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달콤한 복숭아 향내에 홀린 듯 해랑은 조심스럽게 발걸음 옮겼다. 그의 손에는 자객단의 검까지 들려있었다.
“누구냐?!”
해랑의 외침에 갑자기 조용해지는 방 안.
하지만 향기는 그대로였다.
분명 지금 이 방에 누군가 있다...
“대답하라 일렀다!”
서슬 퍼런 해랑의 목소리만 숨 막히게 방 안을 가득 메울 뿐.
-바삭.
바삭?
병풍 뒤였다.
해랑은 과감하게 병풍을 확 걷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서재로 쓰는 방에는 수많은 서책과 문방사우.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궤짝 뿐.
“에취!”
이번엔 에취?
“에-에취!”
궤짝 안이다. 곧바로 문고리를 잡고 확 열어젖히는 해랑.
"아아아아악!”
궤짝을 열자마자 시커먼 무언가가 괴성을 지르며 확 튀어나왔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해랑.
-꽈당
“으윽...!”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해랑의 몸 위로 시커먼 물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뭐..뭐지? 이건.’
-주물럭.
주물럭?
해랑의 탄탄한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는 나쁜 손. 괴상한 이것은 대체...!
"으흐흐흐...“
갑자기 실실 웃기 시작하는 해랑.
“크흡...가...가...간지러워!”
지금 그 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흐읍!”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보지 않고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온 몸의 기관들이 그에게 안긴 사람이 여인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으니까. 그 증거로 그의 몸에 붉은 열꽃들이 마구잡이로 피기 시작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이제 가려움은 극심한 통증으로 해랑의 전신을 강타했다.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그의 비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해랑의 은밀한 사정...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이유.
해랑은 여인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열꽃이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다행히 얼굴은 살짝 붉어지는 정도로만 끝났지만 그의 속사정은 달랐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제일 가는 권세가인 연판서의 자제, 연해랑이다. 그의 시중을 드는 여종만 수십은 넘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부터였지. 이렇게 된 건.’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모든 뒤틀림의 시작은 그 사건이 이후부터였다.
해랑의 이상한 병도 그때부터였다. 그래서 여인들을 점점 멀리했고 하다못해 여종들 마저 해랑이 거처하는 문성각에서 전부 내쳐졌다. 조용히 글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내치긴 했지만 이런 병 때문이라는 것은 놈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알게 되면...
‘심하게... 걱정 하겠지.
특히 그 사건 이후부터 그랬다는 것을 알면 더욱 더.’
놈이가 알아선 안 된다.
더 이상 해랑은 놈이를 걱정 시킬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이대로...죽는 건가?’
숨이 점점 가빠오고 있었다.
산발의 여인은 여전히 해랑의 품안에 안긴 채 바람에 버드나무 잎 흔들리듯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소름이 쫙.
‘처녀 귀신? 처녀 귀신도 여인이라고...
이 병은 산 자 죽은 자를 가리지 않는군.‘
이윽고 찾아온 숨도 못 쉴 정도의 통증.
처녀 귀신을 물릴 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간지럼 참으시려고 숨까지 참는 건...여전하시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해랑의 품에서 스르륵 빠져 나오는 처녀 귀신. 해랑은 그제야 제대로 쉬지 못했던 숨을 한 번에 토해냈다.
그런데 간지럼? 여전해?
“!”
해랑의 숨을 멈추는 게 만든 처녀 귀신... 저 여인은!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잘 들어가 있는 눈 코 입. 크고 동그란 눈, 앙증맞은 콧날. 붉디붉은 입술을 더욱 강조해주는 투명하고 뽀얀 얼굴.
“...설마.”
여인이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가녀린 목선이 드러났다. 그 목선을 따라 내려가면 퐁당 빠질 것 같은 깊은 쇄골. 그 쇄골 밑 복숭아 같이 봉긋 나온 가슴까지. 그때 그 꿈에서 만진...
-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떡 같구나.
- 떡이요?
-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실 겁니까? 법도를 잘 아시는 공자께서...
해랑은 꿈속에서의 일이 생생하게 살아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으로 손이 갔다.
어...? 그리로 가면 안 되는데?
-짝!
해랑의 손등을 소리 나게 찰싹 치는 처녀 귀신.
“서방님! 아직도 손버릇 못 고치셨습니까? 백주 대낮에 체통 없이...”
“설마...아냐, 말도 안 돼.”
“당연히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 해도 이렇게 허락 없이 만지시려는 건.”
“잠깐, 지금 부...부라 했소? 그리고 서방님?”
“그럼요. 부부니까 허락을 맡고 그 연후에...
그러니까 뭐 밤에는 또 몰라도...”
“잠깐...낭자. 잠깐만.”
해랑은 열꽃으로 온몸이 불덩이가 된 몸을 돌려 무언가를 찾는데.
그의 눈에 쓰러진 궤짝 안 춘화야사가 보였다. 손을 뻗는 책을 집는 해랑.
‘닮은 사람이겠지. 저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해랑은 자신이 그려주었던 춘화...
그녀의 초상화가 있는 부분을 빠르게 펼쳐냈다.
“이럴 수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춘화야사.
“분명...내가 그렸는데...”
떨어진 춘화야사에는 그녀의 초상화만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박고서사에서 마지막에 펼쳐 봤던 그 상태 그대로.
그리고 마치 그 책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 해랑의 눈앞에서 있는 그녀.
다른 점은 하나 뿐.
초상화에서의 단정했던 머리가 산발이 되었다 정도?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춘화...?”
“네, 서방님. 춘화가 왔습니다.”
*
- 우르르 쾅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거짓말처럼 벼락이 치고 있었다. 그것도 해랑의 처소인 성진각 위로만.
