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야...”
춘화는 거의 기다시피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호랑이를 향해 다가갔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춘화. 그녀의 얼굴에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춘화는 호랑이의 목을 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왜...왜 이래? 나는 저 호랑이한테 손 하나 까닥 안 했...”
놈이는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달라는 눈빛으로 해랑을 뒤돌아 보았다.
“해랑? 너는 또 왜?!”
해랑 역시 촉촉이 젖은 흐릿한 눈으로 춘화와 호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바로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해랑은 저 스스로 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저려왔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호랑이를 껴안고 오열하는 춘화와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슬퍼하고 있는 해랑. 그 사이에서 놈이는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다들 왜 그래? 저 범이 우릴 해치려고 했다는 걸 잊은 거야? 그리고 기녀! 그 호랑이... 알아?”
놈이가 날카롭게 춘화를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호랑이의 목을 껴안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이때 미세하게 꿈틀대는 호랑이의 목덜미.
“...호야?”
춘화는 서둘러 호랑이에게서 제 몸을 떼어냈다. 호랑이는 춘화의 품에서 쿨럭, 각혈을 하더니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실눈을 떴다.
춘화와 눈이 마주친 호랑이는 방금 전까지 사납게 날뛰던 그 호랑이가 아니었다. 춘화가 알고 있는, 춘화를 잘 아는 무척이나 그리웠던...
“호야!”
-갸르르릉
“호야?! 정신이 드니? 괜찮아??”
“뭐야? 그 범 아직 안 죽었어? 빨리 죽여야...”
“다가오지 마!!! 이 나쁜 놈아!”
“뭐? 나쁜 놈? 이 미친 기녀가....”
“한 발짝만 움직여 봐...”
춘화는 아까 바닥에 떨어졌던 검을 들고 놈이의 코앞에 칼날을 들이댔다. 한 팔로는 여전히 호랑이를 껴안은 채로. 놈이는 꼼짝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가만 두지 않겠어.”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춘화의 눈빛이 놈이의 심장을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위험하다...이 기녀.’
춘화가 검을 들고 있어서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검을 처음 쥐어 봤는지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까닥 잘못하면 칼날이 놈이가 아닌 춘화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
춘화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이제는 투명하게 살갗이 비쳤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커다란 그녀의 눈동자에 놈이의 얼굴이 고여 있었다. 어느새 춘화만큼 놈이의 눈동자도 심하게 흔들렸다.
- 컥...
이때 다시 호랑이가 신음소리를 내자 바로 고개를 숙이는 춘화.
놈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춘화에게서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다시 춘화에게 검을 겨누는 놈이.
“요망한 기녀... 사람 홀리는 게 보통이 아니구나. 게다가 그 사나운 범까지 안다? 대체 정체가 뭐냐 넌!”
“....나쁜 놈.”
“뭐? 이게 아까부터 좋게 말로 하려니까!”
놈이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춘화와 호랑이를 항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챙강.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검.
그리고 놈이의 눈앞에 또다른 검을 들고 있는 해랑이 서 있었다.
“해랑! 네가 왜...!!!”
“...그만해라. 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님 저 기녀한테 홀린 거야? 도대체 왜 이래!”
발끈한 놈이가 바닥에 있는 검을 다시 재빨리 쥐고는 해랑에게 덤벼들었다. 이를 가볍게 막아서는 해랑.
- 챙강.
해랑과 놈이의 검이 또다시 부딪쳤다. 졸지에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게 된 두 사람은 검과 검이 맞부딪친 상황에서 한참을 대치했다.
"놈아. 검은 함부로 놀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여인에게는.”
"여인? 저 기녀한테 완전히 홀렸구만! 젠장...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만. 늦게 배운 거시기가 그렇게 좋았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 기녀가 그렇게 좋냐고? “
“...잠깐.”
“말 끊지 마! 아직 할 말이 남아...”
“범의 입에 뭔가... 있다.”
“뭐?”
