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해랑의 한 말의 의미를 놈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놈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자기 손을 향해 시선을 내리떴다.
“놈아...”
다시 놈이를 부르는 해랑의 목소리.
놈이는 그제야 한참을 떨구던 있던 고개를 들어 해랑을 바라보았다. 애써 밝게 웃으려는 억지 미소였지만 놈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해랑 역시 놈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었다.
‘놈이의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마음의 싹을 잘라주는 것.’
해연은 곧 정판서 댁과 혼사가 오고 갈 예정이었다. 아마도 혼사는 올해를 넘기지 않을 터. 아직 놈이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놈이도 확실히 알아야 할 터였다.
“놈아... 해연이는 이제...”
“해랑! 그 기녀는 우선 행랑할멈의 처소에 옮겨 놨다. 그런데 행랑할멈이 내가 또 처자 하나를 후리는 줄 알고 난리를 치더라. 네가 어서 가서 할멈한테 직접 말해줘야지. 안 그럼...”
애써 해랑의 말을 막아버리는 놈이는 자신도 뭐라고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해랑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
놈이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놈아...”
“왜 이리 내 이름을 부르고 그래? 이름 닳겠다! 어서 그 요망한 기녀나 보러 가야지? 가자!”
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휘 돌려 성큼 성큼 발을 떼었다. 하지만 창가에서 해랑이 바라본 놈이는 축 쳐진 어깨에 곧 발을 헛딛어 넘어질 것 같은 불안한 모습.
‘설마...다 알고 있는 것이냐. 그런데도 해연을 아직도...’
해랑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무거운 한숨 소리는 놈이의 뒤를 따라, 달빛을 따라 어둠 속으로 흘러 갔다.
*
“이 놈의 자식이 이제는 여자를 후리다 못해 보쌈까지! 아이고...내가 제 명에 못 살지!”
행랑할멈은 찐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들고 막 부엌에서 나왔다. 좀 전에 놈이가 자신을 찾아온 상황을 다시 곰곰이 떠올리는 행랑할멈.
조금 전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던 놈이가 큰 자루를 들고 행랑할멈의 처소 방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만 해도 할멈은 오직 놈이와 해랑 도련님 걱정뿐이었다.
- 똑똑
“누구여...?”
“할멈! 안녕.”
놈이는 한 쪽 어깨에 자루를 맨 채로 행랑할멈의 방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방안 한 구석에 자루를 털썩 내려놓는 놈이.
“아이고! 지금 안녕이라는 말이 나오더냐? 어찌 몸은 성하냐? 해랑 도련님은?"
"응, 괜찮아. 근데 할멈은 해랑의 안부부터 물어봐? 내 안부가 아니라? 아...섭섭하다.“
“너야 지금 멀쩡한 건 확인 했으니께. 그나저나 겁대가리도 없이 무슨 범을 잡으러 간다고...”
“범쯤이야 식은 죽, 누워 먹는 떡이지...그나저나 이거 좀 부탁해, 할멈.”
놈이가 자루를 향해 고갯짓을 하자 행랑할멈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엥? 그 자루에 든 것이 범이냐? 근데 범 치곤 작은디? 장정들 불러 우선 가죽부터...”
“아... 이거 범은 아니고 요망한... 아! 할멈도 알겠네. 얼마 전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비? 갑자기 무슨 소리 한다냐?”
“왜, 그때 비 맞고 쓰러진 기녀...암튼 여인 기억나?”
“기억나지...그 참하게 예쁘장헌 아기씨. 근데 왜? 설마 너...!”
“응, 또 걔야.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정신을 또 잃었...아야!”
-쫘악!
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랑할멈의 두툼한 손바닥이 놈이의 등판을 강타했다. 너무 아파서 몸을 비비 꼬는 놈이.
“우씨! 할멈! 아파!”
“아파? 이 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그 때 그 여인이라면...분명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 같던데 이번에 아예 보쌈을 해 와? 감히?”
“하? 누구보고 지체 높은 여식이래! 저거는 해랑이 데리고 온 요망한 기녀...”
“이 놈의 자식이 이제는 해랑 도련님 핑계를 대? 대감마님 아시면 쫓겨나는 것은 물론 네 놈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 거라는 것을 몰려? 이 무식한 놈아! 어딜 순진한 해랑 도련님까지 걸고 넘어져! 안 되겠다. 너 같은 놈은 매가 답이여. 부지깽이가 어디 있더라.”
“아이씨! 할멈은 해랑의 실체를 몰라! 그 녀석이 보기보다 얼마나 음흉....아야!”
-쫘악.
