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 가능과 불가능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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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시(光陰如矢).
세월은 쏘아진 화살처럼 빨리 흘렀다.
무영이 벽력문에 입문한 것이 엊그제 같았건만, 어느새 몇 번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또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휘이이잉.
바람 소리가 매섭게 들렸다.
순순히 봄의 기운에 눌리지 않겠다는, 꽃샘추위가 절정에 달한 바람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바람은 산을 타고 흩어지다가 절벽 아래 위치한 공터로 몰려들었다.
그 곳에는 상반신을 벗고 있는 청년과 학창의의 노인이 담담한 모습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무영과 벽력군이었다.
“구혈구궁보(九穴九宮步)!”
벽력군의 외침에 무영의 몸이 기이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로 몇 번씩 땅을 툭툭 차는 것 같은데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차례로 점했다.
구혈구궁보(九穴九宮步).
벽력문의 상승 보법이다.
벽력문의 다른 상승 무공처럼, 오백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조사들이 다듬은 것으로 아홉 번의 발짓으로 오 장 이내의 거리에서 네 방위를 모두 돌 수 있는 절세의 보법.
대성하게 되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도 옷을 적시지 않는다 했다. 분명 과장이 된 것이지만 그만큼 구혈구궁보의 보법은 신묘했다.
“제왕혈권풍(帝王血拳風)! 구초식!”
우르르릉.
무영의 몸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영의 양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펑! 펑펑펑!
허공에 꽂히는 주먹.
공기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진저리를 떨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쇄애애액.
주먹의 방향은 오로지 직선이다. 변화나 곡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싶었다.
목표한 곳까지 가장 빠른 선을 타고 움직이는 무영의 주먹.
그 주먹에 붉은 기운이 맺혀 있어 마치 피로 범벅인 주먹을 보는 것 같았다.
오싹한 느낌.
일저파천(一杵破天)!
하나의 몽둥이가 하늘을 부순다는 뜻의 저법(杵法).
무영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금강저를 들어 현란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땅을 찍고, 하늘을 가른다.
둥근 원을 만드는가 싶더니, 금강저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혀들었다.
번쩍!
금강저에서 마치 번개 같은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을 에워 쌓다.
벽력장(霹靂掌)!
어느새 금강저는 무영의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대신 그의 양손이 다시 허공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무영의 눈에 황금빛이 서리기 시작했고, 손바닥에서 푸른 기운이 사방으로 몰려나왔다.
빙글빙글 도는 그의 양손.
마치 태극권을 펼치는 것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의 손의 흔들림으로 인해 파생되는 압력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우르르릉.
무영의 몸에서 울려나오는 천둥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파아아아.
무영 주변의 흙들이 허공으로 올라서서 미친 듯 춤을 추었다. 자욱한 흙먼지. 그러던 어느 순간 전면으로 빛살과 같은 기운이 뻗어 나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살 모양의 장력!
마치 부채 모양으로 펼쳐지는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벽력군의 눈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본문의 오대 상승무공 중 하나만 남았다.
“벽력천하(霹靂天下)!”
왠지 벽력군의 음성이 떨리는 듯싶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던 무영의 동작이 갑자기 멈췄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이마에서 생긴 땀방울이 턱에 대롱 매달렸다가 떨어질 때까지도 무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공기는 미친 듯 날뛰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낮지만 거대한 파공성이 허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천천히 움직이는 무영의 오른손에 의해 금강저가 다시 허리춤에서 빠져나왔다.
왼손이 주먹을 쥐고 있었고, 어깨 너비의 간격으로 벌려진 양 발이 땅을 끌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허공만 우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에 잡힌 금강저도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창!
갑자기 금강저의 양 끝이 갈라지며 뾰족하면서도 예리하기 그지없는 칼날을 드러냈다.
“하압.”
마침내 무영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졌고,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벽력군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허공에서, 땅에서, 다시 허공으로 떠오르며 춤추는 듯한 무영의 몸짓이 거대한 감동으로 벽력군의 가슴을 적셨다.
더할 나위 없이 얄미운 놈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놈이었다. 놈은 괴물이었고, 또한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마다, 무영은 되물었다.
“가능과 불가능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
“제 기준은 제가 하고 싶다,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먹으면 가능입니다.”
무영은 한 번도 자신의 지도에 의심을 품지 않고 따라왔으며, 늘 예상을 넘어서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부러움과 질투는 점차 경외심으로 변했다.
단순한 사제(師弟)사이를 떠나서 무의 궁극을 향해 모든 것을 던져 달려가는 무영의 의지에 감탄만 흘러나왔다.
“사부…….”
무영은 어느새 벽력천하의 초식을 다 마치고 벽력군 앞에 다가와서 물었다. 벽력군은 황급히 소매를 들어 눈을 훔치고는 돌아섰다.
