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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대두는 초조한 얼굴로 다시 무영을 불렀다.
어느새 앞에서 달려오는 두 여인은 지척까지 달해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과 노파는 지친 기색으로 뛰어오며 외쳤다.
“비켜라!”
“비켜!”
무영은 크게 한차례 숨을 들이키며 대두를 향해 말했다.
“대두!”
“옛, 형님!”
대두가 결사항전의 태도로 힘차게 답했다.
“튄다!”
“예?”
“도망가자고!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무조건 피해!”
무영이 몸을 뒤로 돌리며 낮게 말했다. 그러나 몸을 돌리는 그의 얼굴에 참담함이 생겨났다.
휙휙휙휙~. 차차차아악.
검은 그림자 수십여 개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후위를 차단하고 있었다. 똑같은 복면을 쓴 흑의인들.
“빌어먹을. 제길.”
무영은 이로 입술을 짓이기며 욕설을 뱉어냈다. 그런 무영의 욕을 뒤따라 나오는 젊은 여인의 음성. 그녀는 어느새 무영의 바로 뒤까지 와서 멈춰서 있었다.
“휴우, 도대체 몇 놈이나 되는 거야? 계속 꾸역꾸역 잘도 기어 나오는 군. 바퀴벌레 같은 자식들!”
무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필 이쪽으로 도망을 치다니!
휙휙휙휘익~. 차차차아악.
계속해서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그다지 넓지 않은 산길의 주변으로는 족히 일백은 넘어 보이는 복면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신신 파파! 후위를 맡아. 내가 전면을 맞지.”
“예!”
신신 파파는 거친 숨을 갈무리하며 용두선장을 양손으로 움켜잡고는 뒤따라오던 이들을 향해 돌아섰다.
빙령은 완전히 포위된 것을 확인하고는 혀를 차다가 바로 옆에 있는 무영과 대두를 얼핏 보았다.
“너희는 뭐냐?”
“…….”
“무공 할 줄 알아?”
빙령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차서 물었다. 그건 대두가 양손에 들고 있는 손도끼를 보고 한 말이었다.
산적이라도 좋았다. 지금은 어린아이의 조막손이라도 도움이 절실했다.
무영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계집!”
“뭐?”
빙령은 대두의 도끼를 보다가 무영의 말에 기겁하며 입을 쩍 벌렸다. 기가 차서 말을 잊은 그녀에게 무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누가 이리로 도망오라고 했어?”
“뭐? 무슨 이런 미친 자식이 다 있어. 인마. 탁 보니까 너 힘 좀 쓰는 것 같은데 살고 싶으면 거들어. 저들은 너희들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척 보면 모르겠냐? 어차피 벌어진 일 가지고 말다툼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
빙령은 무영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 째려보았다. 그러나 결국 질려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태어나 저렇게 차가운 눈빛은 처음이었다.
‘무슨 눈이……, 마치 얼음장 같아.’
그녀는 인상을 잔뜩 쓰며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복면인들도 빙령과 신신 파파의 실력을 아는 지라 서서히 포위망을 좁힐 뿐 함부로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짝!
“……!”
터질 것 같이 살기가 흐르던 산길에서 따귀소리가 일었다. 그 난데없는 소리로 인해 두 여인과 복면인들의 살기가 흐트러질 정도였다.
“너……, 너!”
빙령은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불의의 기습에 고스란히 뺨을 내 준 것이다. 복면인들에게만 집중한 것이 그녀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복면인들조차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무영과 빙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계집, 넌 우리를 꽤 먼 거리에서부터 봤다.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이런…….”
빙령은 생전 처음 당하는 수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끼어든 건 신신 파파였다. 비록 적들을 경계하느라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진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네, 이놈. 이분이 누구이신지 알고 감히…….”
퍽!
“컥!”
무영의 발이 번개처럼 신신 파파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 역시 모든 신경이 복면인에게 쏠려있었고, 바로 뒤에서 가한 공격인지라 땅에 비참한 모습으로 고꾸라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신신 파파로서도 설마 풋내기 청년이 자신한테 이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기에 어이없이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지척의 인물이 빠르게 공격하는 것을 막는 건 어려웠다.
또한 무공을 익히지 않은 무영이었기에, 그에게선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막기 힘들었던 것이다.
빙령과 신신 파파의 입에서 동시에 분노의 일성이 터졌다.
“이, 이런 개자식!”
상황은 무영으로 인해 아무도 예상치 못한, 황당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천천히 조여들어 오던 복면인들조차 걸음을 멈추고 이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빙령과 신신 파파는 머리끝까지 치솟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눈앞의 사내를 향해 복수의 한 수를 뿜어내려고 했다.
적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기막힌 치욕을 안겨준 이 사내를 향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그 전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직전에 무영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왜 부끄럽나? 너희가 어떤 고귀한 인간들인지는 관심이 없어. 하지만 너희들 체면 때문에 우리는 죽게 생겼다. 우리 목숨을 너희 멋대로 끌어들인 대가치고는 싼 줄 알아라.”