“음흉한 건 네 놈이겠지! 우리 순진한 해랑 도련님한테 무슨 잡소리여! 네 놈이 해랑 도련님이 아껴주신다고 간이 배 밖에 튀어 나왔구나!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한 소리 더 하자. 이제 곧 해연아씨도 혼사를...”
“몰라,몰라. 안 들려, 안 들려.”
“이 썩을 놈!”
“암튼! 진짜 해랑이 저 기녀를 할멈한테 맡긴 거니까 알아서 해! 난 간다!”
할멈에게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서 후다닥 방문 밖으로 튀어나가는 놈이. 그런 놈이의 모습을 보며 행랑할멈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바짝 올라갔던 눈매가 아래로 슬그머니 쳐졌다.
“...불쌍한 것. 지 맘대로 안 되니께 마음이 허한 겨. 그러니까 자꾸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그렇게 자루만 남긴 채 놈이가 떠나자 행랑어멈은 자루에 담긴 춘화를 꺼내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처자가 깨어나면 먹을 감자를 찌러 갔던 것.
놈이 녀석은 그렇게 가고 나선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소식이 없었다.
'놈이 녀석... 또 무슨 사고나 치는 건 아닌가 몰려...'
행랑할멈은 놈이 걱정에 허리가 더 구부정해지는 것 같았다. 할멈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문고리 쪽으로 손을 뻗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으아아악!”
불이 꺼진 행랑어멈의 방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더니 문이 열린 쪽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저것이 뭐여? 헉!”
행랑할멈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그 바람에 소쿠리에 있던 찐 감자도 와르르 마루 위로 쏟아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행랑할멈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쳤다.
“사..사람 살려!”
이때 행랑할멈의 처소로 오고 있던 해랑과 몸이 탁 부딪친 할멈.
“할멈?”
“아이고 해랑 도련님! 어,,,어서 피하시어요! 놈이 너도 어서!”
“할멈 노망났어? 어찌...”
“저...저기에 저기에...”
“천천히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버...버...”
“네?”
“버...범이 나타났습니다! 해랑 도련님!”
범이라는 말에 동시에 눈빛이 확 변하는 해랑과 놈이.
*
“하...내가 기가 막혀서. 야! 지금 그게 목에 넘어가냐? 이 요망한 기녀야?”
“놈아! 기녀가 아니래도...”
“해랑, 넌 아직도 저 이상한 기...암튼 이상한 저 여인을 보고도 편이 들고 싶어? 저것 때문에 행랑할멈이 놀라서 지금 드러누웠는데.”
놈이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는 행랑할멈이 베개를 베고 누워 있고 그 옆에는 웬 호랑이 한 마리가 찐 감자를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소쿠리 채로 안고선.
누워있던 행랑할멈이 손을 뻗어 놈이의 손등을 찰싹하고 때렸다.
“할망구! 진짜!”
“말을 곱게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드냐! 그리고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것이여. 얼매나 배가 고팠으면 처자가 저렇게...”
그러고 보니 찐 감자를 먹고 있는 것은 호랑이가 아닌,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고 있는 춘화였다.
아까 할멈이 보고 놀랐던 것도 가죽을 뒤집어 쓴 춘화를 호랑이를 착각했던 것.
해랑은 열심히 찐 감자를 먹고 있는 춘화를 바라보며 마음 한 구석이 짠해서 왔다. 그리고 아까 동굴에서 호랑이가 사라졌을 때 오열했던 모습까지 겹치며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해랑 도련님... 이렇게 누추한 곳에 있으시면 안 될 분이...게다가 이렇게 쇤네가 감히 도련님 앞에 드러 누워가지고...”
행랑할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바로 만류하며 손을 내젓는 해랑.
“더 누워 계십시오. 제가 더 송구합니다. 이렇게 놀라게 해드려서.”
“아이고...도련님. 말씀 낮추십시오. 쇤네 몸 둘 바를...”
“어릴 때부터 저를 손자처럼 키워주신 분 아니십니까... 저희들끼리 있을 때라도 편하게 있으십시오.”
공손하고 예의바른 해랑의 모습에 행랑할멈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해랑 도련님이었다. 언제나 올바르고 곧으며 심성까지 고운 분...
그런데 놈이 저 녀석은 순진한 해랑 도련님을 모함하기나 하고.
“으이고 이 놈의 놈이야! 정신 좀 차리거라. 너도 해랑 도련님을 그렇게 오래 뫼셨으면 좀 본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야. 남세스럽게 웬 처자나 보쌈해 와서는 도련님 핑계나 대고! 도련님은 네 허물까지도 저렇게 다 감싸주시는데!”
