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 안쪽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검은 그림자.
“저..저건 또 뭐야! 뒤로 물러서, 해랑.”
“...놈이 너야말로 내 뒤에 서.”
해랑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놈이의 어깨를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서로의 앞에 서겠다며 다투는 사이 검은 그림자가 휙 해랑에게 달려들었다.
-챙그랑
칼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대로 그림자와 함께 쓰러지는 해랑. 그리고 그림자와 함께 마치 무언가에 빨려 들어갈 듯 빠른 속도로 동굴 안쪽으로 끌려갔다.
“해랑!!!”
설상가상 동굴 옆면에 꽂아두었던 횃불까지 확 꺼지면서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왔다. 해랑과 그림자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눈 깜짝 할 사이였다.
“해랑! 해랑!”
- 해...랑...해...랑.
놈이가 황급히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애타게 해랑을 불렀지만 놈이의 목소리만 메아리로 덩그러니 돌아왔다.
어둠 속을 더욱 과감하게 달리기 시작하는 놈이. 그러다 발밑에 뭔가에 넘어져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물컹?
“아악!”
비명소리를 보아하니 물컹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놈이는 해랑인가 싶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짚어보았다.
그런데 또다시 물컹.
이윽고 놈이의 손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꽉 박히는 듯 하더니 곧 손등에 엄청난 고통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아악! 뭐야 이건?!”
화르륵.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불이 켜지면서 놈이가 있는 곳도 흐릿하나마 빛이 들어왔다.
“놈...”
동굴 안 쪽 너머 들려오는 해랑의 목소리.
해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안쪽에 있는 횃불을 켠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동굴 안 쪽에 비상시에 횃불을 켜 둘 수 있게 해 놓았던 것이 생각난 놈이.
아마 그곳에 해랑이 쓰러져 있으리라.
“해랑? 괜찮아?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게!”
놈이는 허겁지겁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놈이의 손을 물고 있는 무언가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이 손등을 구멍낼 듯 날카로운 이빨이 더욱 더 파고들었다.
설마 그 호랑이...?
놈이는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누워, 아니 깔려 있는 것의 정체를 내려다보았다. 우선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컹한 무언가부터 확인해 보는데.
“헉.”
그것은 다름 아닌 여인의 풍만한 가슴.
그리고 그 가슴의 주인공은...
“미..친 기녀?”
눈을 꼭 감은 춘화가 놈이를 노려보며 그의 손을 더 세게 꽉 물고 있었다. 어찌나 야무지게 물었던지 놈이의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악! 피!!!”
“놈아..?”
어느새 해랑이 횃불을 들고 놈이와 춘화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동굴 벽에 힘겹게 몸을 기대 서 있던 해랑은 흐릿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형체에 두 눈을 찌푸렸다.
‘이거 해랑이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
이 미친 기녀도 기녀긴 하지만 아무튼 해랑의 여자(?)인데 자신이 손을 댔다는 걸 알면? 그것도 가슴 위에?
놈이는 서둘러 가슴 위에 올렸던 손을 뗐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의 손을 물고는 놔주지 않는 춘화.
“해랑! 오해하지 마! 내가 만지려고 만진 것이 아니고...”
놈이는 격한 몸짓을 섞어가며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빠르게 내뱉었다. 이에 해랑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게다가 들고 있던 칼자루까지 다시 잡으며 놈이에게 다가가는 해랑.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기세였다.
“오..오해라니까!”
놈이의 변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랑은 민첩하게 몸을 앞으로 내닫더니 검까지 뽑아들며 놈이에게 달려들었다. 놈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들의 우정이 고작 기녀 하나 때문에 끝이 나다니.’
“움직이지 말거라. 위험하다.”
“뭐?”
“...범이다.”
해랑은 사뿐히 놈이를 넘어서고는 그의 앞에 섰다. 해랑의 칼끝이 향한 곳은 놈이가 아닌 동굴 입구 쪽, 호랑이.
절벽으로 떨어진 줄 알았던 호랑이가 죽지 않고 거시기당까지 기어 올라와 으르렁대고 있었던 것.
“저 호랑이가 어찌...!!!”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거라.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놈이를 한 번 쳐다본 해랑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서 다시 검을 꽉 다잡았다.
“춘화...아니 그 낭자를 부탁한다.”
“낭자? 기녀가 아니고?”
놈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바로 검을 든 채로 동굴 초입 쪽으로 뛰어가는 해랑.
잠시 후 호랑이의 섬뜩한 포효소리가 동굴을 무너뜨릴 듯 울려 퍼졌다.
*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산으로 사람들을 보낸 지가 언제인데!”
한편 해랑의 여동생 해연은 자신의 처소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호랑이 소식에도 놀랐건만 그 호랑이에게 오라버니가 쫓기고 있다니.
‘하필 양친 모두 출타 중이신데...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궁에서의 급한 기별이 들어와 입궐한 아버님과 어제부터 해민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신 어머님.
해연은 당장 사람들을 산에 풀었지만 오라버니의 소식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무예에 출중한 놈이가 함께 따라갔고 그에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오라버니라는 것...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산신 호랑이가 아니던가. 두 손을 합장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해연.
‘제발 무사하셔요. 오라버니가 잘못 되시면 소녀도 세상 살 이유가 없습니다.’
해연은 어린 시절부터 해랑 오라버니 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러했다. 해연의 눈에는 어떤 사내도 눈에 차지 않았다.
