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해랑의 처소 안으로 들어간 연판서.
방안에는 이부자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놈이 말대로 아침부터 산보를 갔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는 연판서. 놈이는 연판서 옆에서서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설마... 기녀가 왔다 간 걸 눈치 채신 거?’
놈이가 밖에서 시간을 좀 벌어주긴 했지만 그들이 완벽하게 피신을 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놈이는 혹시나 이부자리에 기녀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봐 안절부절못했다.
“놈아.”
“네... 대감마님.”
해랑이 기녀를 부른 것을 들키는 날에는 박고서사에 간 것보다 훨씬 더 큰 벼락이 내릴 터. 또한 분명 놈이가 기녀를 불렀다고 짐작할 것이다. 연판서 역시 평소 놈이가 여자 후리고 다니는 행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왕 들킬 거 차라리 빨리 자수 하는 것이..!’
“어찌하여 방안이 이렇게 지저분 하느냐?”
“죽을죄를 졌습니다!”
연판서의 질문과 동시에 소리치는 놈이.
“...죽을죄?”
어라? 지금 기녀 얘기 하시는 게 아닌 거...?
“문성각에는 여종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놈이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더 살뜰하게 해랑을 챙기라 내 이르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렇게 이부자리 정리도 하지 않고. 그런데 죽을죄라?”
휴... 다행이다.
기녀 이야기가 아님에 확신을 한 놈이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을죄까지는 아닐 터인데?”
“아닙니다! 쇤네가 해랑 도련님을 소홀히 모신 점 죽을죄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쇤네를 죽여주십...”
“죽이긴 누가 누굴 죽이더냐. 놈이 너는 죽여 달라는 말이 입에 붙었구나.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알겠느냐?”
놈이가 과장스럽게 머리를 조아리자 연판서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어릴 때부터 놈이를 보아온 연판서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놈이 역시 아들 못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놈이가 해랑을 누구보다 살뜰하게 챙기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친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쇤네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감마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놈이.
‘해랑은 잘 피신했겠지? 그런데 어디로?’
해랑이 그 기녀와 밖으로 피신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이 방 어딘가에 숨었을 터.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느냐?”
“아...아닙니다.”
연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놈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놈이 뒤에 책장으로 시선이 갔다. 혹시나 박고서사에서 가져온 서책들을 있나 살펴보기 시작하는 연판서. 다행히 책장에는 화첩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놈이 뒤쪽 방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 서책 한 권이 보였다. 게다가 책 안에는 뭔가 불룩한 것이 끼워져 있었다.
“네 뒤에 무슨 책이냐? 들고 와 보거라.”
책을 가져오라 이르는 연판서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닥을 보는 놈이. 대감마님이 가리키는 책은 춘화야사였다.
‘해랑의 성교육 교재가 왜 하필 저곳에?!’
산 넘어 산이라더니...
놈이는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모르는 척 다른 책들만 뒤적거렸다.
“어허~ 바로 밑에 있는 그 책 말이다! 그래, 그 책!”
대감마님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춘화야사를 바라보는 놈이.
“무엇 하느냐? 어서 들고 오지 않고?”
놈이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책을 들어 연판서에게 가지고 갔다. 이때 불룩하게 튀어나온 책 안의 뭔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무엇이냐?”
춘화야사에서 튀어나와 방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진 그것.
분홍 나비 떨잠이었다.
“그것은 여인네들의 장신구가 아니냐? 학문을 수양하는 군자의 방에 웬 떨잠인고!”
헉.
순간 놈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녀의 상상도.
아마 어젯밤 해랑의 처소로 온 기녀는 순진한 해랑을 넘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겠지. 천천히 다가가며 하나씩 모든 것을 벗어젖혔을 것이다. 저고리도, 치마도, 그리고 저 떨잠도.
‘어떤 기녀인지 몰라도 이렇게 흔적이나 남기고... 괘씸한 것.’
분명 일부러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춘화야사에 저 떨잠을 끼어놓을 걸 보면 보통 기녀는 아니었을 것이라. 기녀 중에 짓궂기가 말도 못하는 것들은 차고 넘쳤다. 일부러 자신의 흔적을 남겨 집안을 풍지박살 내는 여우같은 기녀들.
아니면...설마 해랑과 같이 교재를 보고 연구(?)라도 한 건가?
“어서 고하지 않고 뭘 꾸물대느냐! 어서 고하지 못할까?”
뭐가 뭔지 여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떨잠이 누구의 것이냐?”
“이것은..!”
지금 이 순간, 대감마님께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은 분명했다. 놈이는 바닥으로 몸을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은... 해랑 도련님 것이 맞사옵니다.”
“뭐라? 사내가 어찌하여 여인네들의 장신구를 가지고 있단 말이냐?”
“그 나비 떨잠은...”
*
별이 촘촘히 박힌 까만 어둠 속, 그들만의 우주(宇宙)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는 두 사람. 해랑은 숨소리를 죽인 채 춘화를 품에 안고 별빛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별빛이 아니었다. 틈새로 새어든 햇빛이 별빛처럼 해랑의 눈 안에 들어왔다.
‘아버님께서 어찌...!’
해랑은 병풍 뒤, 궤짝 안에 숨어 있었다. 연판서가 방안에 들어오기 전 허둥지둥 숨는다는 것이 이 좁은 궤짝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것도 춘화를 품에 품은 채로.
궤짝 안은 한 사람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크기였지만 두 사람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건장한 해랑과 춘화까지...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괴롭다...’
춘화와 또다시 살결이 닿다 못해 완전히 밀착되었지만 열꽃은 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간이 좁아도 너무 좁았다. 마치 작은 달팽이집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은 것처럼 두 사람은 한 몸으로 엉켜있었다.
