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이 많았다... 아가야.”
춘화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손.
춘화의 눈앞에 쏟아지던 빛이 점점 사그라지고 드디어 따뜻한 손의 주인공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녀 (仙女).
말 그대로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믿을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가진 여인.
가만히 있어도 풍겨져 나오는 품위와 신비로움은 보는 이를 하여금 숨을 멎게 만들었다.
춘화 역시 선녀의 등장에, 그리고 자신을 ‘아가’라고 부르는 것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지금 저에게 아가라고 하신 겁니까? 저를... 아십니까?”
“알다 뿐이겠느냐? 너는...”
선녀는 춘화를 잡은 두 손에 좀 더 힘을 주면서 확신해 찬 눈빛으로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은은하고 우아한 꽃향기가 물씬 풍겨져 왔다.
“내 아들의 정인이지 않느냐?”
“...!”
*
“해랑 너... 요즘 진짜 미친 놈 같아.”
놈이는 그대로 풀섶에 주저앉아 있는 해랑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덤의 주인...이라 예상되는 세령인가 뭔가하는 사람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고 하질 않나,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그 기녀의 이름을 부르질 않나.
놈이는 모든 것이 그 요상한 기녀로부터 시작되어 자꾸만 일이 꼬인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친놈이라... 그래, 나도 내가 미친 것 같구나. 그것도 단단히.”
“알면 됐다...라고 말이라도 했음 좋겠는데. 이미 넌 그걸 넘어선 것 같다.”
“...”
해랑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것에 관련된 모든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게다가 그 일에 휘말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답지 않는 모습을 해랑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나를 잃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춘화 그녀만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 건... 정말 미친것일 테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해랑은 이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들어왔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춘화가... 그녀가 울면 해랑의 가슴이 아팠다.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산산이 부서질 듯, 갈기갈기 찢어질 듯 아파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어도, 설사 그녀가 책 속에서 튀어나온 요괴일지라도 상관없었다.
해랑은 미친놈처럼 춘화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인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몸에 이상이 올 정도였는데.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은애하는 마음인가.’
해랑은 은애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한 번도 은애하는 정인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을 서방님이라고 불렀다가도 갑자기 돌변하여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 춘화.
그녀를 만났기에 해랑은 이제 은애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마음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은 해랑 자신 조차 잊고 있지만.
“해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정말 여기서 밤이라도 샐 셈이야?”
놈이는 해랑이 걱정되어 죽을 지경인데 이 무심한 도련님은 아까부터 돌부처 마냥 무덤 곁에 앉아 움직이질 않았다.
“여긴 아무것도 없고... 게다가 그 요망한 기녀도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여기에 있다. 분명.”
“뭐가? 설마 그 기녀?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 둘이랑 저 섬뜩한 무덤만 있는데!”
해랑은 놈이의 불평에 대답 대신 두 눈을 스르륵 감았다.
반듯하게 가부좌를 튼 자세로 무덤 옆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해랑의 모습에 놈이는 기가 찰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그 요망한 기녀가 있다는 건지?
“이러지 말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자, 해랑. 지금 집안 어른들도 다 출타중이시고. 무엇보다 해연아씨 혼자 집에 계시는데...”
“...놈아.”
“응?”
“사실... 나는 네 마음을 그동안 모른 척해왔다. 그건 아마도 은애하는 마음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
“어디에 있어도 그 사람의 안위가 걱정되는 그 마음을 내 이제야 알 것 같다.”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흔히들 그런 마음을 은애하는 마음이라 하지... 바로 네가 해연을 은애하는 것처럼.”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놈이를 보며 해랑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놈아... 이제 숨기지 않아도 된다. 내 이제 네 마음을 잘 알겠단 말이다.”
해랑은 말갛게 더욱 깊어진 눈빛으로 놈이를 아니, 놈이 뒤에 있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해랑은 허공에 무언가를 계속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늘 함께 하고 싶은 그 마음.”
*
“지금 아들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선녀님은 서방님의...?”
“... 못난 에미지. 아들을 위험에서도 구해내지 못하는.”
“네? 위험이라 하시면...?”
“천무의 말대로... 기억을 다 잃었나보구나. 그래... 그 분이 일을 대충대충 하실 분이 아니지. 아가야. 나는 네가 너무나 가엾구나.”
선녀는 손을 들어 춘화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더니 이내 눈물을 보였다.
우는 모습조차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이 선녀가 서방님의 어머니...
하지만 그녀는 이 선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그것은 춘화야사속에 갇히기 전이나 후나 단 한 번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소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번도 선녀님을 뵌 적이 없는...”
“정말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느냐?”
선녀는 춘화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춘화는 아까 천무의 눈동자에서 빛을 보았던 것처럼 선녀의 눈동자에서도 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빛에 또다시 끌려가는 춘화.
그 빛의 끝에는 춘화가 춘화야사에 갇히기 전. 서방님과 함께 장경각에 왔을 때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불타 버려 기둥만 남은 장경각의 모습.
‘또다시 환영인가?’
춘화의 눈앞에 장경각 배흘림기둥을 더듬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서방님.
‘애시영항적(愛是永恒的)? 그 글귀를 다시 찾으려는 건가?’
이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환영 속 춘화와 해랑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모습이 확실히 환영 밖에 춘화의 눈 안에 들어왔다.
‘글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야! 저건...!’
