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정우 (2)
유치원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신체의 소유자가 떡하니 그림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육체의 광합성 작용을 방해하고 있는 녀석. 발육이 남달라 같은 연령이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 초등학교 6학년을 유치원에 가둬놓은 느낌과 얼추 비슷하다.
덩치의 이름은 이강천.
나와 동갑이다.
유치원 내의 파벌을 구성하는 실세다.
얘는 할 일이 그렇게 없는지, 매번 나의 벤치를 노리고 있었다. 7전 8기의 용기는 가상 하나, 나한테 들이대면 만용이지. 막말로 내가 육체만 애지, 영혼 나이는 고조할아버지보다 많다.
“도전하겠어.”
“어련하시겠냐.”
“이번엔 안 져.”
“세상에 지고 싶어서 지는 놈은 1명도 못 봤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라는 말처럼 비겁한 변명은 신용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이길 수 있으면 이기는 게 맞다. 이길 수도 없으면서, 말로 빙빙 돌리는 건 위선적인 행동이다. 나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를 신용했다.
나의 실체를 안다면 애들에게 져줄 수 있지 않느냐고 따질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지고 싶지 않다. 패배자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갈라.”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훗!
그것부터가 실수다. 애들과 가위바위보를 해 봤자 정우가 이긴다. 무엇을 낼지 훤히 보이는 데다가 내는 도중에 얼마든지 티 안 나게 바꿀 수가 있었다. 타이밍과 제스처, 이것만 가지고도 강천을 가지고 놀긴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승부에 장난은 치지 않는다.
“보.”
“가위.”
이게 뭐라고.
정우는 기분이 좋았다.
헤잉!
강천이 울상을 지었다. 100번을 해도 매번 진다. 한 번도 이겨보지를 못했다. 다시 하자고 우겨본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졌다.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둘렀다가 오히려 처맞았다. 싸움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덩치도 자신보다 작은데, 한 방 맞을 때마다 아파서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럼 한다.”
애들이 우르르, 몰렸다.
내기는 단순했다.
땅을 누가 더 많이 따먹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름하여 땅따먹기. 꽤 유치한 놀이다. 수백 년의 전생과 현재 7세를 더하면? 정신연령만 놓고 보면 정우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
‘난 이런 거 좋다.’
정우는 유치한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전생의 자신을 아는 자가 있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천마가 돌았다. 마교 X됐네!
-수라가 아니라 수리수리 마수리다. 워이, 마귀야 물러가라!
-혈영이 광인이 됐다. 피가 부족한 게 분명해!
-독왕이 독을 잘못 마셨다. 의원 불러!
-혈신이 아니라 병신이었어. 이건 약도 없잖아!
이럴 게 분명하다. 당연한 반응이다. 천하를 도모했던 절대자가 유치원에서 땅따먹기나 하고 있을 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
‘내가 아는 땅따먹기는 칼부림이었으니까.’
양쪽에 무인을 몰아넣고, 영역을 더 많이 차지한 쪽을 살려주었다. 살기 위해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야 했다. 그것이 당연했고, 그것이 유희였다. 매일이 혹독한 훈련과 전투의 연속이었던지라 재미를 위한 게임은 해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20살이 되어서 땅따먹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20살에 정우는 문파의 핵심 멤버였고, 곧 자리를 물려받을 위치였다. 일문을 다스리는 수장에게 땅따먹기가 가당키나 한가.
상념을 지우고 게임에 집중했다. 유치하다 해도 승부는 승부. 최선을 다해 주는 것이 도전자에 대한 매너이자 도리였다.
‘호오, 제법 머리를 쓰시겠다.’
땅따먹기를 하려면 원을 그려야 한다.
찌이이!
정우가 원을 그리자, 강천이 멀찍이 원을 그렸다.
놀이터는 전후좌우 사방 면적이 30m 내외다. 이 정도 크기면 꽤나 잘나가는 유치원 중에 하나였다. 왜냐고? 도시의 비싼 부동산을 감안하면 놀이터가 없는 유치원도 있었다. 김 여사께서 여기 집어넣기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애를 썼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안에 있는 애들 대부분이 먹고살 만했다.
어쨌든 강천은 정우의 원에서 최대한 멀리 미끄럼틀을 달고서 뒤쪽으로 있었다. 서로의 땅을 먹고, 먹고 먹어도 한참이 걸릴 위치다. 이러면 게임 시간이 길어져서 보는 애들이 질려야 마땅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 저들끼리 놀았는지 모를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흥미를 유발하는 이유는 정우와 강천이 유치원의 핵심 멤버이며, 전부터 내기를 계속 해 왔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강천은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저번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형이 그랬다. 그럴 거면 멀찍이 원을 그리라고.
탓!
엄지에 가로막혔던 중지를 내밀어 구슬을 쳤다.
슈웅!
보기에는 너무 셌다.
“세다!”
“망했어!”
“우앙!”
구슬은 지면을 거의 닿지 않은 채 물수제비뜨듯 날아갔다.
호기심이 동한 나유란 선생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특히 정우에 대한 관심이 유별난 축에 속했다. 그녀에게 정우는 신기한 존재이자, 경쟁 상대였다.
‘이건 안 되겠네.’
원의 지름은 20cm에 불과했다. 딱 봐도 5m 이상 날아갈 것이다. 3번의 기회 중 1번을 어이없이 소모한 꼴이다. 다시 돌아오기에는 지나치게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승부의 마왕 정우라도 어려웠다.
‘이럴 때도 있어야지.’
