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밤은 이미 깊어 벌써 축시 경. 해랑의 처소에 도둑고양이 마냥 몰래 들어오는 그림자 하나.
발끝으로 살금살금 바닥을 딛던 그림자는 이윽고 누워 있는 해랑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어두운 방안을 걷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헉!”
이때 발끝에 뭔가가 걸리는 바람에 그림자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하마터면 넘어지는 것은 물론 해랑 마저 깨울 뻔.
“큰일 날 뻔 했네...”
푸르스름한 달빛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그림자를 비추었다. 놈이가 한 손에 작은 물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해랑이 축시 경에는 목이 마르다며 늘 자신을 찾기에.
“피곤하긴 했나 보네...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으니.”
아무리 깊은 잠에 들었더라도 누군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잘 만큼 허술한 성격의 해랑은 아니었다. 놈이는 해랑의 머리맡에 앉아 그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에게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놈이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읽다가 잠든 건가?”
발에 걸린 서책을 들어올리는 놈이. 달빛도 어느새 구름에 가려져 방안은 곧 짙은 어둠으로 깔리었다. 놈이는 대수롭지 않게 서책을 한쪽으로 툭 던져버리고는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방안에서 쏟아지는 푸른빛.
*
다음날 아침.
열어진 창문 틈으로 청명한 바람이 햇살과 함께 슬며시 들어와 해랑의 코끝을 간질였다. 또한 한 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달콤한 복숭아 향기도 그의 잠을 깨우는데.
복숭아 향이라니... 또 꿈을 꾸는 걸까.
이제 꿈에서조차 춘화를 찾아 헤매는 걸까? 책 속에 여인에게 반하지를 않나, 게다가 그 여인이 책 속에 나와 자신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환영을 보지 않나. 그런데 그 환영을 찾아 헤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란...!
‘한심하기 짝이 없다...군자 된 도리로서 허상 따윌 믿다니.’
해랑은 자책하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러자 더 짙어지는 복숭아 향.
‘웬 복숭아 향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서히 눈을 뜨는 해랑. 그런데 가슴팍에 느껴지는 이 보드랍고 따뜻한 것은? 해랑은 자신의 가슴 쪽에 천천히 시선이 갔다. 갑자기 빠르게 껌벅거려지는 눈꺼풀.
“?”
해랑의 품에 안겨 있는 한 여자. 조그맣고 하얀 얼굴에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고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마치 아기처럼 자고 있는 그녀는.
“...!"
춘화...?
더 이상 어떤 말도 잇지 못하던 해랑은 뭔가에 홀린 듯 살짝 벌어진 춘화의 붉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 이것은 분명 실제였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불에 대인 듯 손가락을 뗐다.
“그 꿈도, 어제 일도 모두 진짜였단 말인가?...”
“으음...”
춘화는 계속 잠이 든 채로 누운 자세를 바꾸며 해랑의 품에 더욱더 파고들었다. 그 바람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그의 맨살에 살포시 닿았다.
순간 해랑은 찌릿찌릿 온몸의 감각이 쭈뼛 섰다.
“윽!”
해랑은 나신(裸身)을 가리기 위해 황급히 이불을 찾았다. 하지만 춘화가 먼저 이불을 또르르 말면서 옆으로 굴러갔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더욱 믿을 수 없는 하나…
“몸이… 왜?!”
*
“흐아아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불 애벌레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불을 돌돌 말고 있던 춘화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난 것. 이불 속에서 앞다리(?)가 쏘옥, 뒷다리(?)가 쏘옥. 부스스 잠에서 깬 춘화.
“여긴... ”
한바탕 혼곤한 꿈을 꾼 듯했다. 서책에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나오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늘 꿈에서 깬 듯 몽롱한 상태였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위를 대충 휙휙 둘러보는 그녀.
“역시 서방님의 처소...?”
완전히 이불에서 몸을 떼고 자리에 앉은 춘화.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자느라 이미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머리치장 따위 할 시간은 없었다. 들키기 전에 나가야만 했다.
“서방님, 오시기 전에...”
“...멈추시오.”
무릎을 세우며 일어나던 춘화를 어정쩡한 자세로 만드는 낮고 굵은 목소리.
"...뒤돌아보시지요, 낭자."
해랑이 그녀의 뒤에서 모든 행동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춘화.
‘들킨 건가... 그렇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앞으로 몸을 휙 돌린 춘화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이마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선 무턱대고 해랑을 향해 절을 올리는데.
“도련님께 인사 올리옵니다. 소녀 춘...”
아차. 이름을 밝혀선 안 되는데. 하지만 마땅히 생각해 둔 가명은 없었다.
“…춘화.”
그녀의 이름을 먼저 소리 내어 말해주는 해랑. 그 순간 춘화는 마음 속 어딘가 독하게 묶어둔 끈 하나가 뚝하고 끊어졌다. 언제 들어도 그립기만 한, 그녀를 그대로 무장해체 시키는 서방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젠 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향한 의심만이 뚝뚝 떨어질 뿐.
“아…아닙니다. 절대.”
반듯하게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해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초상화 속 그녀와 저 여인은...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았다. 머리를 풀어헤쳐서 그런가.
