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가상의 왕이 등장하는 픽션소설임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다소 차이가 있답니다.
【태양이 된 달 – 왕이 된 여자】
제11화 : 은빛 비 - 은우(銀雨)
-- 어쩌면 오늘 밤엔... 나의 마음이 은빛 빗속을 헤매게 될지도 모르겠소!
"들어가도 되옵니까? 오라버니. 은우이옵니다. 다과상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은우야"
은우가 연잎모양의 소반을 조심스레 들고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정갈하게 차린 다과가 놓여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은우는 보기보다 매우 육감적이어서 감탄을 자아내는 자태였다.
보통의 여인들보다는 조금 더 키가 크고
동그랗고 복스러운 얼굴에 야무진 눈매를 가지고 있는 은우
조심조심 다과상을 내려놓는 은우는 이런 일을 별로 안 해 본 듯이 자세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세자 현은 그런 은우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강호 스승님의 여동생이십니까?
이 아름다운 여인은?“
은우를 전체적으로 쓰윽 훝어보던 현이 은우의 가슴쪽으로 향한 눈빛을 급히 거두고서 강호에게 물었다.
세자의 제갈공명이 되겠다고 약속을 하자마자 신하인 자신에게 바로 스승님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세자를 강호는 기쁜 눈빛을 숨기고 바라보았다.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젊은 세자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자신의 사람들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겠지
자신의 젊은 조선을 만들기 위하여...
분명
“이 아름다운 여인은?”이라고 물었다.
은우는 자신을 아름다운 여인이라 칭하는
오늘은 자주빛 도포를 멋지게 차려 입은 현의 말에
심장이 또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나대지마! 나대지 말라고... 심장아... 제발
저 분 귀에 내 심장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은우는 조심스럽게 소반을 내려놓고 다소곳하게 옆으로 물러앉았다.
은우의 볼이 금방 복숭아빛으로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매우 다소곳하구나... 동생아!
평소에는 전혀 안하던 다과상도 차려오고... 큭 큭 큭"
강호는 슬슬 장난기가 올라 다시 은우를 놀려댔다.
강호의 말에 은우는 화들짝 놀라며 맞은 자리에 앉은 현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리고 강호에게 그런 말 하지말라는 신호로 엄지손가락을 쫙 펴서 입술에 갖다댔다. 은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 모습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강호는 은우의 신호 따위는 짐짓 모른척 하며 무시하였다.
은우는 그런 강호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으~~~ 강호 오라버니!!!'
강호는 은우의 속마음을 다 안다는 듯 웃으며 현에게 은우를 소개하였다.
"아... 소개가 늦었사옵니다.
저의 고종사촌 동생 기은우입니다.
자... 은우야... 인사 드리거라!
푸른 도포의 사나이가 바로 이분 세자 저하시다!“
"푸른 도포의 사나이? 그것이 나란 말인가?"
세자가 재밌다는 듯이 강호에게 반문하였다.
'으이그... 결국? 푸른 도포의 사나이란 말을 발설하시다니...
강호 오라버니! 각오하십시오! 복수는 나의 것!~~~'
그런데... 네?...'
"이 선비님께서 세자저하시라고요? 설마...?“
은우의 눈이 동그랗게 휘둥그레졌다.
세 자 저 하? 거짓말이시죠? 또 농담하시는 거죠? 강호 오라버니?
은우는 강호쪽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 하기엔, 장난이라 하기엔
아까의 장난기를 거둬버린 조강호의 눈빛이 너무나 진중하여
은우는 일단
세자저하께 큰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인사드리옵니다. 세자저하...
예조판서 기성룡대감의 여식 기은우라 하옵니다.“
세자저하란 말에 당황하여 큰 절을 올리는 은우를
현은 귀여운 듯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은우... 은빛 비라...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한번 듣는다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이름"
세자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은빛 비를 이야기하자
은우의 마음 깊은 곳은 설레임으로 차올랐다.
은우가 17해를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이 두근거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자 저하"
은우는 당황하여 갑자기 일어서서 다시 큰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괜찮소... 은우 처자! 편히 앉으시오...
그리 당황하지 않아도 되오!
나는 오늘 그대의 오라버니 조강호 영감의 제자로 이 자리에 있는 거라오. 아니 그렇습니까? 스승님?"
현은 연거푸 절을 올리는 은우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
은우의 두 눈을 쳐다보며 다정스레 말하였다.
여인을 다루는 손길에 다정함이 뚝 뚝 묻어나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강호가 다시 농담을 던졌다.