놈이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성진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왜 이래? 불길하게...”
말 끝나기가 무섭게 때늦은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세찬 장대비를 맞으며 놈이는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뛰기 시작했다. 비는 그세 더 거세게 내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탁.
뭔가와 세게 부딪친 놈이.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그런데 놈이 앞을 누군가 막고 서 있었다.
“아..씨! 넘어질 뻔 했잖아! 왜 길목을 막고...”
“도와줘...”
놈이의 앞에 세찬 비를 그대로 다 맞고 서 있는 한 사람...길게 풀어헤친 머리조차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여인이었다.
누구지?
“...아파.”
“어디가 아픈데?”
우리 집안사람은 절대로 아니군. 저 정도 미색이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근데 머리는 왜 풀어헤치고... 미친년?
그럼 머리가 아픈 건가.
안 그래도 윗마을에 사는 정신 나간 여자가 요즘 우리 마을에 출몰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서방님이..서방님이...이상해.”
뭐야, 임자 있는 여자였어? 그런데 서방도 이상해?
그럼 부부가 쌍으로...미친 건가.
“네 서방이 이상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헉!”
그대로 놈이 앞에 쓰러지는 동네 미친 년... 춘화.
*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싶다. 내가 너 땜에 못 살아! 이 놈의 새끼!”
“할매...나 새끼 같은 건 없어. 총각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지금 터진 입이라고 농이 나와? 뭘 잘했다고?”
연판서 댁의 살림의 수문장으로서 벌써 50년째인 행랑 할멈. 그 연륜을 보여주는 솥뚜껑만한 우둘투둘한 손으로 놈이의 넓은 등짝을 퍽퍽 내려쳤다.
“우씨! 아파, 할망구야! 왜 때리는 건데?”
“이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지금 네 놈이 여자를 후리다 못해 이젠 보쌈... 아니 납치까지 해 와?”
조금 전 빗속에서 쓰러진 여자를 등에 업고 행랑 할멈에게 왔던 것이 화근이었다. 할멈은 우선 정신을 잃은 여자를 자신의 방에 뉘이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혔다. 행색을 보아하니 머리는 산발이긴 했지만 단아한 용모와 품격 있는 옷차림은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이 분명했다.
놈이 이 녀석이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것은 알았지만...
“이 미친 놈아! 경을 치려고 환장했냐? 딱 봐도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
“에이? 아니야. 완전 미친 년...아얏!”
“신분이 미천하다고 해서 입까지 미천해지면 안 된다고 했지? 어디서 이 년 저년이야? 됐고. 너는 가서 저 방에다 불이나 더 지펴.“
행랑할멈의 호통에 투덜대며 아궁이에 넣을 땔감을 가지러 가는 놈이.
“에휴... 마음은 여려가지고.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저런 여인을 납치(?)를 해 왔누.”
잠시 후 아궁이에 땔감을 다 넣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보는 놈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 동네 미친년을 위해 이럴 때가 아닌데.”
놈이는 품에서 떨잠 2개를 꺼냈다. 여인들이 머리에 꽂는 장신구였다. 하나는 노란색, 다른 하나는 분홍색 나비 떨잠. 사실 곧 해연 아씨의 탄신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드린다고 한 것이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이번에도 역시. 하필 미친년을 만나가지고.
“근데 두 개 다 드리면 부담스러워 하실 거고... 하나를 드리자니 결정을 못 하겠네. 뭘 더 좋아하실까. 노랑? 분홍?”
두 떨잠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놈이. 아무리 봐도 둘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가게 주인 말로는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서로 아주 다른 떨잠이라고 했지만.
전혀 모르겠다, 완전.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하려나…
“아! 그 미친년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뭐 미친년도 여자는 여자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행랑할멈의 방으로 달려가는 놈이. 때마침 행랑할멈도 마님의 부르심에 나갔다하니 딱이었다. 여인 혼자 있는 방이라고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뭐 어떤가.
잠깐 물어보기만 할 건데.
“뭐... 해연아씨에게 잘 어울리는 거 골라주면 나머지 하나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그 미친 년에게...”
해연 아씨보단 아니지만 걔도 꾸미면 꽤나 고울 듯... 그러니까.
"...팔아야지. 돈 굳었다!"
드디어 행랑할멈의 방안에 다다른 놈이.
고민도 없이 과감하게 문고리를 확 잡아당겼다.
“들어간다.”
들어간다는 말을 먼저 하고 방안에 들어가는 게 맞지만.
“야, 일어나 봐. 나 너한테 물어 볼...어?”
텅 비어 있는 이부자리. 이 미친 아녀자 어디 갔어?
게다가 이부자리 위에 있는 건 행랑할멈이 갈아 입힌 옷들인데...
“역시 미친 년 맞네... 아니 그럼 도대체 뭘 입고 나간 거야? 설마 젖은 옷 그대로 입고? 이 빗속을?"
그러든가 말든가.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옛 말이 딱 맞구나...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고 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놈아! 놈아!”
밖에서 놈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돌쇠야, 왜?”
“헉헉... 너 여기 있었어? 나 너 한참을..헉헉....찾아...”
“왜? 무슨 일 있어?”
“큰...큰일났어. 해랑 도련님이...”
돌쇠의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튀어나가는 놈이. 날쌔기가 비호와 같았다.
돌쇠는 멀어져가는 놈이를 향해 뭐라고 외쳤지만 이미 놈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급하게 뛰어가는 바람에 떨잠들이 투두둑 떨어졌지만 놈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깟 떨잠들 따위야. 오직 놈이의 마음엔...
“해랑! 괜찮아?”
해랑의 처소의 문을 쳐부술 듯 거칠게 열어젖히는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