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꿈을 꾸었는데 흑노가 굉장히 차갑게 굴었다. 그래도 시우와 화해해서 기분이 좋았다. 소희는 이대로라면 여행도 할만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아침 같지도 않은 아침을 꾸역꾸역 억지로 먹고 나서 다시 말에 실리니 토할 것 같았다. 어제 말을 너무 오래 타서 그런지 다리 전체가 얼얼하고 뻐근해서 너무 괴로웠다.
흑노는 한 팔로 소희를 들어 말에 올려놓았다.
‘힘은 엄청 세네.’
- 뭐지? 뭔가 틀린데.
올려놓는데도 태도가 다르다. 공주님 안기 스타일로 안아 올려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말 닿기 싫다는 것처럼 거리를 두었다. 소희는 민감하게 그 태도의 변화를 느꼈다.
-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소희는 애써 허리를 꼿꼿이 폈다. 허벅지에는 힘을 주었다. 조금 있으면 힘이 풀려 무너질 것을 알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한다.
말에 탔는데도 뒤로 약간 더 물러나는 것이 마치 초기에 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소희는 확신했다. 흑노의 태도가 바뀌었다.
-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유치원생이야? 한 명하고 좀 나아지면 다른 한 명이 토라져?
텔러 사무실에서 일했을 때의 일이다.
윤희가 퇴사한 후 홍희언니는 소희에게도 살갑게 굴었다. 하지만 소희가 곁을 내주지 않자 곧 신입인 수연언니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수연언니는 아이가 둘이 있고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였는데 의외로 홍희 언니와 죽이 맞아 잘 지냈다.
수연언니는 나이가 있는데도 일 배우는 것이 빠르고 품이 너그러워 사무실에 인기가 있었다. 열살만 젊었어도 금방 팀장급으로 승진했을 거라고들 했다. 소희는 사실 지금 나이라도 수연언니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 명진언니가 입사했다.
젊고 예쁜 명진언니는 텔러사무실에서 보기 드물게 싹싹하고 인내심이 넘쳤다. 보통 사무실에서 여덟시간쯤 일하고 나면 다들 안녕히 가세요 한 마디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녹초가 된다. 그런데 명진언니는 퇴근할 때도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멘탈이 튼튼했다.
그리고 제2차 텔러전쟁이 벌어졌다.
그 발단은 사소했다. 점심 시간에 항상 마주앉아 식사하는 것은 홍희언니와 수연언니였다. 홍희 언니가 마무리하고 내려올 때까지 수연언니는 항상 맞은편에 자리가 있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어느 월요일, 홍희언니가 내려왔는데 수연언니와 명진언니가 마주않은 것을 발견했다.
수연언니와 명진언니가 가까워지면서 홍희언니가 뒤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홍희언니는 화내거나 소리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 산뜻하게 웃었다.
“어머, 어머. 언니, 명진이랑 이렇게 친할지 몰랐어. 보기좋다.”
홍희언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식판을 들고 그 자리를 떠나서 소희 앞에 앉았다. 소희는 식사하는 내내 눈치를 보았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홍희언니는 수연언니와 명진언니에게만 화난 것이 아니었다. 소희에게도 화가 났다. 내가 체면을 잃기 전에 미리 문자 정도는 넣어줄 수 있는거 아니니? 소희는 그 이야기를 아주 나중에, 홍희 언니가 퇴사하기 직전에 들었다.
- 도대체 내가 왜…?
우습게도 홍희언니는 과묵하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소희를, 나름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정작 소희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도. 멋대로 기대하고 혼자 실망해버렸지.
그런데!! 지금!! 흑노에게서 그 언니의 느낌이 난다.
- 니가 뭘 잘못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알아서 기어, 하는 것 같은데.
‘너 밤에 코골았니? 쟤 좀 화난 거 같지 않아?’
소희는 시우만 느낄 수 있게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우의 태도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 마치 두 사람이 서로를 경계하는 것 같은데…?
시우와 흑노는 서로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거지.
지금 내 인생에 말하는 사람이 둘밖에 없는데 이 둘하고 사이 좋게 지낼 수 없어?
가슴을 치면서 말하고 싶다. 아,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소희는 말에 그대로 실려갔다.
여행 내내 침묵이 내리앉았다.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흑노도 묻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되어 육포와 물주머니를 디밀어줄때에야 아, 얘가 내가 앞에 있는 건 알고 있구나 싶었다. 계속 무시당하는 것은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로 화를 낼 이유는 없다. 소희는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거리며 허벅지에 힘을 주는 데에만 집중했다.
해가 져가는데 점점더 인가가 드물어졌다. 제대로 길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여관이 없어요?”
“열흘간 노숙이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고문이다. 소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흑노는 소희를 업고서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등에 메고 있던 천을 펼쳐 마치 도롱이처럼 소희를 둘둘 감고서 나무 위에 매달아 놓았다. 해먹과 비슷한 것이 의외로 푹신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밤중에 혼자 내려가거나 화장실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누가 내려주기 전에는 절대 혼자 못 내려간다.
소희는 큰맘먹고 물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막 나무에서 내려가려던 흑노는 지그시 소희를 응시했다. 매미처럼 고목나무에 딱 달라붙은 것이 자연스럽다. 한두 번 이렇게 노숙해 본 것이 아닌가 보다.
- 그럼, 오히려 어제는 나 때문에 일부러 여관에서 묵었나?
하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다. 소희는 눈을 크게 떴다. 흑노의 시선이 마치 자신을 훑어보며 살피는 것 같았다. 염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는 태도라기보다 점수를 매기는 것에 가까운…?
소희는 결국 엉뚱한 것을 물었다.