해랑 오라버니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여인네들에게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인네보다 훨씬 더 곱고 섬세한 얼굴. 해연만 보고 싶은 오라버니의 해사한 미소까지. 언제나 해연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해랑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 해연을 늘 안고 키우다시피 했다. 갓난쟁이였을 때부터 해연은 밤낮 쉬지 않고 울어서 별명이 울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해랑이 안아주기만 하면 울지를 않았다. 심지어 울음을 뚝 그치고 까르르 웃기까지 했다고 한다.
‘넓고 따뜻한 오라버니의 품에 안기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어. 하지만...!’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남매간에도 엄연히 법도와 내외가 있다며 늘 해랑에게만 붙어 있는 해연에게 꾸지람을 하셨다. 이후 오라버니를 예전만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해연에게는 그것이 크나큰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해연이 참을 수 없는 것은.
‘오라버니가...나의 오라버니라는 것.’
해연은 남몰래 천지신명께 빌었다. 제발 해랑 오라버니가 진짜 오라버니가 아니길. 그것이 결코 빌어서도, 원해서도 안 되는 금단의 소원이라는 것을 해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천지신명께서 노하신 것인가.
‘천지신명이시여. 저 때문에 오라버니에게 벌을 주시는 거라면... 아니 됩니다. 차라리 저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제발 오라버니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세요.’
*
동굴 안.
해랑은 검을 들고 호랑이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고 호랑이 역시 해랑을 향해 돌진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끊어지려는 그 순간.
해랑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호랑이가 달려오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갑자기 변한 눈빛... 살기(殺氣)가 아닌 슬픔이었다.
‘뭐지? 왜 범의 눈빛이 갑자기...’
호랑이는 갑자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더니 갸르릉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해랑은 검을 들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해랑의 눈앞에 얼핏 환영하나가 스쳐지나갔다.
호랑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손.
‘저건... 나잖아?’
마치 호랑이의 머리가 해랑의 손 안에 있는 듯 부드러운 촉감이 해랑의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순간 휘청한 해랑은 동굴 벽면을 짚고 검을 다시 움켜쥐어보지만 손마디가 하얘져 금세 맥이 풀렸다.
다시 바닥에 떨어진 검.
‘어째서 내가 저 호랑이를 만지고 있는 것이지? 아무리 환영이라 하지만... 익숙해.’
해랑은 자신도 어쩌지 못한 만큼 몸이 흔들리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놈이가 바로 튀어나와 해랑을 부축했다. 그러자 호랑이도 제자리에서 도는 것을 멈추었다.
“해랑! 괜찮아?!”
“괜...괜찮으니 물러...”
- 캬아앙
다시 동굴 안에 울려 퍼지는 호랑이의 포효소리.
호랑이는 사납게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해랑에게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놓인 검을 재빠르게 들어 올린 놈이.
잠시 후 놈이 발밑으로 혀를 빼물고 축 늘어진 호랑이.
놈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호랑이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해랑의 말대로 서책에서 호랑이가 나온 것이 맞다면. 이것은 보통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일은 그의 눈앞에 호랑이 따위가 아니었다.
'문제는…저 기녀야.'
해랑 옆에 혼절하여 누워 있는 저 미친 기녀가 나타난 이후론 이상한 일만 생긴다.
"야! 기절한 척 하지 말고 일어나봐!"
놈이는 춘화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춘화.
힘겹게 눈을 뜬 춘화 앞에 동굴 벽에 기대어 있는 서방님이 보였다.
‘서방님..? 그럼 다시 서책 밖으로 나온 것인가?’
그런데 웬 우락부락한 산적 같은 사내가 서방님 옆에서 날뛰고 있었다. 얼굴까지 새빨갛게 빨개져서 춘화에게 삿대질을 하기까지.
“누구...십니까?”
“누구? 어디서 발뺌이야? 지금 이 손 안 보여?”
놈이는 춘화가 상체를 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그녀의 코앞에 손을 들이댔다. 선명한 이빨 자국에 피멍까지 들어 있었다.
“무엇에 물린 겁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
“무엇? 네가 물었잖아! 이 미친 기녀야!”
춘화는 서책에서 나오자마자 정신을 잃어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을 얼핏 그것을 물었던 것 같기도.
그럼 저 산적같은 놈이 설마...?!
얼핏 기억이 돌아온 춘화 역시 질세라 놈이를 잡아먹을 듯 째려보았다.
“물릴 만 했으니 물렸겠지요!”
“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물릴 만한 이유가 뭐? 뭐!”
“내 가슴...읍!”
춘화의 입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며 서둘러 그녀의 입을 커다란 손으로 막아버리는 놈이.
조막만한 춘화의 얼굴이 놈이의 손에 다 가려져 그녀의 매서운 눈만 보였다. 놈이의 손에서 바둥거리면서 빠져나오려는 춘화와 이를 필사적으로 막는 놈이.
“놈아 그만 하거라!”
“해랑 이 미친 기녀가 하는 이상한 소리를 믿지...”
“어서 손을 놓으라니까! 낭자가...!”
“뭐?”
놈이의 품에서 버둥거리던 춘화의 몸부림이 갑자기 잦아지더니 갑자기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친 기녀...지금 울어?”
춘화의 두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놈이가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 냈지만 여전히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해랑도, 놈이도 아니었다.
“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