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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내실에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선지에 얇게 때로는 굵게 그어지는 선. 먹물이 스며들며 하나의 인물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림에 열중하던 청년이 마침내 미간에 접힌 주름을 펴며 붓을 벼루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동안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던 그는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곧 정색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군사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눈이 부실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가진 청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예를 취하는 중년의 사내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리시던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
청년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바로 얼마 전 무영에게 옷을 뺏긴 남장여인 한청연, 즉 송학이었다.
“환교의 총타가 궤멸됐습니다.”
보고하는 중년인의 얼굴에는 놀람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떠올라있었다. 하지만 송학은 말없이 등을 의자에 기댔다.
별로 놀란 것 같지 않은 송학의 반응에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환교 총타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속하는 도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보며 송학이 옅은 미소를 흘렸다.
“먼저 자세히 보고부터 해보세요.”
“예, 길 잃은 사냥꾼으로 가장한 본문의 수하 다섯이 환교 총타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저지가 없어 끝까지 갔는데…….”
“갔는데?”
송학은 다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깍지를 끼고는, 턱을 받치며 말을 받았다. 그의 눈이 마치 호기심에 빛나는 아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중년인은 대답했다.
“환교 총타가 불타고 재만 남았습니다.”
“……!”
송학은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치는 것을 느꼈다.
고무영!
그는 미친 거지가 아니라 진짜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그리고 총타 앞에는 십여 구의 시신과 혼절한 중상자들이 가득했는데, 시체 중에는 환교 부교주 구환명의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나 구환명은 심한 구타로 절명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구환명은 세상 사람들이 치를 떠는 악인이니 업보를 받은 게지요. 후후후.”
송학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은 미소를 짓는 송학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보고를 계속했다.
“게다가 한 사람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사람이 맞습니다.”
“음……. 그를 아십니까?”
중년인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섰다. 설마 송학 군사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인가?
“압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송학은 자신의 앞, 책상 위에 있는 인물화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무슨 걱정하는 지 압니다. 환교와 원수지게 되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는 것을 모를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중년인이 안도의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냥 우연히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저에게 환교 총타의 위치를 물었고, 전 알려줬을 뿐이죠. 솔직히 그가 제법 강한 것은 그때 알았습니다. 하지만 홀로 환교 총타를 박살 낼 정도의 엄청난 고수일 줄은 긴가민가했었지요. 하하하.”
송학은 무영과 만났을 때를 상기하며 미소 지었다. 그와의 만남은 이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고 인연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잠깐 무영을 만났던 당시의 황당했던 경험을 생각하며 웃던 송학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중년인의 시선을 느끼고는 헛기침을 해댔다.
“흠흠. 뭐, 또 다른 건 없습니까?”
“기절에서 깨어난 환교도 하나를 족쳐서 알아낸 건데,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가……. 놈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미쳐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년인의 말에 송학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말입니까?”
중년인은 말하기도 참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몸에서 천둥소리가 흘러나왔고 번개같이 빠른 기운을 쏘아대는 인간이 자신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조금 황당하시죠? 어쨌거나 그는 계속 벌벌 떨며 그 얘기만 해댔습니다.”
“천둥소리? 번개?”
송학은 이마에 살짝 주름살을 만들며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중년인은 그런 송학의 모습을 보고는 침묵을 지켰다. 책사인 송학이 저렇게 손깍지를 끼고 뭔가에 골몰할 때는 방해하지 말고 기다려야했다.
일다경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송학이 깍지를 풀며 입을 열었다.
“천둥과 번개라. 좋아. 이자의 별호는 벽력왕(霹靂王)으로 하지요!”
중년인은 자못 당혹스러웠다. 무엇을 고심하나 했더니 별호를 짓고 있었다니.
“벽력왕요?”
“예. 천하에 산재한 본문의 전 비밀분타와 문도들에게 이 그림과 함께 제 말을 전하십시오. 혹여 이자를 보게 된다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라고 말입니다. 또한 절대 이자와 충돌하지 말 것도.”
송학의 단호한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군사님! 설마 이자와 친분을 가지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송학이 눈을 껌뻑이며 반문하자 중년인이 한숨을 속으로 삭이며 답했다.
“그가 강한 것은 알겠지만, 환교 교주가 돌아오면…… 그는 죽은 목숨입니다. 대륙 최고의 살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환교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잘못하면 본문이 환교와 척지게 되는 아주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송학은 소리 없이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자는 강합니다. 육천의 절대 고수까지는 몰라도, 분명 삼삼인의 아홉 초인들에 뒤지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예에?”