“저기, 그럼 밤에 화장실엔 어떻게 가요?”
“…날 깨워라.”
흑노는 맞은편 나뭇가지에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 세상에! 어떻게 저런데에 사람이 앉을 수가 있지? -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소희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딜 갈 것도 아닌데 사람을 이렇게 매달아 놓다니….’
시우가 투덜거리는 데 기분이 이상했다. 시우가 어디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투덜거리지? 그렇게 나에게 공감해 주는 언니가 아니었는데?
소희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소희가 잠든 밤 내내 흑노는 소희를 지켜보았다. 태연해 보이는 저 몸 속에 도대체 인격을 몇 개나 숨기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 멀리 있는 자에게 조종당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밤마다 저러는건가.
- 귀신이 들렸나?
그는 주머니에 쓸어 담은 하얀 가루를 검지에 찍어 보았다. 어젯밤 여자를 따라나가서 여자가 흘린 가루를 전부 수거해 오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무공이 없는 여자가 계단을 올라오기 전에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올 정도의 시간 여유는 있었다.
서안에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보름. 말을 버리고 경공만으로 질주하면 열흘로 단축할 수 있다. 아끼는 말은 마사에 맡기면 며칠 내로 궁에 데려올 것이다.
밤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것이 가증스럽다. 여자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흑노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밤동안의 외출이 들켰는데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는다.
- 설마 모르는 건가.
흑노는 몽유병 환자를 본 적이 있었다. 황제의 후궁에 든 비빈 중 집을 그리워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밤마다 잠옷을 입고 내원을 헤매며 돌아다니고는 했다. 하지만 목적 없이 방황하는 거지 어젯밤의 소희처럼 뚜렷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는 여행 경로를 다시 계산했다. 잠과 식사를 최대한 줄이고 팔 일, 황후궁에 도착하면 된다.
- 이 여자를 어서 의원에게 보여야겠다.
수상쩍은 여자니까 태의가 살펴봐주어야 한다.
그럼 저것이 병인지 저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
아침이 왔다. 흑노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소희는 조금 안심했다. 일행 중 유일한 무력 겸 현지인 가이드를 맡고 있는 저 남자가 어제처럼 계속 가시를 세워대면 불안하다.
“조금 더 빨리 가야겠다.”
‘여태까지도 충분히 빨리 가고 있었다고!’
시우가 비명을 질렀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희는 왜 흑노가 빨리 가고 싶은지 너무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 침대에서 자고 싶겠지. 하루라도 빨리.
창비원의 편안한 잠자리와 따뜻한 벽, 삼시 세끼 나오는 식사에 익숙해져 있다. 소희는 이제 황궁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리웠다. 자는 동안 개미가 얼굴을 기어다니는 이런 노숙 같은 건 어서 그만두고 싶다.
“빨리 가요, 빨리.”
‘서두를 이유가 대체 뭐야?!’
시우가 짜증을 냈다. 소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다. 이 언니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언니가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닌데. 그냥 황궁에 빨리 간다는 건데….
- 시우 언니는 황궁에 가는 걸 처음부터 반대했지….
도씨 세가에 가자고 했다. 지금 마음대로 안되서 토라진 건가? 하지만 말을 걸 수도 없다. 저 남자의 청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은 건 익히 알고 있으니까.
시우를 위로할 수도 없고 따져물을 수도 없다. 마치 일방적인 라디오와 다를 게 없다.
생각에 잠긴 소희를 흑노가 번쩍 들어올렸다. 말 앞에 앉히고 자신도 올라탔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제나 그저께와 속도가 달랐다. 말 그대로 전력질주다.
“꽉 잡도록.”
한손으로는 소희의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붙잡고 있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 낮은 테너, 아니, 바리톤인가, 그 목소리가 섹시했다.
소희는 움찔 몸을 떨었다.
“떠는 게 아니라 붙잡으라고.”
이번의 목소리는 뺨에 닿았다. 낮고 지긋한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 아니다. 이런 사치스러운 감정을 가질 때가 아닌데. 처음 만났을 때 죽임이 어쩌고 했던 이 남자다.
결혼 말이 나왔을 때 딱 잘라 거절하던 남자다. 소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착하게 손을 뻗어 말의 목을 안았다. 뺨에 스치는 갈색 갈기에서 밀짚 냄새가 났다.
**
한나절 내내 달려서 마사에 도착했다. 흑노는 마사에 말을 맡기고 여관에 들렀다. 여관에서 자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급하게 소면을 먹고 육포를 사더니 바로 출발했다.
“여기서 자는 게 아니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소희가 묻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소희를 안아들었다. 어젯밤 번데기처럼 돌돌 감던 때와는 또 미묘하게 태도가 다르다.
양팔로 소희를 안아들고 날아오르듯 뛰어가는데 그 속도가 말보다 훨씬 빨랐다. 눈에 닿는 바람이 너무 세서 소희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움츠리고 꼭 안겨서 그대로, 쉴 새 없이 달렸다.
‘답설무흔? 이 정도의 경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고작 황자 호위를 하고 있단 말이야?’
시우가 종알거리는 소리도 들릴락말락했다. 귓가에 들리는 바람이 워낙 거센 탓이다. 소희는 피식 웃었다. 이 정도의 경공을 할 수 있으니까 황자 호위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며칠이나 했을까.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았는데 나중에는 지겹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질렸다.
소희는 이제 안기는 사람이 온힘을 다해 허리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습득했다. 어딘가에서 공주님 안기 대회라도 열린다면 잘 매달리기 1위는 무리더라도 2위는 할 자신이 있다.
“내일이면 서안에 도착한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