해랑이 그려줬던 초상화 속 단아하고 아름답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집안의 막내딸 같은 천진난만함은 느껴지지만... 서책 속의 춘화와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럼 낭자가 누구이며, 여기에 왜 있는 건지 설명을 해 주십시오.”
“그것이...말하자면 엄청 길어서...”
이렇게 될 줄은 춘화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서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나와서의 일은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엄.청. 길어도 들어야겠습니다.”
“다음에...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낭자가 어디에 있는지 정녕 모르신다는 겁니까? 사내 혼자 기거하는 방에,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침입한 밤손님...그게 바로 낭자입니다.”
“침..침입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길을 잃었다? 연판서 대감의 집에서. 그것도 제 처소에서 말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아무튼...길을 잃은 것과 비슷한 겁니다. 설명을 해도 도련님께서는 이해하시지 힘드...”
“하... 더 이상 말로는 안 되겠습니다.”
- 철컥
해랑은 옆에 있던 검을 칼집에서 꺼내는 시늉을 했다. 연약한 여인에게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서책과 관련해서 이상한 일이 너무나 많았다. 자꾸 환영에 시달리고 자객들까지 들이닥쳤다. 게다가 처음에는 자신을 춘화라고 지칭하다가 이제는 아니라니.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명확하게 무엇인가를 알기까지는 약간의 겁을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시늉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게 필요하다.’
해랑은 이 여인의 정체만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해진 자신의 몸 상태... 그렇게 가까이 여인을 두고 게다가 꼭 안기까지 한 일은 해랑의 인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중요한 건...열꽃이 전혀 피지 않았다는 것.’
여인의 손길만 살짝 스쳐도 피어오르던 열꽃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극심한 통증도 어지러움도 없었다. 오히려 편안하고 포근했다고 할까.
이상하다 못해 괴상한 일이었다.
'열꽃이 피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춘화가 아니라는 말도 되겠지.‘
꿈이었을지는 몰라도 어제 궤짝에서 튀어나와 그에게 안겼던 춘화. 정확히 말하자면 궤짝 안 서책 속이었지. 자신을 서방님이라 부르며 안기던 그녀 역시 그에게 열꽃이 피어나게 했다.
‘춘화가 안겼을 때 피어난 열꽃과 서책의 굉음으로 쓰러지기까지 했어. 그 후에 그녀도, 책도 사라졌고.’
그런데 춘화와 비슷한...다시 보니 그리 비슷하지도 않은 여인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
문득 전에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최판서댁 처녀가 떠오는 해랑. 주로 연서로 마음을 표현하는 여인네들이었지만 간혹 그렇게 과격한 여인네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 역시..?
‘아무리 과격한 처자라 한들 어떻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내 방에 침입을 한다는 말인가?'
생각을 하면 하면 할수록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 저 여인은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
해랑은 칼집에 손을 떼지 않은 채 춘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여인의 치맛자락 끝에 뭔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살짝 드러난 모서리... 춘화야사?
춘화 역시 해랑의 시선이 자신의 치맛단 밑으로 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슬며시 치맛자락을 움직여 책을 숨겼다. 이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해랑.
“멈추시오.”
“네?”
“...지금 치맛단 밑에 뭘 감추고 계신 겁니까?”
“아..아닐 겁니다.”
너무나 어설픈 춘화의 연기에 해랑의 한쪽 눈썹이 위로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뭐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낭자. 계속 이러시면... ”
이윽고 해랑은 칼집을 손에 쥔 채로 벌떡 일어나 춘화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이러지 마십시오. 다가오지 말라니까요!”
춘화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서 잡히는 물건 하나를 세게 해랑을 향해 휘둘렀다.
- 퍽
“윽...!”
춘화가 휘두른 것은 다름 아닌 놈이가 간밤에 놔두고 간 물그릇이었다. 정확히 해랑의 이마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게다가 그릇 안에 물까지 촤라락 뒤집어 쓴 해랑.
그는 이마에 흐르는 물을 닦으며 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칼을 꽉 움켜주었다. 일자로 앙다운 해랑의 입술에 창백한 쓴웃음이 얼핏 스쳐갔다.
춘화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치마 속에 숨겨둔 춘화야사를 발끝으로 질질 끌며 안간힘을 썼다.
“...이제 내 놓으시지요.”
“무..무엇을요? 하하...”
“지금 버선발로 용쓰고 계시는 것 말입니다.”
“아..하하 당최 도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제 그만하시지요. 제가 생긴 것과 달리...”
칼집을 다시 바로 잡은 해랑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춘화.
춘화야사를 서방님께 빼앗겨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했다간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기에. 그것만은 절대...!
계속 해서 뒤로 엉덩이를 미는 춘화. 책을 끌고 있는 발가락엔 이제 쥐까지 났다. 춘화의 등이 벽에 탁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그녀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미는 해랑.
“인내심이라곤 털끝 하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목울대에서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차도남... 조선 최고의 차가운 도성 남자 해랑이었다. 지금 이 정체도 알 수 없는 여인과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무엇보다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신을 좀...”
해랑은 한 쪽 팔을 벽에 댄 채 춘화를 더 구석으로 바짝 몰았다. 그리고 그녀의 거기(?)를 향해 손을 뻗치는데.
“만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