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다.’
집으로 돌아온 해랑은 머릿속에 오직 춘화야사 생각뿐이었다. 정확히 그 화첩 속의 그녀, 춘화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그림 속의 여인일 뿐인데 그녀만 생각하면 왜 이리 가슴이 뛰고 설레는 걸까? 꿈속에 봤던 여인과 같아서? 아님 단지 닮은 그림일 뿐?
‘춘화야사를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허나!’
양반의 자제가 보는 눈들이 있지...
남녀상열지사인 그 책을 어떻게 사온다 말인가! 놈이는 물론 서사주인인 박서방까지. 춘화야사를 사오기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드는 해랑.
‘꼭... 사가지고 올 필요가 있나?’
잔뜩 찌푸려졌던 해랑의 미간이 그제야 펼쳐졌다.
그렇다. 몰래 가지러 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밤. 작전을 실행하리라 해랑은 결심했다.
일명 ‘춘화 구출(?)작전.’
‘기필코 그녀를 구해오리라!’
드디어 결전의 밤.
축시에 은밀하게 거사를 치르기로 한 해랑은 읽어야 할 책은 이미 눈 밖에 났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을 내는 놈이.
“도련님, 이제 침소에 드실 시간입니다.”
“그래. 놈이 너도 이만 물러가 쉬거라. 나는 좀 더 책을 읽고...”
“아까 좋은 거 많이 보셔서 잠이 오지 않으실 테지만 편히 주무시길...”
“야!”
해랑은 버럭 하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문 밑에서 놈이는 바로바로 반응하는 해랑이 재밌다는 듯 히죽히죽.
해랑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놈이에게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과 종이 아닌 다시 죽마고우 친구로 돌아간 두 사람.
“아까 낮부터....좀 심하다!”
“왜? 넌 좀 그런 거 많이~ 봐야 할 필요가 있어.
성교육 차원으로다가. 순둥순둥 우리 해랑이.”
해랑은 능글맞은 놈이의 애교(?)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둘은 그런 사이였다. 투닥거리다가도 금세 풀리는.
엄연한 반상의 법도가 있으나 그것을 떠나 둘은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한 죽마고우였다.
“암튼 아까 본 책... 너무 떠올리지 말고.
안 그럼 거기(?) 밤새 괴롭다?”
“천하의 난봉꾼. 잘 자라, 놈.”
이윽고 다시 깊어진 어둠.
해랑의 처소에도 불이 꺼졌다. 축시가 되자 몰래 처소에서 나오는 해랑은 놈이의 처소를 살금살금 지나갔다. 놈이는 깊은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재빨리 담을 넘는 해랑.
“춘화 낭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가 곧...가겠소.”
너무 행복해서였을까? 해랑은 눈치 채지 못했다.
자신을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를. 아니 검은 그림자들을.
*
박고서사에 한달음에 도착한 해랑은 숨이 차서 죽을 지경.
잠시 숨을 고르고 동태를 살피던 그는 자연스럽게 박고서사 뒤 쪽문으로 들어갔다.
한편 건너편 지붕 위에서 이런 해랑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그림자들은 해랑이 쪽문으로 사라지자 지붕위에서 땅 위로 조용히 내려왔다.
해랑은 밀실로 들어가 문 바로 옆에 놓인 책상 위에서 촉을 찾아 불을 밝혔다. 순간 환해진 밀실 안.
“여기 어디였던 것 같은데?”
낮에 놈이가 던졌던 곳을 샅샅이 뒤져보지만 춘화야사는 온데간데없었다. 박서방이 다시 꽂아 놨나 싶어 촉을 들어 책장을 꼼꼼히 뒤지지만 보이질 않는 춘화야사.
‘설마... 그새 팔린 것은 아니겠지.’
이때 밀실의 한 쪽 구석에서 뭔가가 반짝 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마치 해랑을 부르는 듯.
‘웬 빛이...?’
해랑이 가까이 다가가자 더욱 빛을 발하는 그것.
무엇에 홀린 듯 빛을 따라간 그는 그 빛의 근원지에 다다랐다.
‘춘화야사!’
춘화야사 안에서 반짝반짝 빛이 발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심장 박동처럼. 해랑은 무슨 조화인가 싶으면서도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책을 잡으려는데.
-꽝!
해랑의 손이 책에 닿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동이, 아니 지진이 일어났다. 그 순간 끼이익 해랑 쪽으로 커다란 책장이 기울더니 와르륵 수백 권의 서책들이 해랑을 덮쳤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그대로 눈을 감는 해랑. 그 와중에도 춘화야사만큼은 놓치지 않으려는데.
‘서방님!!!’
밀실에 울려 퍼지는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 그러자 해랑을 덮치던 책들이 중력을 잃어버린 듯 그대로 정지, 공중에 둥둥. 이 해괴한 조화에 해랑은 문득 손에 쥐여진 춘화야사를 확인했다.
좀 전까지 찬란히 빛나던 빛은 이미 사라지고 다시 평범한 책으로 돌아간 춘화야사.해랑이 책을 쥔 손을 살짝 움직이자 다시 책들도 힘없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주변에만 빙 둘러가며 떨어진 책들.
‘분명 시간이 멈췄다!’
해랑은 다시 허리를 곱게 펴고 춘화야사를 바라보았다.
‘이 춘화야사가 날 살린 것? 아님 춘화... 그대가 날 살린 것이오?’
해랑은 춘화의 초상화가 그려진 그 장을 빠르게 넘겼다.
‘이럴 수가...’
춘화, 그녀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초상화가 있던 부분만 백지로 완전히 텅 비워져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화첩을 뒤적이며 확인해 보지만 감쪽같이 그림 속 그녀가 사라졌다.
이때 갑자기 휙 꺼지는 촛불. 그리고 해랑의 목에 서늘한 살기(殺氣)가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해랑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한 놈이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들에 둘러싸인 해랑.
“...뭣 하는 놈들이냐.”
순둥이 해랑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조금의 떨림도 없이 그들을 호통 치는 해랑.
하지만 그림자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랑이 움직이려하자 칼을 겨눈 그림자 하나가 그를 제지하며 칼에 힘을 줬다. 칼날이 해랑의 살갗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또르르 흘려내렸다.
이윽고 검은 그림자들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또 한 명의 그림자.
살기의 근원지.
“....그 년은 어디로 빼돌렸나?”
그림자의 말에 해랑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 년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