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년이 어디에 있나 물었다.”
조용히 해랑을 향해 으르렁대는 검은 그림자.
어둠 속 달빛만으로 그림자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다.
해랑이 반응이 없자 칼날은 더욱 깊게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연해랑!”
이 때 밀실 안으로 달려드는 또 다른 그림자. 놈이.
놈이의 등장으로 검은 그림자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해랑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목을 겨누던 자객의 명치를 팔꿈치로 세차게 들이박았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그림자.
해랑은 날렵하게 칼을 빼앗아 그림자에게서 벗어났다.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나는 해랑의 자태는 고고한 한 마리의 학. 하지만 이제 검을 쥔 해랑은 학이 아닌 한 마리의 범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검은 그림자들이 그에게 달려드는데.
해랑은 사뿐히 그들을 피하며 춤을 추듯 길게 뻗은 팔다리로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놈이 역시 괴력을 발휘하며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해랑과 놈이.
서로의 등을 기대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놈, 다치지 마라.”
“내가 할 소릴.”
다시 전투자세를 가다듬는 두 사람.
이때 해랑을 협박했던 검은 그림자의 우두머리가 부하들에게 신호를 줬다. 이에 검은 그림자 자객단은 싸움을 멈추고 재빨리 밀실을 빠져나가는데.
해랑과 놈이가 그들을 쫓아 밖으로 나왔지만 이미 사라진 검은 그림자들.
“어떻게 된 거야?”
“그러는 놈이 넌? 어떻게 알고 여길...”
“척하면 척이지. 너 원래 축시 경에 항상 깨서 물을 찾잖아. 그런데 오늘은...”
놈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해랑은 오른손에 쥔 칼을 땅에 꽂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자객단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가장 두려운 것은.
춘화야사.
자신이 아까 보았던 이상한 빛은 무엇이며 서방님이라고 부르던 여인의 목소리는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해랑은 다시 화첩을 펼쳐보지만 역시나 춘화의 초상화는 사라지고 빈 화선지만 있을 뿐이었다.
이 울렁이는 느낌은 뭐지?
그리고 이 향내는... 복숭아?
“지금 그 책을 펼쳐볼 기운이 남아 있... 연해랑!!!”
완전히 정신을 잃고 놈이의 품에 픽 쓰러지는 해랑.
*
‘... 이제 정신이 드시어요?’
또다시 꿈인가? 해랑은 뭐가 꿈이고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복숭아 향...또 그 향이다.
꿈속의 그녀뿐만 아니라 춘화야사 그 책에서도 났던.
그렇다면....춘화낭자?
해랑은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입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목구멍 속에 갇혀 맴돌기만 할 뿐.
그런데 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해랑의 이마 위에 얹혀졌다. 해랑은 무의식중에서도 손을 뻗어 그 따뜻함에 다가갔다.
드디어 그 따뜻함을 낚아채는데.
“가지 마!!!”
번쩍 눈을 뜨는 해랑.
곧 낯익은 천장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자신의 처소임을 깨달았다. 식은땀에 이부자리도, 그의 옷도 다 젖었다.
“괜찮으십니까?”
해랑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춘화가 아니었다.
연해연. 해랑의 하나 뿐인 여동생.
동글동글한 얼굴에 새끼 고양이를 닮은 그녀는
오라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안 그래도 동그란 얼굴이 오빠를 걱정하는 마음에 만두 같이 퉁퉁해졌다. 귀여운 동생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는 해랑.
하지만 동생일지라도 손은 좀 곤란하다...
해랑은 해연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순간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해연.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을 어찌 안 합니까? 무슨 술을 그렇게...
술도 못 자시는 분이!”
“술?”
해연의 뒤에서 놈이가 두 볼에 손을 얹고 해랑을 향해 고개를 갸웃갸웃 귀여운 척을 하고 있었다.
덩치도 징그럽게 큰 놈이... 진짜 한 번 경을 쳐야.
“그러게 말입니다, 애기씨. 도련님이 어제 말술을 막 드시는데...”
“놈이 네가 더 나빠! 오라버니가 그러시면 네가 말렸어야지!”
“네? 아...죄송합니다. 애기씨...”
서슬퍼런 해연의 반응에 깨갱하는 놈이.
