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함정 속에서
용현에서도 칠십여 리 정도 떨어진 이곳은 야트막한 언덕이 눈앞에 길게 펼쳐져 있었다.
한낮의 초원은 숨 막히게 뜨거웠다. 오월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로 흐르는 땀은 초원의 변죽스러운 날씨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땅 위의 아지랑이를 보면서 무정은 시간을 가늠했다.
대략 유시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아군이 공격하기로 한 시간은 유시 중반 이후. 자신들은 그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잠입해야 했다.
이름 모를 언덕 사이로 멀리 우량하 족 병사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면 돌격한다. 준비하도록.”
작지만 모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무정이 말했다. 일행은 잠시 대장을 바라보곤 다시 전방을 보며 경계했다 .딱 한 사람만 빼고는.
“허참, 이것 보시게, 무 대장. 저기까지 걸어간단 말인가? 그러게 우리가 탄 말은 왜 멀리 놓고 온 것인가? 정말 답답해서 원”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톤이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고 패검을 찬, 얼굴이 뽀얀 이십 대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위진천(委晋天). 위군성의 조카로서 백호장의 위치에 있는 자였다.
숙부의 후광으로 그 자리에 오른 그는 철부지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로 자랑스럽게 위민왕의 면전에 대고 무훈을 쌓겠노라면서 이번 작전에 참여, 결국 특공의 임무를 띤 무정 일행의 감시역으로 왔다. 안 된다며 방방 뛰는 위군성을 뒤로하고.
“니미! 야, 이 씁새야! 가! 가서 아예 대놓고 지껄여라, 이 씁새야! 니네 대장 목 따러 왔다고! 니미럴!”
낮고 작지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인상을 일그러뜨린 상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위진천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일개 낭인이 백호장인 자신에게 하대를 하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얼라? 성님, 이놈이 아직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은데… 대장, 공연한 일 생기기 전에 이놈 목부터 따죠?”
질세라 하귀가 눈을 좁히며 노려보자 위진천은 살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생긴 것은 둘 다 영 부랑자인데 창술만큼은 상당한 실력임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위진천이 그들을 본 것은 오늘 아침이다. 그는 출발하기 직전의 낭인대를 붙잡았다. 위진천이 볼 땐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대장 무정이야 혈귀라고 불리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치지만 거지새끼 둘에 곰방대를 문 노인, 흐리멍덩한 눈의 청년과 빙글빙글 웃고 있는 놈, 태산 같은 큰 덩치에 엄청난 도를 지닌 놈, 게다가 눈에 번쩍 띄는 외모였지만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계집도 있었다.
위진천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이런 쓰레기들이 낭인대라고? 아주 생긴 대로 노는구만?”
순식간에 주위는 얼어붙었고 무정조차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러나 옆의 마 대인이 있기에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마 대인은 굳은 안색으로 위진천을 소개했다. 자신들과 같이 갈 사람이라고. 감시자가 붙을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저 정도의 인간일 줄은 몰랐다. 마 대인은 할 말을 마치고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무정은 바로 출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위진천은 부득 할 말이 있다며 나섰다.
요는 자신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자는 출정이고 뭐고 바로 돌아가라는 것이었고 자신은 군문의 정통 창술을 익혔다며 시전하려 했다.
일행은 대장의 무공이 군문의 무공에서 나왔기에 일말의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합!”
낭랑한 소리와 함께 위진천이 시전한 것은 이화창(梨花槍)이었다. 이화창은 양가창법이라고도 불리는데 대성하면 배꽃이 수많은 변화를 내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위진천의 이화창은 좀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뻣뻣하게 선 자세에서 팔만 왔다 갔다 했다.
그나마 그것도 전방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창날도 날은 잘 섰지만 너무 얇아서 검질 한 번이면 그대로 부서져 나갈 것 같았다.
게다가 그나마 배운 것도 별로 없는지 달랑 여섯 초식만 반복하고 있자 일행의 눈썹이 곧추서기 시작했다. 특히 장창을 쓰는 상귀와 하귀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니미, 이런 씁새가 뒈질라고 환장했나? 할 짓이 없으면 저잣거리에서 노름질이나 할 것이지 감히 내 앞에서 쓰벌 같은 창질을 해!”
“성님, 이 쉐이 눈알을 확 뽑아버리죠?”
말과 함께 상귀와 하귀가 창을 꼬나 쥐고 달려 나갔다.
상귀와 하귀의 무공은 어느 이름 모를 노인에게 일 년간 사사한 것으로 타고난 운동 신경과 끈기로 상당한 성취가 있었다.
