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 꿈이다.’
시원한 계곡가 너럭바위 위에서 한 꽃선비가 화선지를 펼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꽃선비는 꿈을 꾸고 있는 연해랑, 자기 자신이었다.
꿈속의 해랑은 자기가 보기에도 잘.생.겼.다.
붓으로 그린 듯 길고 깊은 눈매에 짙은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이제 곧 하늘을 바라보겠지.’
오늘의 꿈 역시 저번 꿈과 다르지 않았다.
해랑은 이제 꿈속의 자신이 무엇을 할지 예상하고 있었다.
‘춘란(春蘭)을 완성하고...’
꿈속의 해랑은 화선지 위 난초 그림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고 시원하게 뻗어나간 난초 잎은 해랑의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 같고, 아름답게 핀 꽃은 해사한 그의 얼굴과 같았다.
‘이제... 그녀 차례인가?'
이쯤 되면 나타나는 꿈속의 그녀.
역시나 해랑의 뒤로 향긋한 복숭아 향기가 나면서 그의 머리 위로 살짝 그림자가 졌다.
- 궁중의 화원이 와서 자기 뺨을 치고 통곡할 솜씨이옵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녀.
하지만 오늘의 꿈에서도 여전히 눈부신 그녀는 복숭아 향내와 함께 아찔하게 다가왔다. 한참을 그림을 바라보던 그녀는 작고 뽀얀 얼굴에 담긴 동그랗고 큰 눈망울로 해랑을 쳐다보았다.
청순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요염한 색기를 뿜어내는 저 붉고 탐스런 입술.
‘이건 늘 반복되는 꿈일 뿐. 하지만 저 입술은...’
갖고 싶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단지 꿈에 불과한데.
해랑은 금세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러자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다가오는 그녀.
- 어디 편찮으십니까? 얼굴이...
역시나 전에 꾸던 꿈과 똑같은 상황. 그 다음은...
‘ 분홍빛 치마를 살짝 들고선 사뿐사뿐 다가오겠지. 그리고 곧 발을 헛디뎌 넘어지겠지. 그러고 나선 언제나 끝... 꿈은 끝나지. 일장춘몽.’
해랑은 언제나 그렇게 끝나는 꿈이 아쉽기만 했다. 그런데.
- 진짜 어디가 편찮으신 게 맞나봅니다. 식은땀까지 흘리시고...?
‘이쯤에서 깨야 하는 데? 꿈이 계속...
그런데 저 여인의 향기는.’
달달한 향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진 해랑은 그녀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허둥지둥 팔을 휘둘러 쓰러짐을 겨우 면했지만.
문제는 해랑의 나쁜 (?) 두 손이 치자색 저고리 위,
정확히 그녀의 봉긋한 가슴 위에 올라가있다는 점.
-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떡 같구나.
- 떡이요?
- ...!
늘 꿈속의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지 이렇게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너무 놀라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뗄 생각도 못하는 해랑.
-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실 겁니까? 법도를 잘 아시는 공자께서...
- 아...! 미...미안하오. 그...그런데...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은 해랑은 그녀의 가슴에 손을 그대로 얹은 채 90도로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손을 떼라고!
하지만 마음과 달리 떨어지지 않는 이 죽일 놈의 나쁜 손.
-이..이 손들이 왜 이러는 건지. 낭자...미..미안하오. 이게 꿈인데 내 마음대로 잘... 근데 꿈인데 왜...아, 그..그게 아니라.
- 풋. 농은 여전하십니다. 그런데 소녀... 작은 청이 있습니다.
무슨 청? 무엇이든 해 주리라...
그런데 이건 꿈인데 그 청을 들어줄 수나 있을까.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스럽기만 해랑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바짝 다가와 그의 목을 감싸는 그녀.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해랑의 귀를 간질였다.
- ...해 주세요.
- 네? 뭐...뭘 말이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한 번 붉은 입술을 종알거렸지만... 뭐라고?
-...더 해 주세요.
더? 뭘 더?
겉은 여자 꽤나 후리게 생겼지만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는 순둥이 해랑.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꿈이지만.
-...기다려줘요.
그녀는 해랑이 묻기 전에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그를 안은 채로 계곡물로 풍덩-
“으악!”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 해랑.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다 겨우 깼다.
날씨가 더워 툇마루에 상을 펼치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이런 꿈이나 꾸고.
겨우 정신을 차린 해랑은 꿈속의 그녀를 떠올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꿈이 분명할 텐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 손의 감촉은 뭐란 말인가.
“....더 해 주세요. 흐읍.”
꿈이 덜 깼나?
해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팡팡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이제는 헛것이 계속 들...”
“좀 더 해 달라니까~”
이건 꿈이 아니다.
진짜 해랑의 귓가에 들리는 신음소리에 가까운 여인의 목소리.
누구냐, 넌?
*
“하악~”
여인의 신음소리는 분명 꿈이 아닌 생시였다. 해랑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바람에 반상이 넘어지면서 책들이 마루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 이 소리들은...어디서 나는 거지? 설마.’
여인의 신음소리는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낮에 이런 요사스런 소리가 들리다니 이는 필시 요괴이거나 아님 드디어 글공부에 지친 해랑 자신이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해랑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귀신에 홀린 듯 따라가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인 헛간 앞에 다다르자 두 눈을 질끈 감고 벌컥 문을 여는데.
