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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아! 여기야, 여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어린 해랑과 놈이가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오른다기보다 거의 뜀박질 수준으로 날렵하게 산을 날아다니는 놈이와 이와 달리 해랑은 헉헉 거리며 잘 따라가지 못했다.
“헉헉... 놈아... 같이...헉헉...”
남색 쾌자에 복건을 쓴 젖살이 토실토실한 뽀얀 아기 해랑이 지쳤는지 나뭇가지를 잡고는 멈춰 섰다.
“도...도저히 못 가겠어...”
이에 놈이가 올라갈 때보다 더 날렵하게 해랑이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바위를 탁탁 내짚으며 내려오는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해랑, 내 손 잡아.”
해랑에게 손을 내미는 놈이의 작고 다부진 손. 고운 해랑의 손과는 달리 벌써부터 농사일이며 모든 집안 잡일에 거칠거칠하기만 했다.
‘놈이도 나랑 같이 글공부만 하면 좋을 텐데...’
“뭐해? 이제 다 왔다니까. 어서 잡아!”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이좋게 손을 잡고 올라가느라 놈이는 아까보다는 좀 느려졌지만 해랑은 좀 전보다는 잘 올라갔다.
드디어 목표지점에 도달하자 해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와... 멋지다. 이런 곳이 다 있었어?”
놈이가 안내한 곳은 절벽 끝 너럭바위 위였다. 누군가 절벽 위에 넓적한 판돌 하나를 툭 올려놓은 듯한 이곳.
수풀에 가려져 있어 마을에서 올려다 볼 때는 이 너럭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완벽한 비밀요새 같은 공간. 그리 넓지는 않아, 성인 남자 둘도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산정상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도 산 아래 시원하게 펼쳐진 절경을 볼 수 있었다.
“놈이야, 넌 어찌 이런 곳을 다... 멋지다.”
“그렇지? 여기가 내 비밀요새야! 이름 하여 허벅당! 여기 바위가 평평한 게 허벅지를 닮았잖아, 하하하!”
“좋겠다. 나도 비밀 요새 하나 있었음 좋겠다... 마음껏 그림을 그릴.”
“그래! 거기가 바로 이제 여기야. 여기선 마음껏 그림을 그려도 돼!”
“정말? 나도 여기 와도 돼?”
“당연하지! 친구는 원래 서로 아낌없이 주는 거라고 훈장님께서 그러셨잖...헉! 이거 비밀인데...”
급하게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막는 놈이. 하지만 해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요즘 놈이가 서당에서 가 스승님께 공부를 따로 배운다는 것을.
사실 해랑은 그동안 늘 밖에서 기웃기웃 귀동냥하는 놈이가 불쌍했다. 하지만 함께 공부는 할 수 없었다. 엄연한 반상의 법도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해랑이 아니었다. 놈이 몰래 스승님을 찾아간 해랑.
“스승님, 오늘 배운 고사 중에 ‘망양지탄(亡羊之歎)’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 궁금하느냐?”
“망양지탄은 양을 잃어버렸는데 길이 여러 갈래라 양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것으로...선비가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라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할 지 모름을 의미한다 배웠습니다.”
“그렇지.”
“그렇다면 스승님께 학문을 배우는 저희는 양을 잃어버린 목동들이고, 스승님은 그 양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시는 더 큰 목동이 아니시옵니까?”
‘역시 연판서의 장자답다. 영특한 것.’
“좋은 비유로구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
“저는 좋은 집안, 좋은 부모님께 태어나 양반의 자제로서 태어날 때부터 많은 양들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양 한 마리조차 가지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학문을 닦아야 합니까?”
“!”
역시나 영특한 해랑은 어린 나이에 벌써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을 꿰뚫고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모든 사람은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사상.
‘사람이 곧 하늘이란 소린게지. 어린 나이에 벌써 그것을 깨우치다니... 그런데 왜?’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양 한 마리 못 가지고 태어났을지라도 배움에 대한 의지가 있는 목동이 있다면 그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양 한 마리 가지지 못한 자가 누구란 말이냐?”
