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화야사 안.
‘절벽에...이런 길이 있었나? 너무 좁아서 까닥하면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아.’
한 발만 잘 못 디디면 바로 천심아래 낭떠러지. 한 사람 정도만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길 위 해랑이 먼저 앞장서고 그 뒤를 춘화가 따라갔다. 절로 오금이 덜덜 떨려왔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해랑.
“무섭소?”
“네? 네... 조금...”
“두려워 할 것 없소. 내가 그대 옆에 있으니.”
해랑은 춘화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스르륵 열게 만드는 따뜻한 햇살 같은 미소.
‘분명 서방님이 맞아. 이건 절대 꿈이...’
- ...미친 기녀!
갑자기 그녀의 귓가 뒤로 들리는 이상한 소리.
춘화가 뒤로 고개를 획 돌리자 해랑 역시 고개를 돌렸다.
“낭자?”
“혹시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리?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소.”
“아... 아닙니다. 소녀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바람소리 인 듯 희미하게 들리기 했지만 분명 '미친 기녀'라고 들렸던 것 같은데.
‘잘못 들었겠지. 그런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구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의구심만 가득 안은 채 춘화는 다시 해랑의 손을 잡고 절벽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또 다시 들리는 목소리.
- 춘화... 어디로 가는 것이오?
이 목소리는?
처음 목소리와는 다른, 춘화가 분명히 아는 목소리였다.
“서방님...?”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춘화. 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랑 역시 걸음을 멈추고 춘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낭자, 어디 몸이 불편한 것이오? 괜찮소?”
“서방님. 지금 소녀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조금 전 분명 소녀의 이름을...”
해랑은 춘화의 손목을 잡고는 자신의 가슴팍으로 조심스럽게 잡아 당겼다. 그 바람에 해랑의 품에 쏙 들어온 춘화. 콧등 위로 고스란히 쏟아지는 그의 숨결에 연신 눈을 깜박였다. 해랑은 춘화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열은 없는데.”
춘화가 해랑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해랑은 빠르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난 항상 그대의 이름을 부르오. 머리든 마음이든 몸이든... 나의 모든 곳에서.”
“어...어찌 그렇게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십니까?”
“뭐 어떻소? 춘화 그대에게는 낯부끄러운 소리, 천 번 만 번 해도 오히려 부족한 것 같소.”
“서방님도 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절벽 꼭대기에 거의 다 온 두 사람. 호야는 벌써 올라와서 갸르릉거리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야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해랑. 춘화 역시 호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목소리.
‘분명 바람을 타고 들리던....서방님의 목소리였는데.“
“호야, 이제 절벽을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용기를 내거라.”
“어흐흥...”
“걱정 말거라. 춘화낭자와 내가 계속 널 보고 있을 것이니.“
호야는 부들부들 떨며 절벽 아래를 바라보다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 쳤다. 해랑이 거의 떠밀다시피해서 벼랑 끝에는 도달했지만 도무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낭자, 큰일이오. 호야가 절벽을 내려가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어흐흥...”
“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호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호야를 달래는 해랑. 하지만 계속 호야는 내려가지 않겠다며 바둥거릴 뿐이었다.
이때 해랑 뒤에 서 있던 춘화가 앞으로 살며시 나왔다.
“서방님... 소녀가 해 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소녀가 방책이 있사옵니다. 호야를 절벽에서 내려가게 할.”
춘화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든 채로 호야 앞으로 다가섰다. 호야는 가까이 다가온 춘화를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해랑이 괴롭혀요!’ 라고 하소연하는 듯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춘화를 보는 호야.
“호야... 절벽 아래가 두렵지?”
끄덕끄덕.
“그런데 서방님은 자꾸 내려가라고만 하고?”
아까보다 더 격한 끄덕끄덕.
귀여운 호야의 모습에 춘화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일었다. 호야의 머리 위에 다정하게 손을 갖다 대는 춘화. 서방님을 다시 만나 얼떨떨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기억이 났다.
호야가 어떤 호랑이였는지도.
“그럼...호야. 내 얘기를 좀 들어볼래?”
호야의 머리를 쓰다듬던 춘화는 싱긋 웃더니 호야의 귓가에 비밀스럽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호야의 눈이 점점 커지며 이제는 아예 앞으로 튀어나올 듯 했다. 게다가 춘화의 귓속말에 연신 격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그리고 곧 해랑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호야가 뭐에 홀린 듯이 미친 듯이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한 것. 절벽 사이사이 암석을 날렵하게 짚으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호야.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지상에 가까워졌다.
“저 녀석... 도대체? 아니 그럼 그동안은 왜 저렇게 안 내려가고?”
해랑은 순간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춘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낭자,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오? 호야를 저렇게 한 방에?”
“...당근과 채찍입니다.”
“당근과 채찍?”
“채찍은 이미 서방님이 쓰셨고... 소녀는 당근을 썼습니다.”
“내가 채찍을 썼다?”
“소녀는 단지 호야가 좋아하는 것을 일러줬을 뿐입니다.”
