던 것이다.
누구나 공경하는 사람들임을……. 하나 진중해진 무정과는 대조적으로 당패성은 희색이 만면했다.
“아니, 소림의 명각(明覺) 대사가 아니십니까?”
당패성은 긴장이 모두 풀어진 것 같았다. 나타난 사람은 소림의 일대제자인 명각과 명경(明憬)이었다.
차기 소림의 방장 감이라는 명각 스님과 현 소림에서 가장 지혜가 출중하다고 알려진 명각 스님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