“훌륭하다.”
“사부님 덕분입니다.”
“오대 상승무공을 모두 7성 이상 익혔구나.”
“…….”
“사실상 2단계를 끝낸 것이다. 내가 익힌 것을 모두 알았으니……,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구나.”
“…….”
“클클클…… 웃긴 말이지만 오히려 이젠 내가 널 보고 분발해야겠다. 2단계를 12성 대성하는 것은 이제 네 몫이다. 또한 3단계의 의미를 알아 도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제부터는 수련보다는 깨달음의 과정이겠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전인미답(全人未踏)의 길을 개척해 보거라.”
무영은 사부의 목소리가 평소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도망치려는 자신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
벽력군은 돌아선 채로 천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영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영아!”
“예!”
“환교와 약속한 것이 오 년이었더냐?”
“……?”
“아직 백오십 일 남았구나. 사 년 반이라…… 허허허, 넌 정말 대단했다. 정말 대단했어.”
무영의 미간에 고랑이 깊게 패여 났다. 벽력군은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클클클, 사람의 인연이란 게 그렇지. 잡으려 하면 손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지. 잡을 수 없는 것을 고집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야. 암.”
“사부님.”
무영은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찡그렸다. 불러서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을 아느냐? 옛것을 익혀 새로움을 안다는 뜻이지. 난 율법에 매여 있지만…… 넌 달라야 한다. 고지식하게 옛것에만 얽매인다면 발전이 없다.”
무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의중을 알고 있는 사부였다. 그래서 떠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3단계는 나가서 스스로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부님! 사부는 왜…….”
“나는 오늘부터 사흘간 취침에 들어가야겠다. 사 년 반이 넘는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 푹 자야겠어.”
“함께 갑시다. 사부!”
무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외쳤다. 그러자 벽력군의 신형이 부르르 떨리는 듯싶더니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제 본문은 너의 시대다.”
“함께 이곳을 나가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부님! 내 옆에서 늘 나를 보아주십시오.”
“……!”
벽력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이거 원…… 귀가 어두워졌네. 3단계를 못 마치면 이곳을 못 벗어나는 거지. 너 또한 마찬가지야!”
“사부님!”
“어쨌거나 난 사흘간 술독에 빠져 살아야겠다. 아마 동굴이 무너져도 깨지 않을 것 같아. 그동안 너무 피곤했으니까……. 앞으로의 수련은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동굴 속에 처박혀서 당분간 안 나오련다. 어쩌면 평생 안 나올 지도 모르지.”
“죽은 자의 율법보다 더 중한 것이 산 자의 삶입니다.”
“알아.”
“알면서 왜……?”
“파괴하는 자가 있으면 지키는 자가 있는 것도 세상의 이치다. 무엇보다 난 스스로 맹세했다. 3단계를 깨닫지 못하면 이곳을 나서지 않겠다고.”
“……!”
“너는 너의 의지대로 살면 된다. 그러나 나 역시 나의 의지대로 살아왔다. 단순히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이건 나의 의지란 말이다.”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금강저를 땅에 떨어트렸다. 처음이었다. 사부의 모습이 이렇게 커 보이는 것은.
“내가 속도 좁고, 잘 삐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리고 널 만나서 정말 행복했다. 좀…… 많이 얄밉긴 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게 다 고운 정, 미운 정이 드는 과정이었어. 그리고 생각해봐라. 멍청한 제자 놈을 들였다면 내가 얼마나 속이 타고 힘들었겠느냐? 아마 앞으로도 수십 년간 그 녀석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뺐겠지. 클클클, 그러고 보면 행운인 것이야. 널 만난 것이.”
벽력군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 그래도 난 아직 너무나 많이 모릅니다. 강호에 대해서도 모르고…….”
“너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모른다. 사람들은…… 모르면 돌아가거나 회피하지. 그러나 난 너를 알아. 넌 몰라도 앞으로 나갈 거야. 꺾이고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갈 거야. 그거면 족하다. 인생이란 별거 아니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 그때 왜 도전하지 못했을까 라고 후회만 하지 않으면 돼. 실수해도 괜찮은 거야. 그건 실패가 아니니까.”
무영은 고개를 떨궜다.
알 수 있었다. 사부는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그러다 무영의 고개가 다시 올라섰다.
“사부님! 내기합시다!”
“……?”
“누가 먼저 3단계를 깨닫나 말입니다.”
“……!”
벽력군의 눈에 다시 이슬이 고이고 있었다. 무영의 진심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사부님! 깨달으면 강호에 나와서 절 찾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저 역시…… 깨달으면…… 가장 먼저 이곳으로…… 달려올 테니.”
그 차갑던 무영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밑으로 떨어졌다. 벽력군은 그런 무영의 얼굴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