호야는 고기를 먹는 것보다 약초를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해랑이 몸소 키우는 약초밭에 늘 침입하여 약초를 족족 뽑아먹었다. 얼마나 많은 약초를 먹었는지 약초에 대해선 해랑보다 더 잘 알았던 호야.
“호야에게 천년초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절벽 중간쯤 자줏빛 바위 사이에 핀 천년초를 아까 오는 길에 보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해랑이 고개를 빼서 절벽 밑을 바라보니 호야는 자줏빛 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서 천년초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해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천년초가 얼마나 귀한 약초인데! 천 년에 한 번 필까 말까 하는...”
“그래서 호야가 내려간 것이지요. 천 년에 한 번 필까 말까 하는 약초를 서방님이 보시기 전에 어서 가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호야가 천년초.... 아니 제가 던진 당근을 덥석 물었지요. 채찍으로 안 되면 당근이라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낭자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당근 한 번 참으로 귀한 당근입니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당근.”
“천년에 한 번 나오는 당근도... 우리 호야에게는 아깝지 않지요. 소중한 친구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춘화 그대가....”
춘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해랑은 다소 수줍어 보이는 눈빛으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해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춘화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따뜻하면서도 든든한 서방님의 손.
소중한 것들...
너무 소중해서 망가질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것들. 이 아름다운 곳도, 호야도. 그리고 서방님도... 춘화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야 겨우... 그런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춘화의 머릿속에 번쩍, 섬광처럼 그녀가 잊고 있었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주마등이 펼쳐지듯 환영이 보이는 춘화.
시뻘건 화마 속에 꼼짝을 못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춘화 자기 자신이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꿈 속의 자신을 보듯 환영 속에 춘화를 보고 있는 환영 밖 춘화.
기이한 것은 환영 밖의 춘화에게도 매캐한 연기가 그대로 전달되는 듯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뛰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환영 속 웅크린 자신이 꼭 품에 안고 있는 것은...
‘춘화야사?’
그녀는 춘화야사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서책을 감은 두 팔에 바들바들 힘을 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화마를 뚫고 검을 든 웬 사내가 다가와 춘화 앞에 와서 섰다. 뒷모습뿐이라 환영 밖 춘화에게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계시가 내려졌소.”
이 목소리는?
웅크리고 있던 춘화의 눈앞에 서슬 퍼런 검을 들이대는 사내.
“이제 끝을 내야 하오. 제발 내가 그대를 베는 일은 없길 바라오.”
“서...서방님?”
해랑은 촉촉하게 젖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 상황...낯설지가 않아. 그런데 왜 서방님께서 나에게 검을...?!’
눈앞에 펼쳐진 환영 속에서 자신과 해랑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춘화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함에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이 환영은 도대체?!
‘설마... 예지몽?’
이때 갑자기 사방이 어둑해지면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 먹구름은 이내 그녀의 발부터 서서히 먹어치우듯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사라지는 환영.
춘화는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나타난 벼랑 위 해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에게 검을 겨누며 온몸에서 한기를 내뿜던 그가 아닌 금방까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던...다정하고 따뜻한 해랑.
춘화는 먹구름 속에 둘러싸인 채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뻗은 자신의 손을 보고 흠칫 놀라는 춘화.
‘어째서?!’
공기 속에 녹아들 듯 그녀의 손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서서히 몸 전체가 공기 속에서 녹아들며 사라져갔다. 이를 지켜보던 해랑 역시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낭...낭자?”
“서방님!”
순식간에 춘화의 몸은 먹구름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다시 동굴 안.
해랑과 놈이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펼쳐진 춘화야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놈이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멍한 시선으로 한참을 책을 보다 이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해랑...내 생각에 말이야.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내리는 놈이는 해랑이 팔을 붙잡았다.
“이 책은... 요물이라는 것.”
“요물...”
“그렇게 태평하게 ‘요물...’ 이렇게 말할 게 아니라니까! 지금 그림이 막 변하고 또 호랑이도 설쳐대고... 물론 책에서 호랑이가 나왔다고 믿는 건 아니야, 절대!”
“그럼?”
“우연의 일치? 아...몰라. 골치 아픈 거 딱 질색이야. 암튼 이 책은 그냥... 재수 없는 책이야. 그러니까.”
놈이는 서책을 집어 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고로 재수 없는 물건은 얼른 버리는 것이 상책이야. 내가 멀리 버리고 올게. 절벽 아래로 떨어진 호랑이도 죽었는지 확인도 할 겸.”
이때 놈이의 손에 쥐여진 춘화야사에서 신비로운 푸른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뜨악한 표정의 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웅얼거렸다.
잠시 후 다시 푸른빛이 사라지고 잠잠해진 춘화야사.
“해..해랑아. 너도 봤지? 푸...푸른빛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주절거리는 놈이와는 달리 해랑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 푸른빛...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뭐? 언제? 어디서?”
-부스럭.
해랑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동굴 안 쪽에서 들리는 소리. 이 동굴 안에는 분명 해랑과 놈이 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은 동굴 저편 어둠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자세가 굳고 근육이 경직된 두 사람 앞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꿈틀대며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