스승의 질문에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해랑. 스승 역시 처음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수염을 한 번 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허벅당, 비밀요새 위.
놈이는 해랑에게 사실 훈장님께 글공부를 배우게 되었다면서 자랑을 했다. 그것이 해랑의 간절한 청으로 이뤄진 것을 모르고.
“아니, 글쎄 훈장님이 나만 특별히 공부를 봐 주신다고 하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너무 잘됐다, 놈아.”
“그렇지? 근데 반상의 법도가 있어서....비밀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오늘에서야 너한테 말하네. 미안... 하지만 이제 비밀 요새 허벅당도 공유하기로 했으니 용서해 줄 거지?”
“뭐가 미안해. 이제부터 우리 여기서 그림도 그리고 글공부도 같이 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놀랄 만한 게 하나 더 있어~ 기대하시라~”
“응? 그게 뭔데?”
놈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해랑의 손을 잡고는 바위 끝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절벽 끝으로 너무 가까이 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떨어질 듯 위태롭게 바위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해랑과 놈이.
밑을 내려다보니 아무것도 없는 천심절벽 낭떠러지.
“진정한 비밀 요새를 보여주겠어.”
“뭐?”
“나 믿지?”
해랑이 뭐라 말하기 전에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씩 웃으며 뒤로 넘어가는 놈이. 놈이의 몸이 허공에 붕 뜨고 그의 손을 잡고 있던 해랑 역시 손에 이끌려 낭떠러지 밑으로 그대로 훅 떨어지고 말았다.
“으악!!!”
*
“으악!!!”
이건 언제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해랑. 아무래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해랑에게는 ‘거시기당’에 들어오는 것은 매번 힘들기만 했다.
조금 전 호랑이를 바위 끝으로 유인, 그대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던 놈이와 해랑은 사실 허벅당 너럭바위 밑에 좀 더 길이가 짧은 너럭바위 아래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 바위 뒤로 작은 동굴 하나도 있었다. 그곳을 놈이가 ‘거시기당’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어린 시절 놈이가 해랑을 데리고 왔던 진짜 숨겨진 비밀 요새.
‘암튼 간에 놈이는 못 말려. 허벅당 밑에 있다고 해서 거시기당이라니…'
호랑이는 해랑이를 잡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그대로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해랑과 놈이는 허벅당 바로 밑에 있는 나무의 뿌리를 잡아채고는 거시기당으로 몸을 날렸다. 성공적으로 호랑이를 따돌리고 이제야 한숨 돌리는 해랑과 놈이.
“이야~ 우리 여기 진짜 오랜만에 오지 않냐? 거시기당. 크크크.. 이름 하난 내가 끝내주게 지었지?”
“넌 참... 한결같다.”
“당연하지, 내가 좀 일관성이 있지.”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싹 웃음을 거둔 놈이가 자못 심각해지는 표정으로 해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해랑의 소매 자락에 쑥 손을 집어넣는 놈이.
“뭐..뭐하는 짓이냐!”
“이거. 이제 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놈이의 손에 들려 있는 춘화야사. 놈이는 해랑의 눈앞에 서책을 앞뒤로 흔들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설명을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구나.”
“무슨 소리야? 진짜 이 서책에서 호랑이라도 튀어나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
“펼쳐보면 알겠지.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해랑과 놈이 우선 거시기당 안으로 들어갔다. 꽤 깊어 보이는 동굴. 대낮이긴 하지만 동굴 안까지는 빛이 닿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그나마 빛이 비추는 동굴 초입에 앉은 두 사람. 해랑이 조심스럽게 책을 펼지자 놈이가 해랑의 손목을 꽉 잡았다.
“...신중하게 해라. 이 좁은 동굴 안에서 뭐라도 나오면 피할 곳도 없다.”
“이제 내 말을 믿는 것이냐? 서책에서 호랑이가 나왔다는 것...”
