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게 사제의 예 같은 걸 표할 건 없어. 황궁 의원으로서 부족한! 기본만 가르쳐줄 테니까. 그냥 선배가 도와준다고 생각해.”
말과 달리 품안에 진주를 챙기는 모습이 솔직해서 웃음이 났다. 소희가 한 걸음 다가가 속삭였다.
“28번째 황자님 때문에 의원들이 다 잡혀갔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왜 황자님 때문이야? 위험한 소릴 하네.”
젊은 의원은 바깥 문에 다가가서 문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황자님은 아!무!문제도 없어.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해.”
“아기가 그렇게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데요?”
“…자네는 이미 그분을 만나뵈었군.”
그는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차갑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뭔가를 가르칠 필요는 전혀 없어.”
“왜요?”
조금 전까지는 거의 거래가 성사될 것 같았다. 이곳의 사제관계는 대단히 엄격한 것으로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 사제의 예를 표하지 않고 한약재와 한약에 대한 지식을 얻는 건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인데, 어째서 이 일이 틀어졌지?
안 부인의 아기에 대해서 물어봐서? 아니야. 아기를 이미 보았다고 해서? 소희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럼 하나만 더 대답해 주세요.”
“뭘?”
설마 거기까지 받고 입을 씻을 셈인가. 오랫동안 장보기를 도맡아하며 능숙하게 야채와 과일의 값을 흥정하던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소희는 이만큼의 은덩이가 단지 말 몇 마디 주고받고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물었다.
“아기님을 먼저 진료한 의원들은 어떻게 됐죠?”
의원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소희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리고 목에 손날을 가져다댔다.
- 끽.
여기에도 참수형이 있는 것이다. 목에 손날이 한 번, 그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그 동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다. 등골이 서늘했다. 소희가 무언가를 더 물으려 하자 젊은 의원이 딱 잘라 말했다.
“진주값은 여기까지야.”
“의원님..”
젊은 의원이 팔짱을 끼고 소희를 훑어보았다.
“의원님 말대로라면 어차피 나는 곧 죽은 목숨이니까 가르칠 필요도 없다는 거잖아요.”
“그렇게까지는 말 안했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는 품이 자기 일 아니라는 태도다. 시우가 도움을 주려는 듯 말을 꺼냈다.
‘도씨 세가에서 도움을 줄 거라고 이야기해봐.’
소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우에게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건데 오히려 도움을 받아서야 곤란하다. 그리고 하나 더,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시우와 그 가문의 관계는 도대체 뭘까? 그 가문은 시우가 계속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 한때 도씨 세가의 사람과 인연을 맺었나?
차라리 옛날 자신이 낳은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보고 싶으니까 보러 가자고 했으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틈틈이 말을 꺼내서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길이 다르더라도 넓게 보면 저희는 같은 학문을 공부하고 있는 동료이지 않습니까?”
“뭐?”
당황한 빛이 서렸다. 소희는 문장을 천천히 씹어 뱉듯이 말했다.
“여태까지 아기님의 증상이 뭐였는지, 치료한 방법은 뭐였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의원님이라면 알고 계실테지요.”
의원이 크게 놀라 물었다. 만지작거리던 콧수염을 그대로 뽑아 버릴 기세다.
“정말로 치료할 셈인가?”
“그것 때문에 불려왔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치료하면 죽는다? 소희가 다시 물었다.
“치료하면 죽습니까?”
그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아니구나.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소희를 푹푹 찔렀다.
“치료하지 못하니 죽는 거지! 태의의 수장인 화 의원께서도 밝히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 우리같이 의원 말석에 이름 올린 자들이 어떻게 원인을 알 수 있겠나.”
조곤조곤 말하다가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진다. 흥분한 태가 완연하여 소희는 힐긋 문 쪽을 보았다. 경비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는 아니겠지? 이 창고 안은 꽤나 크고 넓으니 바깥까지 소리가 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천하 삼대 의원 중 두 명이 벌써 손을 놨어. 이제는 백의원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분을 찾을 수가 없어서….”
‘범가와 당산, 둘다 손을 놓았다고? 그 정도로 심각한 병증이란 말이야?’
시우가 놀라 중얼거렸다. 현대에서 온 여의사인 그녀는 내내 이 시대의 의술을 업신여겨 왔다. 그런 시우가 높게 평가하고 있는 의사들이 있었다니 대단하다. 소희가 물었다.
“그래서 그 증상은 뭔데요?”
“진심으로 치료할 생각인가?”
젊은 의원이 덥석 소희의 양손을 쥐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소희는 뜨끔했다.
의원으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저 치료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반드시 아기님을 치료할 겁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저도 의원이니까요.”
‘네가 언제부터 의원이었니?’
시우가 라디오라면 벌써 꺼 버렸을 것이다. 소희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의 치료 기록과 경과를 혹시 아십니까? 제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젊은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의기가 있는 분인지 모르고 실례를 했소. 익일 저녁에 숙소로 찾아가겠소.”
‘당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 줘.’
다급하게 물어오는 시우의 질문에 소희는 눈을 잠시 깜빡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의원의 정방채에 있습니다. 어디인지 아십니까?”
“물론이오. 그럼.”
느닷없이 저쪽에서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긴 그림자가 약창고 안까지 뻗었다. 젊은 의원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껏 털어놓은 것이 남에게 들렸을세라 질겁한 모양새다.
