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승부의 마왕 (3)
또르르!
동전이 굴러 앞이 나왔다. 나 선생이 선을 잡았다. 정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젠가는 선수로 판단이 나지 않는다. 탑을 쓰러뜨리지 않는 승부이기 때문이다.
정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래서 위로 방향을 잡고, 빼야겠군.’
단순히 쓰러뜨리지 않는 것으로 안심해선 곤란하다. 승부에 임하는 나 선생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가장 잘하는 게임임을 알 수 있었다. 운만으로 승부에 임하지는 않았을 테고. 나 선생의 전공이 건축이었다.
‘각을 만들어서 타이밍을 계산해야겠지.’
정우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계획을 잡았다.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답이 계산되어 나왔다. 속전속결, 빠르게 젠가를 뺐다.
쏙!
젠가의 개수가 무려 2천 개다. 그렇다 해도 중구난방으로 빼서 축이 흔들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마구잡이로 빼면 금방 쓰러질걸.”
“빨리 끝나고 좋죠.”
나 선생은 방심하지 않았다. 몇 차례의 패배로 정우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얌전히 유치원을 다니기에 잘 몰랐을 뿐이다. 강천의 연이은 패배가 이해되었다. 애들은 절대 정우에게 아름다운 패배를 선사하지 못한다.
‘축을 비틀고, 형태를 완성해 나가야겠다.’
아무렇게나 잡아 빼는 것처럼 보여도 정우는 계산한 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젠가 하나를 뺄 때마다 옆의 젠가를 일정한 힘으로 밀었다. 조금씩, 조금씩 축을 밀어 형태가 변하지 않도록.
쏙!
신중을 기하는 나 선생. 나름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빼지 않고 정우가 빼는 젠가를 계산에 넣었다. 건축의 기본은 축과 균형이다.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도록 계산했다.
젠가의 수가 하도 많아 시간이 꽤 걸렸다. 각자의 자리에 젠가가 수북이 쌓였음에도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끝났네요.”
“끝나긴 뭘 끝나.”
정우의 선포에 나유란이 발끈했다.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자기 맘대로 끝내려고 하니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변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애들과 열을 올리는 나 선생을 학부모가 봤다면 기가 막혀 했을 테지만.
믿음은 강요하지 않는다. 보여주면 그만이니까.
쏘옥!
젠가를 뺀 정우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흔들!
굳건하던 젠가의 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흔들릴 때마다 애들이 탄성을 내질러 나유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타이밍이다. 태풍에도 굳건할 젠가가 50도로 비틀어 놓은 피사의 사탑이 되었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흔들려?
나유란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건축학도로서 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젠가의 축을 계산해서 기둥을 남겨두고, 정우를 궁지에 몰기 위해 야금야금 긁었다. 그런데 채 긁기도 전에 축이 흔들리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주르륵!
똥줄 타는 현실. 나 선생의 귀밑머리에 뽀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자격증 시험을 볼 때보다 긴장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하나의 젠가로 승부의 명암이 갈린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젠가 빼는 사람 어디 갔나?”
정우의 여유에 나유란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마다 염장에 불을 지폈다.
스르르!
조심스럽게 젠가 하나를 선택해 뺐다. 흔들린다고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 선생은 살살 건드려서 빼냈다.
씨익!
정우는 웃었다.
와장창!
나 선생의 한 줄기 희망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승리를 위해 자비로 제작했던 젠가의 허무한 최후였다.
“어……떻게?”
“운이 좋았네요.”
정우의 가식적인 위로와 달리, 실상은 운과 상관이 없었다.
‘진강백의 도움이 컸지.’
진강백과 전생을 초월한 다툼을 벌이는 동안 정우는 매번 진화해야 했다. 무공만 파지 않고, 기관과 진법은 물론 독까지도 섭렵했다. 특히 기관과 진법은 수학의 기하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심축을 하나씩 흩트리고, 진법을 사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지.’