그 모습은 흡사 커다란 호랑이가 작은 새끼 고양이에게 찍 소리 못하고 혼이 나는 모습과 같았다.
하룻강아지...아니 하룻고양이인가.
암튼 하룻고양이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어릴 때부터 저 둘은 저래왔다.
해랑에게는 막 대하던 놈이는 해연에게만은 꼼짝을 못했다.
‘해연을 은애해서겠지...’
오래 전 놈이가 해랑에게 속마음을 들킨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 그들에게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해연이는 해연이를 가장 은애하는 해랑 오라버니랑 성례를 올릴 거야!”
“해연아~ 내가 널 은애하는 것 맞지만... 우리는 남매라 성례를 올릴 수 없어.”
지금보다 더 어렸던 해연이 어디서 뭘 듣고 왔는지 해랑과 성례를 올리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해랑의 계속된 설득(?)에 해연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놈이의 손을 잡았다.
“그럼, 해연이는 놈이랑 성례를 올릴게. 놈이가 오라버니 담으로 날 젤 은애하잖아?”
“아니, 해연아. 그건 또...”
어린 해연이지만 놈이가 자신을 은애하고 있음을 알고 있단 말인가.
해랑은 이내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놈이와 눈이 마주치는데.
놈이의 복잡 미묘한 표정과 처연함에 해랑의 가슴이 저릿해왔다.
‘그때... 해연을 재우고 나서 놈이와 화월정으로 산보를 나왔었지.’
놈이가 연못을 바라보며 정자 난간에 걸터앉아 퉁소를 불었다. 서글픈 퉁소소리가 연못에 비친 차가운 달빛에 스며들어 해랑의 마음마저 출렁이게 했다.
이윽고 연주를 멈추는 놈이.
“내가 천한 신분이 아니면... 해연 옆에 끝까지 있을 수 있을까?”
“놈아...”
“해랑... 못 들은 걸로 해라. 순간 헛소리를 지껄였다.”
“...”
“나는... 해랑 네 옆에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너는... 날 버리지 마라.”
해연을 은애했고 지금도 여전히 은애하는 놈이.
해랑은 이제 다 큰 처녀티가 나는 해연을 보자
예전 일이 주마등처럼 휙휙 스쳐지나갔다.
“오라버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아니다... 그나저나 이제 의복을 좀 갈아입어야 하는데... ”
“좀 더 누워계시는 게... ”
“괜찮다. 처소에 돌아가 있으렴. 내 조만간 들를 테니.”
해연은 좀 더 오라버니 곁에 있고 싶지만 단호한 해랑의 말에 조용히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해연이 갑자기 휙 뒤를 돌더니 해랑을 똑바로 쳐다본다.
“오라버니 몸은 오라버니만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 가문의 장자이시고...그리고 또...오라버니가 잘못되면 소녀도 죽어 버릴 겁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뛰어나가는 해연. 놈이도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넌 어디가?”
“애기씨 데려다 드리려고.”
“바로 코앞인데 뭘 데려다 줘? 그나저나 그건?”
“애기씨 돌부리에라도 넘어지면 안 되는데...”
“야!”
“알았어, 알았어. 잠깐 기다려.”
놈이는 투덜거리며 잠시 후 건넛방에서 들고 온 상자 하나를 해랑에게 건넸다. 해랑이 상자를 열자 모습을 드러내는 검(劍).
어젯밤 자객이 해랑의 목을 겨눴다 다시 해랑에게 빼앗겼던 칼이었다.
붉은 선혈이 묻은 검에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살기(殺氣)가 느껴졌다.
검을 유심히 살피던 해랑은 칼끝의 특이한 문양에 시선이 멈췄다.
두 개의 작은 원 사이를 갈라놓은 또 다른 큰 원.
그 큰 원 안에 작은 원 하나가 갇혀 있는 듯 보이는 문양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었다.
그림자 자객들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고 춘화야사와의 관계는?
해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검을 내려놓았다.
‘잠깐... 춘화야사 그 화첩은 어디에 있지?’
해랑은 상자를 살피다 다시 놈이를 불러보지만 이미 해연을 따라간 뒤였다. 이때 건넛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하아..
‘신음소리?’
그리고 신음소리와 함께 해랑을 자극하는 이 달콤하고 아찔한 향기는...
복숭아 향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