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승부의 마왕 (1)
격변의 시대에 돌입한 지 30년, 인간은 진화를 했고 과거보다 강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모두가 강해지면서 상향평준화를 이루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특출 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속성을 강화한 능력자가 대접을 받게 되었다.
대부분은 국가의 통제력 안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강화된 능력자라고 해도 국가를 상대하긴 어려웠다. 국가는 이미 능력자를 확보했고, 개인이 설치면 철저하게 짓밟았다.
마물이 튀어나와 현실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능력자가 생성되면서 인류는 오히려 발전했다. 전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이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발전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는 게 원래 전쟁이다.
남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삶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무위자연, 무릉도원을 찾는 사람들이나 속세를 떠나 제멋대로 살지. 자연인치고 성공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정우도 아침은 분주했다.
“엄마만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김 여사께서는 아침잠이 많으신 편이다. 아빠는 중소기업을 운용하고 계시는데, 요즘 들어 수주를 맞추느라 굉장히 바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하셨다. 식사는 토스트 가게 아줌마가 대신 해결해 주신다.
엄마는 매번 부랴부랴 일어나서 겨우 준비를 하신다. 말로는 저혈압 때문에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는데, 집에 있는 혈압 측정기는 정상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계가 고장 났다고 코드를 빼 버리셨다.
흐느적!
눈곱을 겨우 떼고 시야를 확보한 김 여사는 옷을 차려입은 아들을 확인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에도 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밥은?”
“먹었어요.”
“미안해, 정우야. 엄마가 저혈압이라서.”
“저번엔 혈압이 높던데요.”
“고장 난 거라고 했지.”
엄마 말이 법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게 된다. 가정의 평화는 엄마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비합리적인 방식이 통용되었다.
정우는 집을 나와 유치원 버스를 기다렸다. 외출 시 화장을 하시는 김 여사였다. 여자로서 흐트러진 모습이 자연스러우면, 아줌마 소리 듣는다고 했다. 자신은 절대 아줌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
‘생각 없이 아줌마라고 부른 건너편에 사는 형은 괜찮으려나?’
겉으로는 담담히 웃으며 넘어갔지만, 돌아선 김 여사의 싸늘한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땐 항상 웃음을 달고 사는 김 여사가 맞나 싶었다. 선물을 사 들고 일찍 들어온 아빠만 들들 볶였다.
-여보, 왜…… 그래?
-몰라서 물어요?!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요?
-전부 다.
-당신은 잘못한 걸 모른다는 게 문제예요!
아버지는 선인(仙人)이다. 우화등선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호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날은 나도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멘붕이 와도 시원치 않을 텐데, 허허! 거리며 구렁이 담을 넘었다. 엄마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남편이 있을까 싶었다. 아빠는 엄마를 위해 태어난 백마 탄 왕자님이 분명했다. 솔직히 나는 저렇게 못 산다. 엄마가 내 마누라면 난 성질을 참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두웅!
버스가 왔다. 차에서 나 선생이 내려 정우를 태웠다.
유치원 버스는 50인승의 대형 리무진이었다. 학생의 안전을 위해 큰 차를 샀다는 원장 선생의 부언과는 달리,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이만큼 크고 좋은 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니, 어서 유치원으로 달려들라는. 버스의 외관엔 가성비는 개나 줘 버린 청송 유치원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광고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비효율적이고 허례허식이 가득 담긴 광고이기는 하나, 그것이 통했다. 광고는 확실히 현지화가 되어야 한다. 그 나라 사정에 맞추어서 해야지, 무조간 잘 만들고, 효율적이어도 소용없다.
유치원까지는 20분이 걸린다.
정우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검색을 하며 요즘 사정을 살폈다. 여러 사이트의 뉴스를 찾아 성향을 분석하고, 같은 문제를 어떤 방향에서 봤는지를 검토했다. 그날의 뉴스는 대부분이 핫이슈를 거론한다. 하지만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기자에 따라서 해석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래서 뉴스는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애들은 호기심이 많고, 남이 집중하면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다. 뉴스를 정독하는 정우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애가 있었다.
“뭐하는 거야?”
“그냥저냥.”
경제 파트를 보면서 설명을 해봤자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줄 마음도 없었다. 시간 낭비는 애초에 사양한다. 대화도 말이 통하는 상대와 해야 한다.
“만화 보는 거야?”
정우의 옆에 앉은 여자애는 호기심이 동했는지 대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해도 못하면서 무작정 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례임에도 불구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했다. 7살 여자애에게 많은 걸 바라서는 안 되었다.
“어제 바다의 왕자 봤어?”
“아니.”
“왜 안 봐, 얼마나 재밌는데!”
“많이 봐라.”
“나는 한퉁이가 제일 좋아.”
바다의 왕자는 저녁에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쇠퇴 일로를 걷고 있는 와중에 애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수많은 해양 생물을 만나 친구가 되는 이야기다. 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흔하디 흔한 스토리라고 하는데. 실상 흔한 내용을 한 포인트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능력이었다.
바다의 왕자는 5세에서 10세를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호기심을 가지기에는 정우는 현실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재잘거림이 귀찮아진 정우는 공남주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었다.
