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케이브 (4)
처벅, 처벅!
그린골은 하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송 원장이 하라를 뒤로 세워 막아섰다. 그녀도 두려움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선생님, 저 괜찮아요.”
“아……서라.”
하라는 마물이 나타날 때를 대비한 수련을 했다. 그러나 훈련과 실제는 차이가 있었다. 실력이 된다 해도 마물의 살의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대로 당하진 않아.’
가지고 있는 기운을 끌어 올렸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육체를 활성화시켰다. 얼마나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허무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나를 노리는 게 분명해.’
심안이 그린골의 본능을 읽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신 때문에 그린골이 건물로 쳐들어왔다. 원장실에 가만히 있었다면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했다.
“시간을 끌게요.”
송 원장이 만류하기도 전에 하라가 먼저 움직였다.
쌔앵!
하라는 아빠에게 배운 걸음걸이를 극대화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삶에 대한 생존본능이 발동되자,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크아아앙!
그린골이 포효하며 하라를 뒤쫓았다.
송 원장과 선생들은 자신들을 지나쳐 하라를 추격하는 그린골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다. 경찰이나 유니크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뭘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발만 동동 굴렀다.
“어쩌죠? 원장 선생님!”
“마물을 유인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죽고 싶지 않아.’
두려움이 컸다. 추격하는 그린골의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문이 잠겼다. 자동으로 잠기는 유치원의 시스템이 하라의 도주로를 좁혀 놓았다. 그렇다고 교실로 갈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애들까지도 위험했다.
‘안…… 돼!’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동선을 가로막는 벽으로 인해 절망감을 부추겼다. 벽에 다다를수록 두려움은 극대화되었다.
크르릉!
막다른 길에 몰아넣은 그린골이 히죽였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공포심을 주는데 최적화된 흉물스러운 안면이었다. 저걸 보고 누가 웃는다고 생각할까? 다 잡은 먹이의 공포심을 조장하며, 유린했다.
‘엄마!’
아빠한테 훈련을 받았으면서 정작 중요할 때는 엄마를 부르는 하라였다. 역시 자식한테 아빠는 서열 2번째일 수밖에 없었다.
‘살려줘!’
간절한 외침은 신안을 타고 유치원 전체로 퍼졌다. 그러나 울림에 반응한다면 더 큰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유니크가 유치원까지 오는 시간이 최소 5분, 그 안에 그린골은 애들을 모조리 다 도륙하고도 남는다.
쩌억!
그린골은 상어처럼 돋아난 이빨을 과시하며 크게 입을 벌렸다. 한줌에 머리통부터 잘근잘근 씹어 먹겠다는 정중한 의사표현이다.
꺄악!
하라의 비명이 공기를 타고 퍼지는 찰나.
휘잉!
한 줄기 바람이 그린골을 스쳐지나갔다.
꽈득!
입 안으로 들어와 선혈과 육즙이 나와야 하는데, 그린골은 공허함을 느꼈다. 맞물리는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부드러운 인육이 씹히지 않았다. 여태 맛보지 못한 최적화된 먹잇감이었다. 허무함에 극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크어어엉!
살의가 담긴 포효에 건물이 들썩였다.
빠악!
포효를 내지른 다음, 그린골은 크게 휘청거렸다. 뒤통수로부터 무지막지한 충격이 두개골을 흔들었다. 의도치 않게 앞으로 쏠린 그린골이 벽면에 머리를 박고 튕겨졌다. 1타 2피, 앞뒤로 고통이 왔다.
“실내 정숙도 모르냐.”
심드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볼썽사납게 쓰러진 그린골을 내려다보았다.
‘응?’
마물이 입을 크게 벌릴 때 하라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괴물에게 잡아먹힐 위기였는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천천히 떴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음을 확인했다.
그 누군가는?
백마 탄 왕자와 거리가 멀었다. 붉은 마스크를 쓰고, 쫄쫄이를 입고 있었다.
‘스……마트 레인저?’
언제 어느 때라도 악당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스마트 레인저라는 방송 문구가 상기된다. 항상 악당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센스를 발휘한다. 악당도 스마트 레인저가 등장할 때만 악행을 벌인다. 그전까지는 저들끼리 잘 논다. 마치 소년 탐정이 현장에 있어야만 살인범죄가 일어는 것처럼. 스마트 레인저 주변만 혼란스럽지, 그 외엔 평온하다. 주변 통제를 다 할 만큼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왜?’