특히 이들이 펼치는 자칭 상하합격구격술(上下合擊口擊術)은 이름은 좀 그래도 강호의 일류 고수라도 어렵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딱 일 초였다. 하귀가 장창을 찌르며 놈의 창에 걸린 수실을 걸어 죄고 상귀가 창신으로 그대로 머리통을 날리는 데는.
빡!
“아악!”
위진천은 머리통이 깨지는 아픔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딱 반 각 동안 거의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위진천은 아직도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그는 황급히 두 불한당의 시선에서 몸을 빼더니 옆에 있는 비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화 소저. 그래도 내가 백부장…….”
“입 다물고 그 번들거리는 투구나 벗어! 우리 위치를 다 보여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을 자르고 들린 소리는 도저히 그 예쁜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위진천은 멍하니 눈만 끔벅거렸다.
그러다 그는 슬쩍 그녀 옆에 있는 패도를 보았다. 칠 척의 거도를 잡고 있는 패도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순간 위진천은 잽싸게 투구를 벗었다. 안 그러면 목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길 것만 같았다.
“아이, 씁새가 이제야 말 좀 듣네. 니미.”
“그라게 말입니다, 성님. 어딜 가도 꼭 쥐어 터져야 말 듣는 쉐이가 있기 마련이죠.”
상귀와 하귀가 키득거리며 위진천을 긁었다. 상귀는 좀 더 놀려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대장의 손이 들렸기 때문이다.
“시간 됐다. 각자 은밀히 이동한다.”
말과 함께 무정은 조용히 신형을 옮겼다. 그와 함께 모든 대원들도 얼굴을 굳히며 천천히 움직였다.
역시나 위진천은 맨 나중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무정 쪽으로 다가갔다.
무정은 언덕 위에 배를 땅에 대고 누워 있었다. 일행은 최소 서로 삼 장 이상의 거리를 두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바로 뒤에 위진천이 헉헉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빼고는 신속한 동작이었다. 무정은 언덕 아래에 길게 늘어선 파오들을 보았다.
중앙의 큰 막사 주위로 십여 장에 달하는 공간을 두고 작은 파오가 수십 개나 쳐져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고 생각한 무정은 공격 신호를 내리려다 멈칫했다. 왠지 너무 조용했다.
“최소한 오십 이상은 있을 줄 알았거늘…….”
눈앞에 보이는 병사 몇 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수도 없이 전투를 계속해 온 자신과 낭인대이다. 아무리 적은 수라고 해도 절대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반뇌 우세중이 조용히 다가왔다.
“대장, 틀림없는 함정입니다. 지금 몸을 빼야 합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반뇌는 재촉했다. 무정은 침음했다.
어차피 목숨을 내걸 필요는 없었다. 이미 마 대인으로부터 분명한 언질을 받은 후였다.
“닥쳐라! 무인이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이런 무도한 놈을……!”
“조용!”
위진천이 패검을 꺼내면서 소리를 지르려 하자 무정은 그를 제지했다. 소리가 너무 커 들릴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무정의 신경은 그쪽에 가 있지 않았다.
전면의 큰 막사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색의 가사를 입은 노승과 몽고인 둘. 한 명은 경장 갑주를 걸친 자였고 또 한 명은 모자를 쓴 중년인이었다.
무정은 중년인이 머리에 쓴 모자의 양 옆으로 흰 털 뭉치가 길게 내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야달목차일 것이다.
무정의 눈이 야달목차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이번엔 파오 안에서 경장갑을 걸친 병사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때야 비로소 무정은 확연히 깨달았다. 함정에 빠지기 직전이 아니고 이미 빠진 것임을……. 그는 허리를 폈다. 그리곤 경악하는 위진천을 뒤로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뭐 하는 거요? 지금 우리 위치를… 헉!”
위진천은 무정을 말리려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뇌도 벌떡 일어섰다. 그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더니 아예 사색이 되었다. 낭인대 전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위진천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미친 자들이다, 미친 자들. 위진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그의 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 그리고 몸을 울리는 땅 울림. 마상 부대였다. 사방에서 뿌연 먼지와 함께 무엇인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무정은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이미 사방 멀리서부터 포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면 약 이삼천 가량. 그렇다면 마 대인 쪽은 병력에서 별로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지만 점점 그들이 가까이 올 때 그는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중장갑이 없고 소뇌궁(小雷弓)에… 머리의 붉은 깃털! 오, 오이랏트!!”
반뇌가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과거 대원제국(大元帝國)의 후예들, 위대한 칸의 후예들로서 피의 정복을 행한 무사들 오이랏트는 그들의 직계 후손이자 대명제국 북쪽의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기마궁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소뇌궁은 그들의 무기이자 상징이었다.