“내..내가 언제 믿는데? 그냥 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 암튼 그 서책... 뭔가 불길해. 그러니까 조심하란 소리야.”
해랑 역시 책을 다시 펼치려 하니 긴장이 되었다. 서책에서, 그것도 자신이 그린 호랑이가 나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춘화...호랑이뿐만이 아니었다.
춘화...
분명 해랑이 그렸던 그녀 역시 서책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는 춘화 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호랑이를 그렸던 부분을 펼쳐보는 해랑.
“어흥!”
“헉!”
두 손을 들고 두 눈까지 까뒤집은 놈이가 호랑이 흉내를 내고 실실 대고 있었다.
“놈이, 너 자꾸!”
“어...? 해랑...저..저거!”
“뭐?!”
놈이가 한 손은 가슴에 다른 한 손은 해랑의 뒤를 가리키며 떨고 있었다. 이에 고개를 뒤로 획 돌리는 해랑. 하지만 깜깜한 어둠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바보! 또 속냐? 이러니까 내가 너보고 순둥이라고 하는 거야. 어떻게 이토록 사람을 잘 믿을 수가 있지? 정말 믿을 수가 없네.”
“... 이 상황에서 농을 걸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 더 믿을 수가 없구나.”
“난 언제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놀라운 사내지. 그러니까 여인들이 날 가만 안 두는...”
“됐고. 우선 이 서책에 살펴볼 것이니 있으니... 더 이상은.”
해랑은 춘화야사를 든 채로 놈이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해랑의 모습에 놈이도 찍소리 못하고 어깨만 위로 들썩 할 뿐. 그제야 책장을 팔락팔락 넘겨보는 해랑. 드디어 아까 해랑이 그렸던 부분의 책장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럴 수가.”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해랑.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시선을 떼지 않는 바람에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해랑의 표정에 코웃음을 치는 놈이.
“해랑, 넌 영 어설프거든? 농이란 자고로 나처럼 능숙하게 쳐야...”
“농이...아니다.”
해랑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놈이 앞에 서책을 들이댔다. 그러자 덩달아 커지는 놈이의 눈동자.
서책 속에는 해랑이 그렸던 풍경들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뛰놀던 새, 노루, 토끼. 그리고 절벽에 있던 호랑이 그림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놈아...여기를 봐라.”
해랑이 다시 그림을 가리켰다. 그림의 하단에 한 여인이 풀밭 위에 누워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풀밭에 누워 있는 여인은 바로 춘화...
“뭐야? 이 그 미친...아니 그 기녀 아니야? 이건 또 언제 그린 건데...헉!”
놈이는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껌벅이더니 이내 손으로 눈을 마구 비벼댔다.
“... 이 상황에서도 또 농이냐.”
“아...아니야. 해랑. 그..그림이...이상해졌어.”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놈이가 손가락을 들어 다시 서책을 가리켰다. 그제야 해랑도 서책을 보았지만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춘화가 사라졌다…!'
“해랑 너 내가 안 보는 사이에 다른 장을 펼친 거 아니지? 그런데 왜 누워 있던 미친 기녀가.... 아니 그 기녀 그림이 감쪽같이 없어진 거야?”
분명 조금 전까지 그림의 하단 부분, 풀밭에 누워있던 춘화가 온데간데없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건가... 이제 말이 돼? 갑자기 그려져 있던 그림이 막 사라지고?”
“놈아...사라진 것이 아니다.”
“뭐?”
“여기...”
해랑의 손끝이 그림의 왼쪽 모서리, 절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아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 위로 일렬로 걸어가는 사람들. 그 중 한 명은 사내였으나 뒷모습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손을 잡고 있는 한 여인.
“...미친 기녀?”
앞서 가는 사내와 달리 뒤에 뭔가를 바라보는 듯, 아니 마치 해랑과 놈이를 바라보는 듯 뒤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
‘춘화... 거기에 왜 있는 것이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