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서방님. 춘화가 왔습니다...”
장대비가 쏟아 붓기 전 해랑의 처소, 성진각.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것인지...
춘화는 눈앞에 서 있는 해랑을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답고 늠름하신 서방님...
춘화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꾹 참았다.
'울면 안 돼... 어떻게 다시 뵙게 된 서방님인데...
이리 좋은 날. 왜 울어. 무엇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야...'
눈빛 가득 반가움이 뚝뚝 묻어나는 춘화와 달리 해랑의 눈동자는 지진이 난 듯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러시지?
“서방님?”
“정말...춘화...그러니까 내가 춘화라고 이름을 지어준 책 속의 여인이... 정녕 그대란 말이오?”
“설마... 저를 기억을 못 하시는 겁니까?”
“아니, 기억은 하오. 그러니까 내가 그대를 그려줬고... 그 전엔 꿈에서는 떡..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떡? 꿈?
춘화는 해랑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마치 처음 보는 여인처럼 바라보는 서방님은 너무나 낯설었다.
'설마 서방님은 예전 기억을 다 잃으신 건가...
왜 내가 책 속에 봉인되었는지, 어떻게 봉인이 풀렸는지도?'
“그대는...진정 사람이 맞소? 아님 요괴? 책 속에 분명히 춘화 그녀가 있었는데 이젠..”
해랑은 춘화에게 춘화야사를 펼쳐보였다.
텅 비어 있는 종이. 그 순간.
-우르르 쾅.
성진각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낮인데도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방안은 암전. 이때 강렬한 푸른빛이 춘화야사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윽!”
해랑의 두 눈을 멀어버릴 듯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푸른빛. 그 빛줄기 속에 해랑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몸에 퍼지는 열꽃들. 누구의 손길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열꽃들은 이내 검붉게 변했다. 마치 화마에 휩싸인 몸 같은.
“서방님?!”
쓰러진 해랑의 몸의 변화에 놀란 춘화가 손을 내밀자 이번엔 춘화야사에서 굉음이 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뒤로 물러선 춘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춘화는 해랑의 곁에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었다.
이때 춘화의 귓가에만 쟁쟁 울려퍼지는 속삭임.
- 벌써... 잊었느냐?
이 목소린...?
- 넌 절대... 해랑 곁에 있어선 아니 된다.
책에 갇혀 있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그 목소리...
- 또한 동시에 절대... 해랑 곁을 떠나선 안 된다.
그래... 그게 내 운명이었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아닌...
- 춘화 네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일을 그르칠 시엔...
내가 스스로 정한 운명.
알고 있어요. 이제 생각났으니 제발 그만...
- 해랑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영겁의 고통을 안은 채, 영영.
춘화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고운 얼굴에서 눈물이 빗방울 떨어지듯 후두둑 해랑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더욱 검붉은 색으로 변하는 그의 손이 곧 시커멓게 변하고 말았다.
‘어찌하여..!’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춘화.
‘우선... 도움을 청해야해. 사람들을!’
“서방님, 잠시만 계십시오. 사람들을 불러 오겠습니다.”
말이 마치자마자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가는 춘화. 밖에는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긴머리를 출렁이며 그대로 빗속에 몸을 던지는 그녀.
해랑은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 멀어지는 춘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지 마.”
해랑이 춘화를 향해 손을 뻗지만... 결국 바닥 위에 툭 힘없이 떨어지는 그의 손.
*
“윽...”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겨우 정신을 차린 해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짚었다. 심한 통증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다행히 몸의 열꽃들은 다 사라졌다.
“...설마 이게 다 꿈인 건가.”
차라리 꿈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책에 그렸던 여인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이야말로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분명 한바탕 요란스러운 꿈을 꾼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춘화 그녀는... 너무나도 생생했지만.
“그런데...춘화야사는 어디에?”
감쪽같이 사라진 춘화야사.
춘화와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안긴 것도 다 꿈일지언정 그가 들고 있던 춘화야사는 실제가 아니었나. 분명 이쪽에 있었는데. 해랑은 춘화야사가 놓여있던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물...? 방 안에 웬 물이?”
춘화야사가 놓여져 있던 그 자리에 물이 고여 있었다. 지붕이 샌 것도, 물을 쏟은 자국도 아닌 마치 그 자리에만 비가 온 것처럼 동그랗게.
“거기 밖에 누구 있느냐?”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쇤네 돌쇱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놈.”
“네?”
“놈이를... 불러 오거라. 지금 당장!”
평소와는 다른 다급한 해랑의 목소리에 돌쇠는 허둥지둥 성진각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랑은 고여 있는 물에 살짝 손끝에 묻혀 코로 가져갔다. 손끝에서 살짝 흙냄새가 났다.
역시...빗물?
그런데 왜 방 안에 빗물이 고여 있단 말인가.
게다가 책은?
만약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춘화.
*
“해랑!”
헐떡거리며 서재의 문을 부술 듯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 놈이.
“...왔느냐.”
응?
놈이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게 책상을 앞에 두고 꼿꼿이 앉아 있는 해랑. 돌쇠의 급한 전언을 받고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달려 왔건만.
“생각보단 늦게...왔구나.”
“도련님아, 너 멀쩡하잖아?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얼마나...”
“...무슨 일이 있긴 했다. 혹시 춘화야사...네가 들고 갔느냐?”