활의 안쪽에 짐승의 힘줄을 몇 겹으로 덧대어 만든 것으로 육칠십 장 이상의 거리에서도 살상할 수 있었으며 화살촉엔 정련한 쇠촉을 달아 두꺼운 갑주도 한 번에 뚫는 무기였다.
전군을 기마병으로 편성해 삽시간에 치고 빠지는 몽고족 특유의 전술을 실현시킨 마상 무기였다.
무정은 눈을 치켜떴다. 거기에는 야달목차가 자신들을 비웃고 있었다.
“…….”
아무 말 없이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오이랏트의 화살이 날아오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만일 저 오이랏트의 병사들이 궁을 쏴대기 시작한다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난전(亂戰), 그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궁수들이 활을 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질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눈 속 가득 들어온다. 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무정은 지면을 박차고 달렸다.
뒤를 이어 낭인대 역시 군막을 향해 땅을 박찼다. 위진천만이 바들바들 떨며 주저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야달목차는 굳게 다문 입술로 전방을 주시했다. 설마 하니 이런 어이없는 작전이 실행될 줄은 몰랐다. 눈앞으로 예닐곱 명의 신형이 질풍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경호 병력 정도밖에는 없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뒤에는 소뢰음사에서 무공을 배운 달리한(疸狸限), 찰극나(刹克那)가 있었고 그들의 사부인 마라불(魔羅佛)이란 재수 없지만 무공이 대단한 중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오이랏트의 병력 삼천은 든든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마라불을 바라보았다.
“마라불님,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음…….”
고개만 살짝 까딱이는 마라불의 행동에 병사들은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저 중에게 놀잇감이 된 부족 여성만도 부지기수였다.
얼굴은 다 늙은 육십 대의 노인 주제에 무슨 여색을 그리도 밝히는지 당연히 병사들의 눈에 고울 리가 없었다.
마라불은 뭇 시선들을 무시하며 야달목차의 앞에 섰다.
“타마륵.”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타마륵은 마라불의 옆에 섰다.
“저놈이냐?”
마라불은 턱짓으로 눈앞으로 달려오는 사내를 가리켰다. 타마륵은 고개를 돌렸다.
“흡!”
검은 머리를 길게 날리며 오른손에 참마도를 든 자, 꿈에서도 보기 싫은 혈귀 무정이었다. 문득 그의 눈에 잔 경련이 일어나며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멍청한 놈! 물러가라!”
마라불은 타마륵의 눈 속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대소뢰음사의 제자가 두려움이라니, 게다가 저기 오는 저 긴 머리의 곰 한 마리는 경공조차도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는 듯 일행은 벌써 도착해서 손을 쓰건만 저 곰 같은 놈은 이제야 겨우 당도하였다.
마라불은 생각했다. 필경 마가난타가 당한 것은 암수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두 손을 들어 가슴까지 올리며 마라혈해공(魔羅血海功)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는 것은 오이랏트 족의 로얀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야달목차가 자신들의 부족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도와달라고 부탁할 때만 해도 약 삼천의 병력이 습격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까지 병력을 인솔해 오면서 세작을 통해 들은 내용은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일반 병사와 비교해 무공이 높은 낭인들이라지만 단 몇 명만이 쳐들어오다니, 그것도 일시와 시간까지 알려진 대로 정확히 맞추어서 말이다.
만일 이들 외에 타 병력이 없다면 야달목차는 자신들을 속인 것이다.
급하게 데려오느라 삼천의 병력밖에는 데려오지 못했지만 지금 이곳으로 후속 병력 일만 오천이 더 오고 있었다.
“로얀 장군님, 공격 명령을…….”
“기다려라, 기옌.”
“…….”
부대장 기옌은 고개를 갸웃했다.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없애면 그만인 것을 괜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우량하 족도 초원의 민족, 난전 상황에서 동족에게 활을 쏠 수는 없다.”
기옌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족 의식 따윈 없었다. 오이랏트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적일 뿐이었고 그저 대장의 명령이니 복종하는 것이었다.
비록 로얀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은 달랐다.
전쟁으로 소요되는 군비는 엄청나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함부로 군대를 일으켰다가 망한 국가의 예는 수도 없었다. 승패는 다음 문제였다. 요는 경제력이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할 장정들이 군으로 징집되어 경제 활동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오이랏트 족도 마찬가지로 이번 출정에 상당한 금액이 들어갔다. 그런 금액을 들여 왔는데 고작 몇 명이라니 용서할 수 없었다.
“야달목차… 네놈이 그 모든 것을 배상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길 바란다.”
로얀의 눈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