내심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돼서 안심한 나유란이다. 이 애는 도무지 뭘 생각하고 살아가는지 모를 만큼 이상한 애다. 그렇다고 질이 나쁘냐? 그도 아니다. 반듯한데, 어딘지 모르게 거슬린다. 모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신비한 아이다.
“하하하하, 끝났어.”
“뭐가?”
“거기서 2번 만에 어떻게 들어와.”
아예 방향이 틀어져 있었다. 강천이 어린애답지 않게 확신하는 이유가 되었다. 저 거리에선 정우도 무리였다. 이번에야말로 승리의 여신이 찾아왔다.
하!
정우는 피식거렸다. 얘는 정말 단순하다. 하나만 알고 있었다. 둘을 알면 좀 안 되냐? 계속 이기는 내가 미안해질 정도다.
“그러는 너는?”
“뭐가?”
“넌 거기서 어떻게 할래?”
“나야 뭐……!”
가위바위보를 매번 지는 통에 시작도 못 해보고 승부는 끝이 나 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던 강천이다. 이번에는 거리를 두어 한번에 끝나지 않도록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신도 정우의 땅을 따먹기가 어렵게 됐다.
“누가 가르쳐 줬냐?”
“형이 이렇게 하면 다음 기회도 있다고 해서.”
생긴 건 소도 때려잡게 생긴 주제에 목소리는 또 가늘다. 나중에 근육맨이 되어서도 모기 소리를 내면 가수나 예능인이 될 수 있겠지.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형이 몇 살인데?”
“10살이야, 이거 왜 이래.”
“그렇구나, 훌륭하다.”
형제는 용감한 대신 무식했다.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고 해도, 강천의 유전자를 감안할 때 정신연령이 완성되려면 최소 20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3살 터울 형에게 나온 답이라고 해 봐야, 결과는 이렇다.
‘부모님이 속 타겠어.’
부모님은 말하신다.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과연 커서도 건강하기만 하면 좋아하실까? 건강한 만년 백수는 오래 살 수밖에 없다. 욕을 하도 먹으니,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넓히면 되지. 그럼 내가 이겨.”
“이거 어쩌냐, 난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정우는 구슬을 튕겼다. 이번에는 좀 전보다 힘을 더 주었다. 7세 아이의 평균 근력을 감안하면 나오기 힘든 속도와 파워지만, 정우는 평균을 넘어선 지 오래다. 겉모습만 7세지 내실은 정말 알찼다. 보면 아마 깜짝 놀랄걸.
쌔앵!
맹렬한 속도를 냈다.
아!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속도도 빠르고,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리되면 누가 봐도 답이 딱 나온다. 유치원생도 알만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나 선생도 이번에는 실패를 확신했다.
탁!
날아간 구슬이 놀이기구의 옆면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향을 틀더니 사선으로 꺾어 강천의 원을 돌면서 지나갔다.
헐(Herl)!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돌발 상황.
의도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저래도 되나 싶다. 그러나 아직은 원과 거리가 멀었다. 땅따먹기는 지름 20cm의 원 안으로 돌아와야 성공이다.
‘내 사전에 실패란 없거든.’
정우는 속도, 방향, 장애물 탐사까지 사전에 마쳤다. 놀이터에 있는 애들과 사물, 지면의 상태, 풍속, 날씨의 영향까지도 감안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매일 시간을 죽이고 있지 않았다. 또한 보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잘 보기만 해도 사람은 잘 숙성된 와인처럼 진국이 되기도 한다.
정우는 제대로 보고, 진의를 정확히 꿰뚫어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
“정우야, 이번엔 좀 어렵겠다.”
나 선생이 정우를 위로했다. 실패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위로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애들이니 위로가 필요하다고 봤다. 애들도 정우의 패배를 예상했다.
‘이거 실패했다고 지는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래?’
한 번의 실패는 병가지상사라고 떠들면서, 실패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우리나라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빠져나가지 못할 나락이었다. 실패를 거울삼아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방송에선 희망적인 메시지로 포장하지만, 방송을 보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희망이라는 단어는 현실의 잔혹함을 포장한 미사여구였다.
‘그럼.’
정우는 안법을 극대화하고, 신경을 집중시켰다. 전신에서 활성화된 근력을 손가락으로 보냈다. 궤적, 속도, 비율, 정확성이 일치되어야 한다. 극대화된 집중력으로 인해 주변의 흐름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려진다. 오로지 나만이 정상적인 속도를 내고 있었다.
타앗!
구슬을 쳤다.
거리는 7m. 꽤나 먼 거리다. 20cm 지름의 원에 들어가는 건 성인도 어려운 과제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숨소리도 멈춰 있었다. 집단 호흡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데구루루!
30cm의 거리를 남겨두고, 구슬이 흔들린다.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시선을 강제했다. 시청자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방송 프로그램보다 더 재밌다. 아이들의 흥미로운 놀이로 포장하면 시청률 10%는 가능할 거다.
“설마!”
혹시나 했던 나 선생도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굴러가는 속도를 감안하면 들어가지 않을 것도 같고, 들어갈 것도 같았다. 판단은 끝까지 가 봐야 할 수 있었다.
슬금슬금.
구슬이 목적지를 향해 다가갔다. 원을 그린 선만 넘어가면 게임은 끝이 난다. 왜냐? 강천의 원이 정우의 궤적에 먹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골프에서도 공이 홀에 들어가기 전까지 승패를 모른다고 했다.
모르긴 뭘 몰라.
와!
함성이 터졌다.
기어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