해랑의 말에 놈이 뿐만 아니라 춘화 역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동시에 호랑이의 입을 보는 놈이와 춘화. 아닌 게 아니라 호랑이의 입 안에 뭔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해랑과 놈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검들을 내려놓고는 춘화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춘화는 호랑이를 껴안은 채로 뒤로 몸을 내뺐다.
이에 해랑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겁에 질린 춘화의 눈동자를 보며 가슴이 아픈 해랑.
“다..다가오지 마십시오.”
“해치지 않습니다.”
“해랑!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 범은 위험하다고!”
“...놈아.”
해랑은 뒤로 고개를 들어 놈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해랑의 눈빛에 놈이도 더 이상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춘화를 바라보며 손을 내미는 해랑.
“약조하겠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춘화는 해랑의 다정하면서도 믿음직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서방님의 모습과 틀림이 없었기에.
춘화가 허락하자 해랑은 호랑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확실히 호랑이의 입 안에 뭔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 빛은...!’
익숙한 푸른빛.
춘화야사에서 보았던 그 신비한 푸른빛이 분명했다.
호랑이의 입에 과감하게 손을 넣은 해랑은 무언가가 잡힌 듯 손을 다시 빼냈다.
“...돌?”
해랑의 손에 납작한 푸른 돌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푸른 돌이 아니었다.
푸른 한지가 돌처럼 단단하고도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펼쳐보는 해랑. 어찌나 단단하게 말려 있는지 펼쳐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잠시 후 다 펼쳐진 푸른 한지.
해랑이 두 손으로 펼쳐야 할 정도로 꽤 크기가 컸다. 해랑의 옆에서 한지를 살펴보던 놈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아니 범이 종이 뜯어 먹는 황당한 경우야?”
“...이것 때문에 아까 범이 쓰러진 것 같구나.”
“정말 그렇네? 맞아, 아까 내가 검을 쓰기도 전에 알아서 범이 쓰러지더니만 각혈을 하더라고. 그럼 이 범은 종이를 먹고 죽은 거네! 그런데 누구는 나보고 나쁜 놈이라고 하고!”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호야는 살아 있다고!”
“우리 호야? 와... 소름. 진짜 이 범을 알고 있었던 거? 너 진짜 정체가 뭐야?! 해랑... 이 기녀, 보통 기녀가 아니야. 어쩜 범보다 더 위험한 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
해랑은 대답 대신 횃불을 들고 와 불 가까이 댔다.
푸른 한지 위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문양.
“또 그 문양이다.”
“무슨 문양?”
해랑의 말에 놈이와 춘화가 다시 횃불로 모여들어 문양을 쳐다보았다.
두 개의 작은 원.
그리고 그 중 한 원을 집어삼킨 큰 원.
박고서사에서 해랑을 해치려고 했던 자객의 검이면서 지금 해랑이 손에 쥐고 있는 검...
칼날 끝의 문양이 일치했다.
해랑은 검에 새겨진 문양과 한지에 새겨진 문양을 동시에 손끝으로 더듬었다.
-슈우욱.
그 순간 갑자기 춘화의 품에 있던 호랑이가 하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호...호야!”
춘화가 뒤늦게서야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미 호랑이는 소멸, 온 데 간 데 없었다. 남은 것은 호랑이 가죽뿐이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춘화.
“낭자!!!”
해랑이 쓰러진 춘화를 안아 올렸지만 그녀는 호랑이 가죽을 꼭 부여잡은 채로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그 가죽 위로 뭔가 불룩한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해랑이 재빨리 가죽을 걷어냈다.
“춘화야사...”
호랑이 가죽 속에 서책, 춘화야사가 들어 있었다.
놈이는 갑자기 자신의 바지춤을 뒤적뒤적 뒤지기 시작했다.
“해랑....아까 내가 네 성교육 교재...그러니까 춘화야사를 바지춤에 넣었는데... 어찌하여 호랑이 몸에 있는 거지?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그 범이 춘화야사에 나왔다는 거야?”
놈이가 믿을 수 없다는 횡설수설 질문을 쏟아냈지만 해랑은 아무말 없이 그저 자신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춘화만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잠시 후. 춘화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 해랑.
“놈아...가자.”
“어딜?”