중년인이 기함했다.
육천이 누구인가? 삼삼인이 누구인가?
현 강호엔 여섯 개의 하늘이 있었고, 아홉의 초인들이 있었다.
육천(六天)과 삼삼인(三三人).
이황(二皇), 이제(二帝), 이마(二魔)의 육천은 사실상 신이나 다름없다는 존재였다. 한 명, 한 명이 고금제일인자가 될 능력을 갖췄다고 일컬어지는 자들.
삼기(三奇), 삼왕(三王), 삼흉(三凶)의 아홉 인물인 삼삼인(三三人)도 역시 인간의 능력을 훌쩍 넘겨버린 인물들이었다. 그들 역시 하나, 하나가 다른 세대에서 태어났다면 천하제일인자가 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 시대에 태어난 것은 불행이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현 강호를 군웅할거시대(群雄割據時代)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자가 삼삼인의 아홉 초인과 동격이라니? 송학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 강호를 들끓게 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군사의 말을 속으로 부인했다.
송학의 무공 수준은 자신도 빤히 안다. 그런 송학이 높은 경지의 무위를 달성한 이들의 경지를 평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사내가 비록 알맹이가 빠졌지만 환교 총타를 쓸어버린 놀라운 고수이긴 했지만.
충격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그를 보며 송학이 결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들이 본문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감당 못한 아버지가 자살하셨고, 오라버니인 문주님도 그것에 짓눌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엄청난 이들인 지는 몰라도 본문의 수장이 말도 못하고 말라 죽어가고 있을 정도입니다.”
“……!”
“본문을 집어 삼키려는 놈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현실은…… 정보력은 대륙 최고를 다툴지 몰라도, 힘이 없습니다.”
“…….”
“우리에게 힘이 없다면, 그 힘을 밖에서 가져와야 합니다. 물론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불러오는 격이 될 수도 있기에 본문은 그런 것을 피해왔습니다. 하지만 벽력왕은 아직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고…… 제 직감이지만 믿을 만한 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앞으로 더 조사를 해야겠지만.”
송학이 말꼬리를 흐렸다가 다시 강하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본문이 특정한 개인, 특정한 세력에게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그 오욕의 역사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송학의 눈에서 무서운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중년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오욕의 역사라는 말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다.
수많은 강자들이 힘은 없고 정보력이 강한 하오문을 노렸다. 지금까지 하오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탐욕스런 늑대들끼리의 견제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은밀하게 마수를 뻗어오고 있었다.
하오문 총타의 수뇌부들은 사실 전 문주가 자살한 것과 현 문주를 보며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건 마수를 뻗어오는 자나 세력이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주가 천하에 자신들이 이런 위험에 빠져 있다고 밝혀서 늑대끼리의 견제를 만들려 했었을 테니까.
“벽력왕! 그자를 우리 손아귀에 넣어야 합니다. 본문에도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초고수가 있어야 됩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본문의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송학의 음성이 갈수록 결연해졌다.
중년인은 송학이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강호초출인 벽력왕에 대해 과대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굳이 벽력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오문은 고수가 절실했다.
천재인 송학 군사는 그것을 벽력왕으로 비유하며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력왕을 시작으로 고수들을 영입하려는 계획일 터이다. 그런 중년인의 생각은 딱히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벽력왕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무영은 포목점에서 흑의 무복을 사 입고는 곧바로 마시장으로 이동해 눈빛이 마음에 드는 말을 하나 골랐다.
환교 총타를 불태우기 전에, 그곳에서 적지 않은 황금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워낙 황금의 양이 많은지라 가지고 다닐 수 없기에, 대륙에서 가장 크다는 중원전장의 지부에 금을 맡기고는 전표(錢票)로 찾았다.
“만 년 동안 놀고먹어도 충분하겠군. 졸부가 된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무영은 소매 춤에 있던 전표 중 하나를 꺼내 말 값을 지불하고는 피식 웃었다.
오 년 전 악연으로 인해 환교를 찾았지만, 제법 충분한 노동의 가치가 있었다.
대두 녀석에게 무슨 선물을 해 주는 것이 좋을까? 빙령에겐?
생각에 빠져들다 보니 환교의 위치를 알려준 송학이란 남장여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뭐, 나중에라도 가기만 하면 되겠지. 시일을 정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랴!”
무영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금액이 큰 전표를 받고 거스름돈을 세던 말 주인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이럴 땐 침묵이 금이었다.
저런 봉 같은 손님도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