“차 의원께서 약재를 찾으러 오셨소.”
불퉁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경비대원이 손을 휘 저었다. 비쩍 마르고 염소 수염이 난, 방금 차 의원이라 불린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고민하지 않고 쭉 걸어와 바로 갈근피를 찾아 퍼 담는 것이 여기에 한두 번 온 것이 아니었다.
“주결해, 이제는 하다하다 약고에 여자를 끌어들이냐?”
차 의원이 혀를 차며 젊은 의원을 노려보았다. 주 의원이 발끈했다. 콧수염 아래로 침을 튀기며 손가락질을 했다.
“예절이라곤 약에 쓸 데도 없는 놈! 이분은 새로 온 임 의원이다. 너와 동급인 삼급 패를 받았어.”
“호. 그러면 뭐하냐? 아기님 진료를 보고 왔다던데. 석달 열흘 지나면 죽을 목숨인데. 삼급이면 어떻고 이급이면 어때. 특급 태의도 벌을 면치 못하는 통에.”
소희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시우가 질문한 것은 지금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을 뒤로 미뤄두고 두 명의 의원에게 말을 건넸다.
“두 분 사이가 좋아보이시는군요.”
같은 급이라 해도 미리 황궁에 머물러 있던 선배 의원들을 존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형제처럼 티격태격하는 것이 정말 친해 보였다. 차 의원과 주 의원이 동시에 말을 멈추고 소희를 바라보았다.
“들어온 지 삼 년이 지나도록 삼급을 면치 못하는 놈과 내가 무슨!”
“동기라서 봐 주는 거요. 저 웃기지도 않은 콧수염하며.”
“들어온 해는 같았어도 쌓은 실력이 다르다, 웃기지도 않은 놈아!”
다시 투닥거리는 것이 꼭 초등학교 남학생들 같았다. 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상급 의원들이 전부 갈려 나가고 난 후에 남은 쓰레기들이다. 체면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품위가 없군.’
소희는 재차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두 분의 실력보다 한참 모자란 제가 황족의 일원을 치료하려면 최대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름 없는 아기님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결해가 석상처럼 굳었다. 차 의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나까지 죽는 건 사양이다!”
“여기 계신 주결해 의원께서 이제까지 치료기록을 보여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소희는 맑은 눈으로 차 의원을 바라보았다.
“약재에 밝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갈 길을 도와주신다면 크게 보답하겠습니다. 만일….”
“치료가 실패한다면 날 물고 늘어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당연합니다.”
소희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더러운 흙바닥에 그대로 절하는 모습에 주결해가 기겁했다.
“아니,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
“어서 일어나. 삼급 의원의 수치다.”
일어나라고 하지만 일으켜 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들도 재고 있는 것이다. 차 의원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8예의 불치병을 낫게 했다며? 당당하게 아기님 진료를 보고 왔다고 하길래 신통한 술법이라도 사용하나 싶었는데. 지식도 없고 뒷배도 없이 이 복마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생각이냐?”
“어차피 이제 곧 두 분 차례 아닙니까. 황궁의 의원들은 전부 치료를 하러 가게 되었으니… 두 분의 치료 비결을 제가 미리 시험한다면, 두 분에게는 크나큰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차 의원은 퉁퉁한 검지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니가 내게서 배운 의술을 사용했다고 하면 나까지 순식간에 물려 들어가. 널 어떻게 믿고?”
결국 신뢰의 문제다. 소희가 입술을 뗐다.
“제가 팔황자를 치료한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미쳤어?’
시우가 비명소리를 냈다. 소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 생명줄을 쥐고 계시면 되겠지요.”
“됐어! 황족의 비밀 같은건 알고 싶지 않다!”
기분나빠하며 차 의원이 호통을 쳤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치료의 목적이 아닌데 황족의 정보를 누설할 셈인가!”
“아니오, 혹여 제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팔황자의 치료를 맡아 계속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치료의 비방을 교환하는 것이지 황자의 상태를 누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결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나쁘지 않군….”
“정말로 그 비결을 알려줄 건가?!”
지식욕에 휩싸인 차 의원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소희가 빙긋 웃었다.
“저도 제 생명은 소중하니 아기님의 병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려주세요.”
저녁시간때가 한참 지나서 약고에서 나왔다. 두 의원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흙으로 무릎께가 더러워진 옷을 시녀가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녀도 누구도 없이 혼자 숙소에 남았을 때 비로소 기다리던 것이 왔다.
‘고작해야 삼급, 이급 의원 나부랭이인데. 정말로 저것들한테 약재를 배우려고 하는 거야?’
담담하게 말하던 시우는 점차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디기탈리스가 독이 아니라 약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애들인데! 들한테 도대체 뭘 배우려고. 내 실력이면 벌써 태의 급의 금패를 받고도 남는다. 차라리 나한테 배워!’
“언니.”
소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구리거울 저편에 제 얼굴의 표정은 비추지 않았다. 그저 그림자만 비출 뿐이다. 시우는 물론이고 소희 자신도 제 얼굴 표정을 볼 수 없다.
“언니는 한의사가 아니라서 이런 건 잘 모른다면서요.”
하지만 아마도 그 얼굴은 불쾌하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깨진 신뢰처럼.
“태의급 금패를 받을 정도로 한의학, 아니 중의학을 잘 아시면서. 왜 거짓말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