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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령의 입가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내가 누나군. 호호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니까.”
무영의 음성이 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기가 막혔다.
왜지? 왜 내가 이 여자에게 밀리고 있는 거지?
큰 눈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눈빛 때문에? 노파의 지팡이를 피까지 흘려가며 막아준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인정하는 모습에?
“호호호, 뭐 한 살 차이니까. 그 정도야 봐줄게. 그럼 동생! 나한테 잘 협조해 줘. 어떻게든 너희 둘을 살려보도록 노력하지.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해.”
“…….”
“신신 파파, 이 둘을 보호하면서 이곳을 돌파해보죠.”
빙령의 말에 신신 파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몸도 추스르기 어려운 판이다. 그런데 이 사내들의 목숨까지 보호하면서 돌파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가씨! 그, 그건…….”
“우리가 저지른 일, 스스로 책임져요. 그게 협객이라고 배웠어요.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죠? 죽어도 멋지게, 당당하게 죽자고요.”
그녀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딱딱하게 말하고는 무영과 대두를 보았다.
“그럼 동생들. 우리들에게 바짝 붙어야 해. 그리고…… 무공을 정식으로 익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나름대로 싸움은 많이 해 본 것 같은데. 맞지?”
빙령은 대두의 손도끼를 보면서 물었다.
빙령은 무림 십대 후기지수에 속하는 고수였다. 무영과 대두가 비록 무림인은 아닐지라도 주먹으로 먹고 사는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의 어느 평범한 사람이 두 개의 손도끼를 품속에 가지고 다니겠는가! 저런 작은 도끼로 나무를 하러 온건 아닐 테고.
무엇보다 두 사내의 손이 매우 거칠고, 눈빛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간파한 빙령이었다. 아마 이 둘이 범인이었다면 진즉 복면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살려달라고 빌기에 바빴을 것이리라.
무영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무영이다. 고무영! 네 동생이 아니야.”
“훗! 알았어, 무영 동생. 동생들도 조금은 힘을 보태주길 바래. 우리 함께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고.”
빙령은 웃으면서 갑자기 면사가 걸린 모자를 벗어젖혔다.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
무영의 눈이 흐릿해졌다.
시원한 눈 위의 반달 같은 아미와 이마를 살짝 덮고 있는 검은 머릿결. 그녀의 목뒤로 흑단 머릿결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며 출렁거렸다.
계란형의 얼굴 가운데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약간 도톰한 붉은 입술. 맑디맑은 그녀의 피부.
그러지 않아도 별처럼 빛나던 그녀의 큰 눈동자가 햇살 아래에서 더욱 밝게 초롱거렸다.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외모에 살기를 흉흉히 흘리던 복면인들조차 움찔하며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선녀님이네요.”
대두는 입을 쩌억 벌리다가 기어코 침을 흘리고 말았다. 빙령은 그 말에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 자주 듣기는 하지. 그게 귀찮아서 면사를 안 쓸 수가 없다니까. 호호호. 그럼…… 신신 파파! 간다!”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모자가 허공을 날았다.
휙휙휙휙~.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며 날아가는 모자 뒤로 신신 파파가 앞쪽으로 튀어나와 먼저 뛰었다. 그 뒤를 빙령이 따라붙자 대두가 다급하게 외쳤다.
“형님!”
무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품속을 빠져나온 비수가 들려있었다.
“계집……. 짜증 날 정도로 더럽게 예쁘군. 대두! 간다!”
“옛!”
타타타탁.
무영과 대두가 두 여인의 뒤를 향해 뛰었다. 만약 두 여인이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면 둘은 결코 그 뒤를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빙령과 신신 파파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아니 빙령은 앞으로 달리는 척 하다가 무영과 대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
무영이 차갑게 말하며 그녀를 지나쳤다. 빙령은 그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짱이 마음에 들어. 사내다운 녀석이네.”
어느새 넷은 자연스럽게 사각행진(四角行陣)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각행진은 네 명이 조가 되어 이동하면서 공수를 하는 방진(方陣)의 한 종류로, 선두와 후위에 고수가 위치하고, 중간의 양 옆에 실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가 자리를 잡는 진(陳)이었다.
빙령은 무영과 대두를 위해 사각행진을 즉석에서 만들었고, 그 의도를 간파한 신신 파파가 곧바로 받아들인 것이다.
둘이서 이 포위망을 뚫는 건 무척 힘들다.
그러나 사각행진을 이용하고 운만 좀 따라준다면 탈출의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쨌거나 약간의 방위를 이 두 사내가 잠시라도 막아준다면 그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무영과 대두였다.
방금 보여준 배짱처럼 실력도 어느 정도만 뒷받침해준다면, 그 모자라는 간극은 신신 파파와 빙령이 메울 수 있었다.
“마, 막아라!”
복면인 중 하나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비록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들이었으나 속으로는 오후 내내 당혹해하고 있었다.
복면인들의 목적은 소검후 빙령의 생포였다. 그것도 몸에 하나의 상처도 내지 말아야 했다.
소검후 빙령 같은 신진고수를, 그것도 신신 파파와 함께 있는 그녀를 털끝만큼의 부상도 입히지 않고 인질로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닷새 동안이나 포위망을 좁히며 그녀들이 지치길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지연작전을 눈치 챈 빙령의 정면 돌파 때문에 모두가 곤혹해 하는 중이었다.