“하... 세자저하께선 여인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손길, 다정한 눈빛! 그런 삼단 조합이면 여인들이 다 쓰러지겠습니다.”
"그러한가? 내 여러 여인을 쓰러뜨리고 싶지 않다. 사내 대장부에게 여인이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다시 은우를 쳐다보는 현
은우는 계속해서 자신을 빤히 보는 세자의 눈길에 얼굴이 달아올라 조용히 물었다.
"어찌 그리 빤히 보십니까?"
“내 품에 두 번씩이나 가득 안았는데도...
몰랐습니다. 이리 고우신 분인줄은...
도대체 누구가 그대를 신부로 데려갈 줄 모르겠으나
그 사내... 진정 부럽군요...
어쩌면 오늘 밤엔... 나의 마음이 은빛 빗속을 헤매게 될지도 모르겠소“
세자는 따뜻한 눈빛으로 은우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은우의 볼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고 귀까지 빨갛게 변해갔다.
강호는 여인에게 수작을 부리는 듯한 현과 그런 현에게 완전히 빠진 듯한 은우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다과상의 한과를 집어 먹고 있었다.
"흠... 지금 손과 발이 오그러드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 뿐인가? 자네는 아니 그렇나? 무영?"
강호는 무영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영은 오직 세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 세자의 따뜻한 눈빛이 쓸쓸한 눈빛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무영만이 알아차리고 계속해서 세자를 바라보았다.
무영은 늘 세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마치 그의 이름을 지어준 세자 현의 바램처럼
그림자 영(影)
세자의 그림자처럼...
강호는 또다시 그런 무영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럼... 강호 스승님께서는 내일 비현각으로 드시지요!
공부하고 있는 병법서에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요즘은 병법서를 공부하시는군요...
그럼, 내일은 부국강병 중 강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네요. 세자저하!"
"예... 그럼,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스승님!"
현은 강호에게 스승님이라며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우는 현의 모습을 조용히 뒤쫒고 있었다.
조강호의 사가를 나온 현은 자신을 뒤따르던 무영을 돌아보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무영... 아까 기은우 처자 바라볼 때 아주 넋을 놓았더군!
처자가 복스러운 얼굴과는 다르게 몸매가 상당히 육감적이긴 했어!
그렇다고 세자익위사이신 좌익위께서 영혼이 가출한 표정을 지으면 아니 되는 것이 아닌가 무영좌익위?"
무영은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말씀이시옵니까?
절대로 아니지 말입니다.
저는 여자를 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무영이옵니다.
세자저하께서 잘못 보신걸로 사료되옵니다만...
은우 처자의 가슴쪽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신 분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세자저하셨습니다."
"어허~ 내가? 나로 말할것 같으면 품위가 온 몸에 철철 흘러넘쳐서 <이품위>라고 불리우는 세자니라...
여인의 가슴을 훔쳐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네...!"
"예. 그러시겠지요. 은우처자 가슴 바라보다가 강호영감한테 들킬까봐 급하게 눈길을 돌리시던 것을 제가 똑똑히 본 것은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 이 품위 세자 저하!"
"흠... 무영 자네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네."
세자는 슬그머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훗~ 역시 빨리 인정하시는 것은 조선최고시지...‘
"그런데... 예조판서 기성용의 여식이면 괜찮지 않으십니까? 저하.
기성용 대감의 평판이 나쁘지 않다 들었습니다.“
"글쎄... 예조판서의 여식도 세자빈의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는 들었다.
그래서 오늘 기은우를 찬찬히 살핀 것이지... 예쁘고 참한 처녀구나! 물론 기성용대감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결정하여야 할 문제지만... 너도 알다시피 세자빈의 간택은 굉장히 정치적인 선택이니깐.“
세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런 세자 곁을 무영이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세자빈 간택의 이야기는 벌써 몇 년 전부터 공론화 된 문제였지만
어인 일인지 왕은 그 일을 미루고 있었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는 문제이지...
세자는 어떤 선택을 하실지...
“이제 그만 돌아가자. 무영!”
잠시동안 생각을 정리한 현을 무영을 바라보았다.
영민하고 깊은 눈동자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무영은 읽을 수 있었다.
"예. 저하. 따르겠습니다.“
무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빛깔이 아주 고운 자줏빛 도포를 유려하게 차려 입은 세자와 무사 무영이 함께 말을 달려 궁을 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아주 부드러운 봄의 끝자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