“누구냐, 넌! 사람이냐? 요괴냐?”
“에구머니나!”
어두운 헛간 안쪽에 헝클러진 남녀 그림자.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그림자 하나가 그를 들이박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어어어?!”
- 쿵.
해랑을 밀치고 도망가는 여인 때문에 해랑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킬킬대는 남은 검은 그림자 하나.
“우리 순둥이 해랑 도련님~ 많이 놀라셨습니까?”
어두컴컴한 헛간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한 남자.
큰 키에 딱 부러진 어깨.
놈이다. 저 자식이 또!
“이게 다 무슨 짓거리냐! 대낮부터!”
“상상하시는 그 짓거리죠. 아쉬워라, 이제 막 시작했는데.”
놈이가 씩 웃으며 입술을 슥 닦았다. 그리고 넘어져 있는 해랑에게 손을 내미는 놈이. 해랑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서로를 마주보는 훤칠한 두 남자. 해랑과 놈이.
한 명은 한양 최고의 꽃미남.
큰 키에 여자보다 더 고운 선을 가진 그는
그저 서 있기만 해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고귀한 그대, 연판서의 장자 연해랑.
또 다른 훈남은 해랑의 사환, 몸종인 놈이다.
딱 벌어진 넓은 가슴에 탄탄한 근육질 몸매. 꽃미남 해랑과는 또 다른 상남자 매력을 풍기는 놈이는 비록 신분이 천하디 천하나 해랑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죽마고우였다.
해랑은 말없이 놈이를 바라보다 갑자기 손을 휙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놈이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해랑과 바짝 밀착.
해랑은 그런 놈이를 보며 싸악 웃어주는데.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해랑은 놈이의 복부에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피한다고 피한 것이 잘못되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세게 찧는 놈이.
-꽈당.
“ 아이씨! 도련님아!”
“ 아이씨?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게냐? 대낮부터 흉흉한 짓거리나 하고는...”
해랑은 쯧쯧 혀를 차다 넘어져 있는 놈이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 입만 맞췄다구!...요. 우리 순둥이 도련님께서는 못 해 봤으니 알 리가...으악!!!”
놈이를 잡았던 손을 미련없이 놓는 해랑. 결국 놈이는 또 다시 엉덩방아.
이번엔 제대로 찧었는지 꼬리뼈 쪽을 부여잡고 죽는 시늉이다.
해랑은 무덤덤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탁탁 털고 휙 뒤돌아섰다.
"그런데...나는."
다시 몸을 돌려 놈이 쪽으로 다가오는 해랑. 놈이는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가 더 날이 서서 놈이를 째려보는데.
해랑 도련님 저거...
“절대 못.하.는. 게 아니라.”
은근 뒤끝 있는 도련님이라는 걸 깜박.
"안.하.는.것.이다. 맹세코."
안 하는 게 더 이상하거든요.
*
“까악~!”
한양 최고의 꽃미남 해랑과 그에 못지않은 상남자 매력의 놈이가 밖에 나서면 저잣거리 여인네들은 하나 둘씩 픽픽 쓰러졌다.
“우리 해랑님 진짜 인간미 없다... 어쩜 저리 완벽하게 잘 생겼지?”
“난 쉬운 놈이가 더 좋아. 해랑 도련님은 너무 까칠해. 눈길 한 번 아니 주시니...”
“그게 해랑님의 진짜 매력이지. 괜히 차도남이겠어?
조선 최고의 냉미남, 차가운 도성(都城) 남자. 연해랑님♡”
"근데 소문 들었어? 해랑 도련님 말이야..."
"아, 또 여종을 내치셨다는? 그 얘기야 장안에 파다하지~
그래서 놈이가 모든 시중을 든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냐?"
"아니, 여종을 내치시는 이유 말야...놈이를 특별히 은애하신다는..."
"특별히? 그러니까 남...남색을 밝히신다고?"
"어머,어머!"
남색이란 말까지 나오자 여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놈이.
"안녕들 하신가 여편네들~ 근데 남색은 잘 모르겠고.
도련님이 날 특.별.히 여기시는 건 맞아.
특히 한밤중에 나를 은밀히 불러내시어~"
"까악"
한밤중? 은밀? 저 놈이 어쩌고 어째.
해랑은 당장 달려가 놈이를 끌고 와 치도곤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저 놈이가 지금 여.인.들. 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해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왔지만 어쩔 수 없이 묵묵히 앞만 보며 갔다.
“아이고야~ 우리 순둥이 도련님~ 얼굴 빨개져 가지고 또 흥분 하신거임?"
“누구보고 순둥이라고 하는 거냐?! 그리고 내가 언제 흥.분.을!”
놈이 저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랑은 저도 모르게 ‘흥분’이라는 말을 크게 뱉고 말았다.
헉...
순간 해랑에게 집중되는 시선들.
"까아악~♡"
여인들의 자지러지는 소리에 불타는 고구마가 된 해랑은 거의 뛰다시피 자리를 서둘러 피했다.
이를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놈이.
“흥.분.한 해랑 도련님! 흥.분.하.지. 마시고 같이 갑시다!"
자신을 놀리는 놈이를 보며 해랑은 오늘 서사(書肆- 조선시대 서점)에 다녀와서는 제대로 경을 치겠다고 다짐했다.
‘흥분한 주인이 어떻게 되는지 내 오늘밤 똑똑히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