“아우! 진짜! 할멈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여? 내가 저 처자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잠깐...할멈도 저 여인을 아십니까?”
“알 다뿐이겠습니까? 놈이 저 녀석이 비가 억수 같이 오던 날 쓰러진 여인을 데리고 와서 쇤네가 보살펴준 적이 있습니다. 해랑 도련님이 저 놈이한테 속고 계시는 겝니다.”
행랑할멈은 또다시 놈이의 손등을 찰싹 내리치며 혀를 찼다. 이에 발끈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놈이.
“켁...켁...”
한참 감자를 집어먹던 춘화가 목이 막히는 지 가슴팍을 팡팡 쳐가며 기침을 했다.
“처자도 참... 누가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좀 잡숴요. 아까 물을 떠 놨었는데...”
“여기.”
행랑할멈이 찾기도 전에 해랑이 먼저 물사발을 찾아서 춘화에게 건넸다. 그러자 이제껏 고개를 숙이고 감자만 먹던 춘화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해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굴에서 호랑이의 목을 껴안고 오열하던 춘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아직도 촉촉이 젖어있었다. 맑고 깨끗한 눈에 담긴 슬픔을 본 해랑은 또다시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져 왔다. 다시 한 번 물사발을 건네는 해랑.
“...천천히 물도 마시면서 드십시오.”
그러자 춘화가 해랑이 준 물사발을 말없이 받았다. 하지만 마시진 않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물사발만 응시하고 있는 그녀.
이를 보고 있던 놈이가 옆에서 한 마디를 거들었다.
“야! 넌 사람 성의를 무시하냐? 왜 안 마시고 난리야?”
“아이고, 놈이 너는 입 좀 다물어라. 너 땜에 처자가 더 체하겠다. 처자 이 놈 말은 신경쓰지 말고 천천히 잡숴.”
“행랑할멈은 나만 미워해! 목 막히는데 미련스럽게 물도 안 마시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놈이 네가 남 걱정도 할 줄 안다냐? 내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할멈! 할멈은 그냥 잠 좀 자! 아까 놀래서 쓰러졌던 사람 맞아? 진짜 저승길 가고 싶어서 그래? 좀 쉬라고!”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하는 행랑할멈과 놈이.
“...잠깐!”
다소 다급한 해랑의 목소리에 동시에 뒤돌아본 두 사람.
춘화가 울고 있었다...
해랑이 준 물사발을 두 손으로 들고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춘화.
그녀가 흘린 눈물이 사발 속 물 위에 동그랗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해랑 뿐만 아니라 행랑할멈과 놈이 역시 깜짝 놀라 춘화를 바라보았다.
“야, 기녀... 왜 울고 난리야? 우리가 뭐라 했다고...”
“거 봐라. 놈이 내 녀석이 뭐라고 하니까 처자가... 먹을 땐 개도 안 건들이는 법인디! 암튼 처자...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디 그렇게 울지 말고 맴을 좀 다독여야제. 마음 허한 건 아무리 뭘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여.“
행랑할멈이 어느새 춘화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폭풍 눈물을 쏟아내는 춘화.
“할멈이 때리니까 울잖아!”
“뭐여? 내가 언제 때려?”
“내가 맞아봐서 알아! 얼마나 아픈지...할멈 손은 여인네 손이 아니라고!”
"그럼 내가 사내냐? 이놈의 자슥을 내 기냥!"
따뜻함.
춘화는 참으로 오랜만에...아니 책에서 나온 이후로는 처음으로 따뜻한 마음들을 느꼈다.
책 속에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춘화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외로움이었다.
책에서 나갈 수 있는 지 없는 지 기약도 없는 시간은 흘러만 가고 그 속에 춘화는 외로움과 고독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제는 그 상처도 단단하게 봉인되어 괜찮은 줄만 알았는데. 처음 보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할멈과 생각 없어 보이는 놈이까지도 그녀에게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서방님.
춘화는 해랑이 다정하게 건넨 물사발 하나에 그 동안 애써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던 마음을 놓아버렸다. 사실 그 캄캄한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도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서방님.
춘화는 해랑을 ‘서방님’이라고 부르고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외로움과 고독과 두려움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이제는 절대 떠나지 마시라고. 영원히 자신의 품에 있어달라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춘화는 두 손으로 들고 있었던 물사발을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해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달라진 춘화의 태도에 놀란 해랑.
“낭..낭자?”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해랑 도련님.”
“네? 무엇을...?”
“기억이 났습니다.”
춘화는 두 손을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려놓고는 부드러운 자태로 다시 자리를 고쳐 앉아 해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춘화야사...그리고 소녀가 누군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