“어디 겠느냐. 당연히...”
“설마 그 기녀를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은 아니지?”
“...어서 앞장 서거라.”
*
해연은 날이 저물 때까지 오라버니가 호랑이와 함께 사라진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멀리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혹시?!’
해연은 부리나케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녀자의 품위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아버님이 아시면 경을 치시겠지만.
벌써 저녁 무렵 어둑해진 집 안.
대문으로 들어오는 사내의 형체가 해연의 눈 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
해연은 달려가 두 팔로 오라버니의 목을 감싸며 그의 품에 안겼다. 어린 시절 해연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렇게 해연이 안기면 해랑은 언제나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해..해연 아씨.”
한쪽 어깨에 자루 하나를 짊어 맨 놈이는 갑작스런 해연의 행동에 완전히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게다가 자루까지 들쳐 업고 있어 해연을 바로 떼어내지 못한 놈이.
당황한 그의 모습에는 한양 내 모든 여자를 주무르고 다니던 난봉꾼 놈이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오히려 여자라고 만나본 적도 없는,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순박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해연은 오라버니가 아니라 놈이라는 것을 알고 곧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짝!
놈이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낸 해연은 다짜고짜 그의 뺨을 때렸다. 발갛게 부어오르는 뺨에 한 손을 갖다 대는 놈이를 무섭게 노려보는 해연.
“미련한 놈! 오라버니는 어쩌고?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냐?”
해연은 놈이의 뺨을 때린 것도 모자라 불끈 주먹을 쥔 손으로 놈이의 가슴팍을 팍팍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몸의 고통이 아닌 마음의 고통.
‘아씨에게 나는 역시 아무것도 아닌 그저 종일 뿐...’
한참을 씩씩거리던 해연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런 해연의 눈물에 놈이의 눈빛이 순간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아씨, 해랑 도련님께서는 방금 처소에...”
놈이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해연은 눈물을 닦고 해랑의 처소로 뛰어갔다. 그런 해연의 뒷모습을 일자로 입술을 앙 다문 채 묵묵히 바라보는 놈이.
해연 아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오늘 하루... 왜 이렇게 기냐.”
놈이는 들고 있던 자루를 한 번 더 등으로 업으며 자신의 방으로 쓸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오라버니!”
해랑의 처소로 한달음에 달려온 해연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해랑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해랑은 다행히 다친 곳이 없어 보였고 다만 약간 피곤한 듯 힘없는 미소로 해연을 맞이했다.
"해연아."
“오라버니... 소녀를 어찌 이렇게 놀라게 하십니까? 범을 잡으러 가시다니요.”
“미안하구나. 그런데 별일이 아니었....”
해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품에 와락 안긴 해연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해연아, 울지 말거라... 나는 이렇게 괜찮지 않느냐. 그리고.”
해랑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해연을 단호히 떼어냈다.
해연은 예상치 못한 오라버니의 행동에 토끼처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제 곧 너도 누군가의 지어미가 될 것인데. 다 큰 처녀가 법도도 무시하면 되겠느냐? 너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알겠느냐?”
“너무 하십니다! 소녀가 오늘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오라버니는 모르십니다!”
냉정한 해랑의 태도에 해연은 울먹이며 해랑의 방을 뛰쳐나갔다. 그런 해연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던 해랑은 곧바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밖을 쳐다보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입을 떼는 해랑.
“...따라가지 말거라.”
그러자 창문 밖 해연의 뒤를 따라가려던 그림자 하나가 우뚝 멈춰 섰다.
“더 이상은...”
해랑의 말이 이어지자 또다시 움찔, 흔들리는 그림자. 하지만 여전히 해랑에게서 등을 돌린 채 해연이 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상처 받는 것이 싫다.”
“...”
“그리고...”
“...”
"미안하다.”
달빛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림자는 그제야 해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늘 개구진 소년 같은 표정으로 해랑을 바라보던 사내가 아니었다.
축 처진 어깨 위로 새파란 달빛이 부서져 더욱 처연한 한 사내...
놈이가 텅빈 눈으로 해랑을 바라보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