‘너무 덥다...’
땀에 흥건히 젖은 옷은 금세 몸에 찰싹 들러붙었고 속이 다 비칠 정도로 젖어 들어갔다. 이는 해랑 뿐만 아니라 춘화 역시 그랬다. 이것이 다른 의미로 해랑이 괴로운 이유였다. 그는 아까부터 춘화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춘화는...
‘이 상황에서 잠이 오는가... 진정?’
땀으로 젖은 여인의 한복이 이토록 사내의 심장을 후벼 판다는 것을 해랑은 처음 알았다. 그러나 목석같은 이 여인은 그 사실도 모르는지 잠만 쿨쿨.
'자는 모습이 아기 같이 좀 귀엽기도 하다만...'
문제는 얼굴만 아기 같다는 것.
해랑은 자신의 품안에 있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땀에 젖어 속이 다 비치는 저고리 너머 보이는 가녀린 목선. 하얗고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내려가면 움푹 파인 쇄골이 너무나 깊고 여렸다.
쇄골 밑으로 내려가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풍만하게 봉긋 솟아오른 가슴. 이 모든 것이 불행하게도 해랑의 몸에서 찰싹 붙어 그의 눈을 상대로 총공격하고 있었다.
마치 어서 만져보라는 듯이.
‘참아야 한다...참아야 하느니라.’
궤짝 밖에서는 연판서와 놈이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해랑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웅웅... 머릿속에 들어온 벌 한 마리... 아니, 수천 마리가 해랑을 괴롭히고 있었다.
'보아서는 안 되.....는데 보고 싶다.'
해랑은 자신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은 이 벌떼들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
“이 떨잠이 진정... 해연의 것이라고?”
연판서가 의심쩍은 눈으로 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놈이가 임기응변으로 튀어나온 것이 바로 해랑의 동생, 해연 아씨의 이름이었다.
“예, 저번 장이 섰을 때 쇤네와 함께 사신 것입니다. 도련님께서 해연 아가씨 드린다 하시며...”
“장이라... 그럼 저잣거리에 갔다?”
“그렇사옵니다.”
“그럼 이번에도 그 요상한 서가에 갔겠구나.”
“네?”
“모른 척 말거라. 박고서사에 계속 드나드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물론 해랑에게는 화원으로서 자질과 재능이 충분히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온 해랑은 지금은 돌아가신 선왕께 그림을 보여드렸다가 상까지 하사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유명 화원들조차 해랑의 재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연판서는 해랑이 능력과 재능을 인정받자 오히려 해랑에게 그림 그리기를 금지했다. 물론 화첩 보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해랑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붓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힘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해랑... 네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이 혼란스런 세상 역시 구할 수 있다.’
연판서는 작은 나비 떨잠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사사로운 것에 마음을 빼앗겨선 절대 아니 되니.’
*
'한계다...'
해랑은 최대한 시선을 먼 데로 고정한 채 혼미해진 정신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춘화는 궤짝에 들어온 이후 정신을 완전히 잃은 듯 잠에 빠져 들었다. 이 대책 없는 여인 덕분에 해랑의 몸에서는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사실 반응은 훨씬 전부터 오고 있었다. 해랑의 피나는 노력 - 허벅지를 꼬집거나 마음속으로 사서강독을 한다든지- 으로 반응 시간을 늦췄을 뿐이었다.
이제는 해랑의 몸에서 미열까지 나고 있었다. 평소 열꽃과 다른 묘한 흥분마저 일으키는 야릇한 미열. 그의 탄탄한 잔근육들에서 이제는 열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으음..”
춘화가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살짝 옆으로 몸을 비트는 바람에 두 사람은 더욱 더 밀착되었다. 이에 해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 점점 창백해져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을 파고드는 그녀. 해랑은 최대한 춘화를 떼어놓기 위해 발을 뻗었다. 그런데.
- 퉁
“놈아, 이게 무슨 소리냐?”
“예? 저는 잘...”
“뒤에서 분명 무슨 소리가?!”
다리가 긴 것도 죄다.
해랑은 춘화를 조금이라도 피하려다 긴 다리를 살짝 튼다는 것이 궤짝을 퉁하고 치고 말았다. 해랑은 이제 완전히 뻣뻣하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들키는 건가? 숨을 죽인 채로 바깥 상황을 주시하는 해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에서 덜 깬 춘화는 두리번거리다 해랑의 얼굴을 보고 이내 안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궤짝 속의 부족한 공기 탓인가? 송글송글 이마에 땀까지 맺힌 춘화는 이미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잠에 취한 듯 제정신이 아닌 듯 그녀는 배시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서...”
“쉿!”
해랑은 다급히 손으로 춘화의 입을 막았다. 그의 커다란 손에 거의 반 이상 가려진 그녀의 조막만한 얼굴. 춘화는 안 그래도 가까이 밀착되어 있는 몸을 더욱 더 밀착하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게다가 그 새빨간 입술을 해랑의 목에 갖다 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 입술이 짜릿하게 그의 목을 탐닉하듯 닿는데.
맙소사.
해랑의 몸에서 바로 반응이 왔다.
이번에는 아주 확실히.
“안 돼!”
해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궤가 기우뚱 기울더니 그대로 병풍까지 쓰러뜨리며 넘어졌다.
콰아앙―!
넘어진 궤에서 땀에 흠뻑 젖어 뒤엉켜 와르르 튀어나온 해랑과 춘화. 이런 그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놈이.
그리고 뒤로 고개를 홱 돌리는 연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