환영 속 춘화는 작은 칼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기둥에 힘겹게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이를 담담하게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해랑이 춘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
환영 속 해랑 역시 춘화가 칼로 새기고 있는 것을 이제야 보았는지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낭자 이것은...!”
“애시영항적(愛是永恒的). 사랑은 항상 함께 하는 것...영원토록.”
환영 속 춘화는 꽉 쥐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대신 해랑의 손을 잡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지만... 이제 이것은 끝내 어머님의 비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환영 속 춘화는 고개를 돌려 불타버린 기둥 옆 무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는 환영 밖 춘화도 마찬가지.
“비문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던 사랑을 하셨던 어머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진정 이 글귀는...어머님의 글입니다.”
“낭자...”
“어머님의 뜻을, 어머님의 사랑을 잊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어머님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맞다고... 소녀 감히 생각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
춘화는 해랑의 손을 잡은 채로 자신이 새긴 글귀로 그들의 손끝을 대었다. 해랑은 손 끝에 전달되는 그 글귀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세령...”
‘세령...’
환영 밖 춘화 역시 그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읊조렸다.
그 순간 환영이 갑자기 사라지고 암흑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암흑 속에서 또다시 펼쳐지는 빛의 향연.
“그래... 그것이 내 이름이다. 세령.”
그 빛 속에서 선녀가 춘화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깊은 슬픔을 한 아름 안은 채로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선녀...세령.
춘화는 세령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기억의 조각하나가 머릿속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랑의 어머니이자 춘화에게도 어머니나 다름 없었던 그 분.
춘화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금세 눈물이 고여 후두둑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세령의 손 위로 떨어졌다.
“어머님...”
“그때 네가 새겨 주었던 내 이름... 고맙구나. 네 덕분에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내 사랑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가 새겨졌으니.”
“어머님...”
춘화는 세령의 손을 잡은 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가여운 어머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기꺼이 다 잃어버리는 것을 택하신 분.
춘화 그녀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고귀한 그 분.
세령은 울고 있는 춘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너와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지만...이 결계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이다. 꼭...들어줘야 할 부탁이다.”
이때 춘화와 세령을 둘러싸고 있던 공간 어딘가에서 천천히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새하얀 빛의 구슬 같았던 공간에 틈새가 생기더니 그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져 나왔다.
“들켰나 보구나... 역시 주도면밀한 분.”
“네?”
“아주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천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아무튼 아가...”
세령은 이내 춘화의 두 팔을 부여잡고선 꽉 힘을 주었다. 가냘픈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간절한 손의 힘.
“밖에 나가면 해랑에게 꼭...”
세령은 춘화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춘화의 눈이 점점 커지면서 다시 새하얀 빛줄기가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님...!"
"꼭 해랑에게...!"
세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얀 암전이 그대로 춘화의 몸을 집어 삼켜버렸다.
세령은 혼자 그곳에 남아 춘화가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직 춘화가 잘해주기를 바랄 뿐.
이때 세령의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는 천무.
“이제 가셔야 합니다.”
천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금씩 가던 금들이 속도를 내며 점점 더 커졌다. 이내 세령과 천무가 있는 공간을 부셔버릴 듯 파고드는 푸른 빛.
“그래... 떠나야겠구나. 그 분이 오시기 전에.”
-파삭
얇은 유리막이 깨지듯 부서지는 조각들이 세령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공기처럼 투명하게 사라지는 세령과 천무.
그 뒤로 한 발 늦은 푸른빛의 암전.
*
“자, 이거 받아.”
놈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윗옷을 벗어 해랑에게 건네주었다.
“숲이라 이슬이 차다...이거라도 덮고 기다리든지.”
“괜찮다. 너야말로 이 차가운 밤공기에 옷을 벗으면 어찌 하느냐.”
“연해랑! 그냥 좀 덮어라. 아까 너 식은땀까지 쫙 흘려서 옷 다 젖었잖아!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래?”
자신의 옷을 해랑에게 덮어주려는 놈이와 다시 옷을 입혀주려는 해랑.
아웅다웅하는 둘 사이에는 아까 해연의 이야기를 했을 때의 어색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놈아, 이제 그만하자. 왜 자꾸 안 덮는다는 걸 억지로...”
“이게 네가 말한 은애하는(?) 마음 중 하나다! 됐냐?”
“뭐?”
“넌 아직 은애하는 마음이 뭔지 몰라. 그런 마음이 뭐 남녀 사이에만 있는 줄 알아?”
놈이의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하는 해랑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사렸다.
“설마 놈이 너... 나를?”
“으이그! 이 고지식한 도련님 같으니라고. 은애하는 마음은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죽마고우 사이에서도... 하다못해 짐승한테도 생길 수 있는 거라고! ”
“그럼 내가... 짐승이란 소리냐?”
“짐승은 짐승이지... 요망한 기녀한테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짐승?”
“...!”
“뭐야? 해랑 너 내가 좀 놀렸다고 삐진 거야? 눈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 짓고?”
“그게 아니라...”
“너보고 짐승이라고 했던 것은 당연히 농이 아니... 어? 으아아악!”
호기롭게 해랑을 놀리던 놈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벗은 상체에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차가움이 놈이의 발끝까지 내려가 저릿저릿 그의 온몸을 마비시켜버렸다.
"으아아아아악! 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