젠가를 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대로다. 중심축의 무게를 달리 하기 위해서 중력진(重力陣)을 구성했다. 자연적으로 중력을 끌어오는 진이기에 어렵진 않았다. 무게를 크게 늘릴 필요도 없었다. 나 선생이 빼야 할 위치에만 중력의 흐름을 집중시켜 놓으면 그만이었다. 어떤 곳을 빼도 흔들리는 반면, 유독 한 곳만 안정된 축이 있었다. 나 선생이 빼야 할 젠가까지도 계산에 넣었다.
“다……시 해.”
“그 전에 할 일이 있잖아요.”
“뭘?”
“알면서 그러시는 거면 영악하시네요.”
정우가 딱밤 자세를 취하자, 나 선생이 멈칫하며 물러섰다. 애한테 영악하다는 말까지 들은 와중이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정우가 보통 애면 선생 체면에 이러지도 않는다.
“정우야, 팔목으로 하면 안 될까?”
“다음부터 팔목으로 하죠.”
“양심적으로 같은 데는 때리지 말자.”
“내기에 없는 조항이네요.”
나 선생은 말로도 정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른 때는 어눌하게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승부에 임하면 뉴스 앵커보다 조리 있게 잘했다. 대화를 섞으면 섞을수록 불리하게만 다가왔다. 게다가 주변의 아이들까지 이용했다.
“지고서 땡깡 부려도 되나 보네요.”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들이대며 나 선생을 바라보았다.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하는 무지막지한 눈초리다. 차라리 욕을 하고 비난을 하면 그나마 낫다. 선생으로서 애들의 순진무구함에 오물을 투척할 순 없었다. 정당한 승부를 했다면, 마땅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바른 정의였다.
하아아!
나 선생은 체념하고 내려놓았다.
“자, 맘대로 해.”
“역시 선생님이세요.”
치켜세워 주는 정우의 제스처에 나유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지금 이 순간 정우가 같은 나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얄미워! 얄밉다고!’
하는 행동이 지나치게 정중하고, 정당해서 더욱 얄밉다. 비겁한 수단을 사용했다면 모를까, 대결마저 공정했다.
빠악!
딱밤은 이마의 얇은 두피를 관통해 전두엽을 강타했다.
부릅!
충격을 받은 나유란은 찰나 멈칫한 채 멍하니 시선을 고정해야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을 관통하는 가공할 통증이 밀려왔다. 눈물이 쏟아질 만큼 엄청나게 아팠다. 그렇다고 애들 보는 앞에서 눈물을 쏟아낼 수도 없는 처지다.
“아주 잘하는구나, 정! 우! 야!”
“노력의 대가죠.”
나유란은 곱씹었다. 이대로 물러서야 할지, 아니면 또다시 도전해야 하나 망설임이 교차했다. 현실적으론 포기해야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 저 얄미운 녀석에게 패배의 쓴맛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이는 선생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심(私心) 200%다.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한 번 더하자.”
“얼마든지요.”
정우는 여지를 주었고, 나 선생은 덥석 물었다. 쥐덫인 줄도 모르고 포식한 쥐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반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애가 있다면 공남주가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러나 요즘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말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정우는 입 모양으로 ‘어흥’을 그렸다. 한퉁인지, 멍퉁인지 알 바 아니지만, 상어의 습성을 보여주었다. 상어가 주변의 어류를 가리지 않고 포식하는 식사 장면이었다. 그날 남주의 동심은 파괴됐다. 상어의 실체를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정우 앞에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조용해서 좋군.’
실내에서 떠드는 거 아니라고 배웠다(室內靜肅). 친히 수다쟁이 남주를 요조숙녀로 만들어 주었음에 감개가 무량했다. 조용히 있으면 예전보다 더 귀엽고, 예뻐 보인다.
‘내 앞에서 떠든 놈치고, 입이 성한 적이 없었지.’
주둥이를 나불댄 놈은 친히 천연 바이오 흙 침대에 눕혀 주었었다. 너무 심하다고? 노노노(NoNoNo)! 진짜 말 많은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을 보지 못했다. 현란한 주둥이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 선동하거나 파탄을 일으킨다. 그래서 전생에선 말보다 칼로 대접을 해 주었다. 말 한마디에, 칼빵 하나씩. 그럼 조용하다 못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교실에서 넋이 나가 있는 사람이 2명 더 있었다.