하라는 스마트 레인저에 출연한 적도 있어서 오빠들의 사랑을 받았다. 실상 연기를 하는 오빠와 무술을 펼치는 아저씨는 달랐다. 무엇보다 스마트 레인저에 나오는 오빠들의 체형보다 작은 편이다.
“물러나 있어.”
“……!”
“대답 안 해?”
“알……았어요.”
스마트 레인저 1호, 레드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하라가 얌전히 물러섰다. 의문보다 마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이게 마물이란 말이지?’
마물도감에 기록된 특징을 종합해 보면 그린골이 분명했다.
‘제법 단단하네.’
이만한 타격이면 보통 사람은 대가리가 부서졌을 텐데, 마물은 잠깐 동안 비틀거리기만 했다. 아무래도 골격 변화를 시킨 육체라서 힘 조절이 완전하지 않았다.
‘하급 마물을 상대로 전력은 반칙이고.’
마물의 등급에 따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가 이어졌다.
스마트 레인저 1호는 정우다. 일전에 강천을 이기고 받은 스마트 레인저 전투복 5종 중에 레드를 입고 나왔다. 자신의 보물 2호라며 자랑했으나,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
전투복을 입기 전 타이즈의 탄력을 확인하고, 골격을 변환했다. 나중을 대비한 임시방편이다. 7살짜리가 마물을 가지고 노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 나간 어른은 많지 않았다.
골격을 조절해 육체를 키운 꼴이라, 풍선처럼 허우대만 부풀린 상태다. 전투란 항상, 최적화된 육체를 통해 완성된다. 지금은 원래 전투력의 반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어디.’
마물을 파악하는데, 매질만큼 빠르고 훌륭한 방법도 드물다. 작용, 반작용은 실험의 기본이니.
정우는 손에 든 스마트 레인저의 필수 공격 무기, 여의봉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여의봉은 손오공의 전용병기가 아니냐고 했더니 강천 왈, 스마트 레인저 1호가 원조라고 우겼다. 서유기를 읽어 보지 않고 역사를 방송으로 배운 폐해였다. 역사는 현재의 의식으로 재구성되는 스토리라고 하더니, 왜곡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퍽퍽!
정우는 여의봉으로 그린골을 만져주었다.
여의봉의 재질은 애들용 무기답게 부드러운 솜방망이지만, 정우의 손에 들리자 강철봉에 버금갔다. 2갑자 공력이 여의봉과 조화를 이루어 신봉합일(身棒合一)을 이루었다.
우웅!
봉명(棒鳴)을 토해내는 여의봉이 그 증거였다.
팩!
아무렇게나 대충 휘두르는 듯 보여도 그린골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굴을 맞은 그린골이 튕겨 나가 벽면에 부딪칠 위기에 봉착했다. 다행히 반대쪽에서 궤적을 그린 여의봉이 벽면충돌을 사전에 예방해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그린골의 입장에선 다행인지 아닌지 관심 밖이었다. 또한 한국말을 배우지 못해 의사전달도 되지 않았다.
꾸웨웩!
그린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인간에게 맛나는 먹잇감을 빼앗겼고, 분노한 죄밖에 없었다. 막말로 먹을 때는 그린골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었다. 이 무지막지한 인간은 밥 먹는데 건드리는 걸로도 부족해, 구타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아팠다. 처음보다 그다음이 더 아프고, 점점 더 아파왔다. 원래부터 아무 생각 없었지만, 더 생각 없어졌다.
‘저래도 되는 거야?’
스마트 레인저 1호의 압도적인 위용에 하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물도감에 나와 있기로 3급의 그린골이었다. 일반 사람은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린골이 곤죽이 되도록 처맞고 있었다. 좀 전까지 무지막지한 공포를 제공했던 그린골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방송의 스마트 레인저 1호도 저렇게까지 압도적인 위용은 보여주지 못했다. CG를 활용한 특수기법이 민망해지는 현실이다.
‘잡네, 잡아!’
그린골은 여의봉을 피해 도주하지만 막다른 길목이었다. 앞을 가로막고 줄곧 여의봉을 휘두르고 있는 레드 1호의 무자비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발버둥을 치며 도망치려고 하나, 기어이 잡아채서 두드리는 레드 1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관은 레드 1호의 중얼거림에 있었다.
-독침을 쓸 때 반응이 좀 느리다.
느려서 뭐?