“그 성교육 교재? 내가 왜 그 책을 들고 가. 난 그런 책 없어도 아주 막, 불끈...”
“잠시 기다리거라.”
해랑은 책상 밑에서 문방사우를 꺼내더니 빈 화선지를 펼쳤다. 붓을 들고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진 해랑.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그려지는 한 여인의 초상화.
해랑 이 녀석... 교재 잃어버리고 직접 만들려고 하나? 그렇다면 그림이 너무 안 야한데?
“이왕 그릴 거면 야하게 그려 줘. 혼자 보단 둘... 알지? 흐흐.”
“쉿.”
놈이의 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쓱쓱 그림을 완성하는 해랑. 역시 그냥 썩여두긴 아까운 솜씨였다. 해랑이 연판서의 자제...아니 장자만 아니었더라도 그림으로 이름을 크게 날렸을 텐데. 이럴 때 보면 지체 높은 집안의 도련님도 다 좋은 건 아닌가 싶다.
“다 됐다.”
“그래? 어디 한 번 보...어?”
드디어 완성된 여인의 초상화.
그런데 초상화 속 이 여자는?
“...아까 그 미친 년?”
“이 여인을 본 적 있느냐?!”
“아까 빗속에서 머리를 산발을 해가지고 부딪쳤는데...해랑 네가 어찌 이 여자를...”
대답 대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해랑.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었다.
“야...아니 도련님아. 왜 그래? 무슨 오해가 있나 본데. 나 그 미친년한테 손끝하나 안 건들였...”
“놈아, 일어나 앞장 서거라.”
“응?”
“가자,”
“어디로?”
“...춘화에게로.”
“그 미친년 이름이 춘화야?”
먼저 일어나 방을 나서던 해랑이 놈이를 뒤돌아보았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해랑의 눈동자에 놈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해랑이 저렇게 흐트러진 표정은 그 사건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미친 건 나일지도.”
해랑... 너 왜 그래?
*
"여기에 춘화를 뉘어다 놓았다고...“
놈이의 안내에 따라 행랑할멈의 방까지 찾아온 해랑.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마루에 걸터앉는 해랑을 보며 놈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 미친 여자를 찾는 거야.
게다가 임자 있는 여자인데.
“정말... 아까 내가 그린 여자와 놈이 네가 본 여자가 닮았더냐?”
“닮기는... 아예 똑같이 그렸더니만. 근데 너 아직 대답을 안 했다. 왜 찾는데, 그 미친 여자를?”
“...때론 말하지 않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 말을 했다간 오히려 더 엉망이 될 것 같구나.”
해랑은 아까 자신을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던 여인을 떠올렸다. 정말로 자신이 떨잠과 옷을 그려주었던 춘화와 흡사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서방님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친근하게 대했던 것일까. 더 이상한 건 그런 여인의 태도가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것.
‘기이한 일이다...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어.
꿈과 책 말고도...훨씬 그 이전에.’
해랑이 춘화야사에서 나온 푸른빛 때문에 쓰러졌을 때 자신에게 기다리라며 사라지던 그녀의 뒷모습도 언젠가 한 번쯤 본 듯한 모습이었다.
‘책에서 나온 그 푸른빛도 기이하기는 마찬가지.’
“...해랑!”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몇 번을 불렀는데도.”
“미안하다... 참, 내가 아까 말한 것은 전달했느냐?”
“돌쇠에게 말해뒀어. 글 좀 읽을 줄 아는 사환 몇이랑 찾아보라고.”
“그것도 일렀느냐. 절대로...”
“당연하지, 절대로 펼쳐보지 말라고. 그거 순결하신 우리 해랑 도련님 성교육 교재잖아.”
하아...
그래, 놈이 네가 말한 대로 그렇고 그런 교재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서책은 너무...
“...위험해.”
굵은 저음의 목소리로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는 해랑.
그런데 옆에서 쉬지 않고 쫑알대던 놈이가 웬일인지 말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대답을 들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녀석이 너무 잠잠한데?
“뭐가 위험하다는 것이냐? 연해랑.”
해랑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조선 최고의 권세가이자 일등 공신인 연판서.
“아버님,..!”
“게다가 네가 행랑할멈의 방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연유가 무어냐.”
해랑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연판서는 평소 하나 뿐인 아들인 해랑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요새 해랑이 글공부를 게을리 하고 박고서사에만 박혀 산다는 소리를 듣고 확인 차 성진각으로 가던 참이었는데.
“지금 네가 이렇게 밖을 돌아다닐 여유가 있더냐? 부리는 여종들마저 다 내쳐가면서 절간에 있는 것처럼 학업에 증진하겠다 나랑 약조한 것을 잊었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도련님! 해랑 도련님!”
이때 저 멀리서 헐레벌떡 해랑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돌쇠. 뒤돌아 서 있는 연판서를 보지 못하고 해맑게 웃으며 뛰어 오고 있었다. 손에 들린 서책 한 권.
“헉헉...도련님! 제...제가!”
안 돼. 이리로 오면...!
놈이가 뒤통수를 긁는 척 손을 위로 휘휘 저리 가라며 신호를 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빨리 오라는 소리 인줄 알고 뛰어오는 돌쇠. 해랑과 놈이 그리고 연판서 앞에 고꾸라지듯 엎어졌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서책을 번쩍 들어 올리는데.
“헉헉...춘...춘화를 찾았습니다, 도련님!”
조용히 그 서책을 대신 받아드는 연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