“……!”
빙령과 신신 파파의 몸이 약간 움직이다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함부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마라. 나와 대두는…… 너희들의 수하가 아니다. 너희들이 보기엔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보일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는 너희들처럼 무례하며, 애꿎은 사람을 죽음의 위기 속에 몰아넣진 않아. 이기적인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무영은 빙령의 얼굴 중 유일하게 드러난 눈을 주시하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빙령은 무영의 말과 차가운 안광에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멍해졌다. 이 남자의 눈빛과 말은…… 자신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어 버렸다.
그러나 신신 파파는 달랐다.
“이런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구나. 그러나 넌, 나와 아가씨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무인에게 있어 자존심이란…….”
“어떤 자존심이라도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아! 자신의 명예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할망구! 당신은 스스로에게 떳떳한가? 길을 가던 애꿎은 사람을 같이 죽게 만든 당신이? 그런 자존심이라면 개한테나 줘버리라지.”
무영은 가슴속에 있는 말을 마구 쏟아냈다.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고 이제야말로 자신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끼어든 두 여자 때문에…….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복면인들에게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을 내비쳐 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가능성이 거의 없더라도 해 봐야 했다.
그러나 무영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복면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건 간에 결코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영의 가슴을 더욱 짓누르며 화가 나게 만들었다.
신신 파파가 살기를 드러내며 무영을 향해 소리쳤다.
“이, 이놈이……!”
“이렇게 많은 자들이 겨우 두 명인 당신들을 해치려 모였다면……, 분명 당신들은 강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자신들의 안위 외에는 관심도 없는 당신들도 결국 쓰레기일 뿐이야.”
신신 파파의 이마에 푸른 혈관이 툭툭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녀의 용두신장이 벼락처럼 무영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홰애액.
“어!”
멍하니 있던 대두가 화들짝 놀라며 헛바람을 토했다.
그러나 신신 파파의 용두신장은 무영의 머리 바로 위에서 멈춰 섰다.
“그만둬요. 신신 파파.”
빙령이 신신 파파의 용두신장을 왼손으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핏줄기.
“아, 아가씨!”
신신 파파가 대경하며 신음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빙령은 어깨를 들썩이며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자의 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요.”
그녀의 자조 어린 말에 신신 파파뿐 아니라 무영과 대두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빙령은 자신들을 주시하는 복면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신신 파파. 궁주님은 늘 저에게 협객(俠客)이 되라 하셨어요. 그렇지 않을 바에는 절대 검을 배우지 말라고도 하셨죠.”
“아가씨…….”
“비록 제가 덜렁대기는 하나, 나름대로 협의지도(俠義之道)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해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사려 깊지 못했어요.”
신신 파파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뭐랄까? 그건 자신이 모시는 분에 대한 자부심? 뿌듯함?
딱히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짧은 빙령의 말이었지만, 신신 파파는 방금 당한 치욕을 잊고도 남을 만큼 기쁜 마음이 들었다.
만약 흑의인들만 없다면 빙령에게 마구 격려와 감탄의 말을 쏟아낼 만큼.
빙령은 복면인들을 계속 훑어보며 무영에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대신 당신이 방금 한 행동…… 잊겠어요.”
“훗, 감동해야 하나? 어처구니없군. 조금 철 든 소리를 하나 했더니 겨우 그거였군. 크크큭.”
무영은 비꼬듯 중얼거리며 웃었다.
빙령은 그런 무영의 말에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복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복면인 아저씨들! 여기 두 사내는 우리와 상관없으니 이곳에서 내보내자.”
“…….”
“그렇게 해주면 안 되려나?”
빙령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아니 그들은 포위망을 더욱 좁히며 흉흉한 기운을 짙게 흘렸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무영이었지만 역시란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그런 무영에게 빙령이 말을 이었다.
“어쩌죠? 저들은 당신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제길……. 알고 있다. 너희들이 우리 쪽으로 도망 오는 순간, 그때부터 이미 틀린 일이었지.”
빙령이 미안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지사 이미 일은 벌어졌어요. 계속 푸념만 할 건가요? 상황이 암울하다고 해서 화만 내는 것 역시 좋은 방법은 아니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예요. 나 역시 영문도 모르고 쫓기고 있는 중이었어요.”
“…….”
“최악의 상황이라도 일단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나요? 당신의 말처럼…… 쓰레기가 아니라면.”
신신 파파가 미소를 머금었다. 속 시원한 보복이었다.
그녀는 무영의 턱에 균열이 생겨나 뺨까지 번져가는 것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계집…….”
“내 이름은 계집이 아니라 빙령이예요.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하죠?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 보이는데.”
무영은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태어나 이렇게 당돌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무림의 여인들은 모두가 이런가?
“나는 스물셋이죠. 당신은?”
빙령의 질문에 무영이 잠시 멈칫하다가 대꾸했다.
“나는…… 스물넷이다.”
그 말에 빙령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
“형님! 형님은 스물둘이잖아요.”
대두가 끼어들었다.
“음…….”
무영의 입가에서 신음성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