사실 방금 전의, 틈이 많았던 무영과 빙령의 대치에도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한 것엔 그런 고충이 숨겨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소검후 빙령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할 일은 철저하게 그녀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제 곧 본교에서 혈사자(血使者)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막으면 나머진 그분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조금만 이 지겨운 상황을 참으면 되었다.
* * *
“흐흐흐. 으하하하.”
격전이 막 시작되려는 곳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한 나무의 가지 위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성에는 터질 것 같은 기쁨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풍겼다.
웃음의 주인공.
그는 바로 악양루의 지붕 꼭대기에서 묵빛 몽둥이를 가지고 놀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심호흡을 연신 해대다가 손을 뗐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입은 귀까지 걸려있었다.
“흐흐흐, 계승자를 찾아 천하를 헤맨 지 무려 십오 년. 놈을 발견한 지, 이 년 하고도 칠십 일.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으흐흐흐.”
감개무량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고무영!
저 녀석은 이제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은 산 전체에 깔려있던 흑의인들이 무영 일행을 향해 계속 몰려드는 것을 보며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그 숫자를 다 합치면 족히 삼백은 될 듯싶었다.
빙령과 신신 파파가 아무리 절륜한 실력을 갖췄다 해도 이들에게는 역부족이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무영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 하늘이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굳이 한 가지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면……, 복면인들이 생각보다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녀석들이 말이야. 어느 소속인지는 몰라도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 눈치만 보고 제대로 싸우지 않는 모습이라니. 쯧쯧.”
노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던 노인의 미간에 갑자기 깊은 두 개의 고랑이 패여 들어갔다.
“응?”
노인의 시선은 자신이 있는 월화산의 옆쪽에 위치한 화령산에 머물렀다.
“제법 강한 놈들이군. 아주 굵직한 날파리들이야. 클클클.”
노인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미간에 패인 고랑은 여전했고 눈동자는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휘이이잉. 채애애앵, 챙챙.
선두의 신신 파파는 용두신장을 가급적 크게 휘두르며 전방의 거리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복면인들도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았다.
개개인의 실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나란히 있는 동료들과 번갈아 진퇴를 반복하며 신신 파파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쨍쨍쨍.
용두신장과 부딪치는 도검에서 연신 불꽃이 피어올랐다.
신신 파파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까지 내려오면서 이미 다섯 번의 충돌이 있었다. 다행히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몸을 빼낼 수 있었지만, 그간의 충돌로 인해 적지 않은 내력과 체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자신의 용두신장이 보여주는 속도가 줄어들고 있음을 신신 파파도 확연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야 어찌 되어도 좋았다. 소궁주 빙령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의무이고 책무였다.
그러나 자꾸만 늘어가는 복면인들의 숫자에 그나마 남아 있던 희망마저 조금씩 재가 되어 흩어져갔다.
도대체 이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 것인가?
그리고 정체는?
후위를 막고 있는 빙령 역시 초조해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도 시간이 지날수록 빠른 속도로 무뎌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검후란 별호를 얻을 정도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신신 파파에 비하면 내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게다가 이렇게 대규모의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본 경험은 전무(全無)했다.
쇄애애액.
빙령의 표정에 그늘이 내려서고 있을 때, 그녀의 오른쪽으로 장검 하나가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무려 다섯 개의 검이 연달아 빙령의 왼쪽 앞으로 들어오던 것을 물리치고 있던 그녀의 입이 안타까움에 절로 벌어졌다.
실로 절묘한 상황을 파고드는 기가 막힌 합격술이었다. 마치 회심의 한 수를 노리고 실력을 숨겨온 것처럼.
휘이익.
빙령은 가능한 옆구리를 틀며 오른발을 들려했다.
하지만 이미 상대의 검은 옆구리의 지척까지 들어와 있었다.
쩡!
“……!”
하지만, 빙령의 옆구리가 갈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영이었다.
무영의 비수가 쏘아져 들어오던 검을 튕겨낸 것이다.
파라라락.
빙령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들던 발을 옆으로 힘차게 밀어 상대의 배에 찔러 넣었다.
“커흑!”
고통의 단말마를 터트리며 주르륵 밀려나는 흑의인.
빙령은 다시 전면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힘차게 놀렸다.
그녀의 입가에 슬며시 떠오르는 엷은 미소.
“고마워.”
“천만에. 네가 죽으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훗!”
빙령은 바쁘게 검을 놀리면서도 미소가 피어났다. 무영이 조금은 듬직하게 느껴졌다.
비록 전면과 후면을 신신 파파와 자신이 대부분 막고 있기에 두 사내가 실제로 싸우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각행진은 형식이었고, 실제의 모양은 일자진(一字陳)과 다름없었다. 360도의 방위 중, 신신 파파와 빙령이 각각 180도씩 전후방을 도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두 사내가 전혀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말만 앞서는 사내인 줄 알았는데, 타고난 건지 아니면 단련된 건지 복면인들이 파고들어 오는 허점을 정확히 파악하고서 그때그때 도움을 주고 있었다.
특히 무영이란 이는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이류급의 무사보다 더 나은, 아니 아주 효율적인 방어를 하고 있었다.
신신 파파와 빙령의 공격 틈을 메우는 그의 능력은 자신들로 하여금 많은 수고를 덜어주고 있었다.
‘무영이라……. 정말 재미있는 자야. 무공을 익혔다면 나 못지않은 고수가 되어있었을 지도.’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얼마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 이곳에서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