“네가 말한 한퉁이가 오징어지, 아마.”
“다리가 10개나 돼.”
어느 다리로 찍었게? 이걸 매일 써먹고 다닌다고 한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식량으로 다리 1개를 떼어준다나. 솔직히 좀 잔인하다.
“상상이와 친구가 됐지?”
“둘이 되게 친해. 10개라서 다리 하나 정도는 줘도 괜찮아.”
한퉁이가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친구를 만들어 나간다. 스토리 라인의 메인 축이 된다. 메시지도 나쁘지 않았다. 나라와 인종을 벗어나 범인류적으로 화합하자는 내용이니까.
“별로 친할 것 같지 않은데.”
“아냐, 친해!”
상상이는 상어다. 상어와 친한 생선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은 상상이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친구들을 다 잡아먹고 끝날걸.”
“아니야!”
아니든지 말든지, 정우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초소형 블루투스 이어폰은 귀를 보호해 주면서도 소음을 제거해 주었다. 남주가 울면서 떠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전생의 나였다면 그 입을 바늘로 친절하게 꿰매 주었을 거다. 내가 먼저 귀를 막아 준 걸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으아아아앙!
남주가 울자, 나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너 왜 남주를 울리는 거야?”
정우는 자초지종을 풀어 놓았다.
나 선생은 정우의 논리 정연함에 말문이 막혀 왔다. 아니라고 하자니, 정우의 말이 맞기는 맞다. 생태계의 원리는 약육강식이다. 육식을 하는 상어가 오징어를 친구로 두진 않는다.
“만화는 만화로 봐야지.”
정우는 이해하고 넘어갔다.
대화가 끊기자 무안해진 나 선생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굳이 남주의 유일한 꿈과 희망을 박살냈냐고. 면박을 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자신은 유치원 교사다. 애들을 훈계하려면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했다. 2015년, 유치원 교육에 대한 실사가 들어가면서 적법하지 않은 훈계도 법의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당시 교육에 매진하던 훌륭한 교사는 일부의 잘못으로 사정이 매우 힘들어졌었다.
“남주야, 울지 마. 정우 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한퉁이와 상상이는 친구죠?”
“그럼 친구지. 그러니 남주는 정우하고 사이좋게 지내.”
“알았어요. 헤헤헤!”
정우는 그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남주를 보며,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전생의 내 앞에서 울다가 웃은 놈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엉덩이를 통해 날카로운 병장기가 튀어나올 수 있었다.
‘관대하다, 관대해.’
유치원의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고 있었다. 정우는 묵묵히 따라갔다. 어렵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완수만 하면 끝이 난다. 유치원 수업이라고 해서 무조건 쉽지만은 않았다. 시대가 변해도 초강대국인 미국의 언어, 영어가 대세였다. 요즘 시대는 영어가 제2의 국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다.
실상 통역기가 완벽해지면서 굳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데, 쓸데없는 열정이기는 했다.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열정 낭비이기는 하나, 어쩌랴. 사회의 흐름을 아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업이 끝나면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자.”
정우의 책상 앞으로 강천이 다가왔다.
마지못해 뭔가를 내밀었다. 망설임이 잔뜩 보이지만 강천은 끝내 나노봇-원을 정우에게 주었다.
‘맘에 들어.’
애들이라 오기를 부릴 수도 있었다. 집에 있는 나노봇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강천은 나노봇을 넘겼다. 미련은 남아도 승부에 임하는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사내라면 나이가 적든 많든 약속을 지켜야 했다. 어릴 때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커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 약속대로.”
정우는 애들에게 나노봇-원을 넘겼다.
“진짜 나노봇이야!”
“우와아! 텔레비전에서만 봤는데.”
나노봇은 애들에게 신세계를 선사해 주었다. 꿈과 희망이 나노봇에 집중되었다. 그럴수록 강천의 속은 타들어 갔다. 장난감이 만진다고 닳는 물건은 아니지만, 애들은 단순히 만지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오래 가지고 논 장난감 중에 멀쩡한 걸 찾기가 어려웠다.
“도전할게.”
“그러든지.”
정우는 망설이지 않고 받아주었다. 게임은 지우개 쌓기 게임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책상 위에 지우개를 놓고 상대방의 지우개를 절반 이상 점령하면 끝이 난다. 스크린 북 시스템이 구축된 마당에 지우개는 거의 쓸모가 없지만, 원장은 예전에 사용했던 물품을 교실에 모아두었다.
“갈라.”
가르면 뭐하냐고. 선은 정우다. 지우개를 몇 번 만져 보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각선으로 놓고,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와, 또 시합한다.”
애들이 몰렸다. 정우의 시합은 교실의 큰 화젯거리였다. 관심을 몰고 다녔다. 샛별반 아이들의 시선이 책상의 지우개에 꽂혔다.
“한다.”
정우는 지우개의 모서리에 손가락을 댄 후, 강천을 봤다. 덩치는 산만하면서 눈빛은 사슴처럼 생겼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어찌나 큰지, 북을 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드륵!
긁듯이 지우개의 모서리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