-그 상태에서 피하면 더 아파. 뼈 나간다.
안 피해도 아플 것 같은데.
-관절이 역으로 꺾어도 괜찮을라나? 일단 꺾어 보자.
이미 꺾었으면서 뭐라는 거야?
하라는 그린골의 본능을 심안으로 읽었다. 절절한 고통이 전해져 처절하기까지 했다. 보고 있는 사람이 더 괴롭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얄……미워!’
이토록 얄미운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얄밉다. 만약 저 대상이 그린골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복장 터져서 죽을지도 모른다.
“단단하기만 할 뿐이네.”
좀 더 팔팔하게 날뛰어 주기를 바랐던 정우는 축 쳐진 그린골이 못마땅했다. 오랜만에 손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싱거워서 맛만 버렸다.
“그래도 잔머리는 쓸 줄 아는구나.”
정우는 늘어져 버린 그린골이 죽은 척하고 있음을 알고, 대가리를 후려쳤다.
빠악!
기절한 척이 아니라, 진짜로 기절시켰다. 그리고 관절을 하나씩 꺾어 역으로 꼬아 놓았다. 풀려면 꽤나 고생할 수밖에 없는 형태였다. 삼계탕에 들어가는 닭을 역으로 말아 놓은 형태라고 보면 된다. 여의봉을 틈에 꽂아 풀기도 어렵다.
“기맥이 열리기는 했는데, 미약하네.”
조금 전의 진동을 보니, 결계를 개방할 때와 비슷했다. 마물도 속성이 있음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왕이면 6급 이상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6급이라니, 그건 재앙이다. 일대가 피바다가 되기에 딱 좋은 등급이었다. 그런 마물이 튀어나오기를 바라다니, 들은 사람이 있다면 멘붕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쩌억!
그린골의 아가리를 강제로 벌려 안의 구조를 살폈다. 이빨이 상어처럼 날카로워 씹어 먹기에 최적화된 구조였다.
“어금니 죽이네.”
많은 이빨이 있으니, 하나 정도는 기념 삼아 뽑기로 했다. 마물을 처음 상대한 기념비적인 날이니만큼.
“하나만.”
달라는 건가?
뽑고 있으면서.
쿠어어억!
강제로 생니를 뽑아내자, 정신 차린 그린골이 고래고래 비명을 내질렀다. 엉엉 울며 눈물까지 쏟고 있었다.
“이런 죽이고 뽑는다는 걸 깜빡했네. 미안하다.”
저게 어떻게 미안한 사람의 말투야? 게다가 반항도 하지 못한 무저항 상태다. 간디보다 더 비폭력적인 그린골의 목을 잡아 비틀어 버렸다.
뿌드득!
뼈가 부러지는 울림이 싱그럽다. 정우는 가면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 울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나. 뼈를 부러뜨리는 것도 기술이었다. 못 배운 놈들은 목을 잘 못 부러뜨려 반쯤 살기도 한다. 그럼 더 고통스럽다. 목이 비틀리는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 번에 깔끔, 정확하게 숨통을 끊어내야 한다.
‘캬아, 좋다.’
울림에 취했던 정우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래선 안 되었다. 과거와 달라지겠다고 맹세를 했건만, 약한 놈 괴롭히는 건 정의롭지 않았다.
‘놈은 아니잖아.’
사람이 아닌 걸로 만족했다. 마물은 죽여도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았다.
푸욱!
정우는 마물의 몸 안에 있는 에너지스톤을 잡아챘다. 속을 휘젓지는 않았다. 에너지를 발하는 부분을 구타를 통해 확인했다. 몸 전체로 에너지를 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심장과 같다. 에너지스톤은 흉물스럽지 않았다. 수정처럼 맑은 선홍빛을 냈다. 안에 담긴 에너지의 종류를 확인하기 위해 내력을 일으켰다. 에너지스톤은 융합반응을 통해 동력원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미약하네.’
지금도 내공을 쌓는 속도는 빨랐다. 굳이 에너지스톤을 활용하지 않아도 근시일 내에 과거의 무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우는 그린골의 사체를 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마의한테 주면 좋아 죽을 텐데.’
마의는 3번째 전생에서 만난 정우의 유일한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생체조직을 연구하고, 기발한 전투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고상한 취미를 보유하고 있었다. 인간개조로 완성된 혈강시는 훌륭한 병기였었다.
‘효율성이 죽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