1명은 강천이다.
정우는 어제 시계를 엄마에게 주었다. 어디서 났냐고 하기에 강천이 내기로 시계를 걸었다고 했다. 엄마 친구에게 돌려주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시계는 엄마 친구의 혼수였다고 한다. 그날의 결과는 굳이 보지 않아도 강천의 표정으로 입증되었다. 시달린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남은 1명은 나 선생이다.
젠가를 시작으로 알고 있는 보드 게임을 전부 가지고 왔으나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특히 젠가는 일방적인 패배의 연속이었다. 딱밤이 아닌 팔목으로 대신했으나, 대가는 선명하게 남았다. 채찍을 휘두른 듯 팔목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집에 가선 말도 못한다. 누구한테 맞은 거냐고 엄마가 따졌으나, 애한테 맞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 선생, 멍하니 뭐하고 있는 거예요?”
“아! 원장 선생님!”
청송 유치원의 대장. 특이한 미적 감각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았으나, 지금에 와선 재평가를 받고 있었다. 유치원 주변이 시대에 발맞추어 변화하고 있는 동안 제자리를 지킨 뚝심이 빛을 발했다.
“요즘 들어 왜 이래요?”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네요.”
원장은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 선생이 이유 없이 그러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평소 성실한 선생이 갑자기 그러면, 집에 우환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정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요.”
“그게.”
나유란은 터놓고 말하기 곤란했다. 말해봤자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대나무 숲이라도 있으면 가서 소리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송원숙 원장은 엄마 미소를 지었다.
“부득탐승. 이기는 것에 목적을 두면 삶이 피곤할 뿐이에요. 게임은 게임으로서 즐기세요.”
“아는데도 맘이 편하질 않네요.”
정우에 대한 험담은 하지 않았다. 애한테 졌다고 뒷담화를 까는 건 나유란이 생각해 봐도, 속물에 저질이었다. 그래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애한테 맞은 꼴인데, 이게 아프기도 하고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반 애들의 굳건했던 신뢰가 정우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정우가 그렇게 게임을 잘해요?”
“말도 마세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니까요.”
“나 선생도 게임을 잘하는 걸로 아는데, 정우가 참 대단하네요.”
“대단한 걸 떠나서 승부에 너무 집착하는걸요.”
승부에 집착하는 사람이 누군데. 송 원장으로 속으로 혀를 찼다. 반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정우와 대조되었다. 정우가 비록 1등은 아니지만, 세 손가락 안에는 든다. 샌님처럼 얌전한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승부욕이 상당한 모양이다.
‘궁금하긴 하구나.’
송 원장은 정우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기에 나 선생이 언급할 때마다 콧바람을 황소처럼 불어대는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인재라면 발굴해 내는 것도 원장의 의무였다.
“원장 선생님께서 나서시게요?”
“나도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나 선생은 걱정이 되었다. 자신도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쳤다. 연이은 패배는 결코 운이 아니다. 정우는 얄미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우를 쉽게 봐선 안 돼요.”
“바둑이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나 선생은 원장의 바둑 실력을 안다. 프로에 버금가는 기력을 쌓으셨다. 그러나 정우라고 바둑을 두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바둑 기사의 경우 나이가 어려도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걱정 마세요. 바둑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을 테고, 가르치다 보면 승부욕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어요.”
바둑은 예(禮)로 시작해서 예(禮)로 끝나는 스포츠다. 기력을 쌓아가다 보면 정우의 승부욕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나친 승부욕은 타짜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이쯤에서 패배의 쓴맛을 가르쳐 줘야, 삶의 현명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부족함이 있다면 채우고,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는 것이 스승의 자세임을 잊지 마세요.”
“예, 원장 선생님!”
나유란은 수긍했다. 원장님이야말로 정우를 올바르게 이끌어 줄 훌륭한 분이셨다. 그리고 바둑 초보가 원장 선생님과 승부해봤자 결과는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