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붉은 화마로 둘러싸인 장경각.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로 장경각에 있는 모든 책들은 이미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단 한 권을 제외하곤.
곧 무너질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 책을 꼭 안은 채 뒷걸음치는 한 여자, 세령.
나인의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고귀함은 나인들의 의복 따위에 가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령에게 장검을 겨누고 있는 한 남자.
푸른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세령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 역시 보통의 선비들과는 달랐다.
“...계시가 내려졌소. 이제 그 책은 위험하오.”
“위험한 건 처사님이십니다. 어찌 없애려고만 하십니까?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정녕 잊으셨단 말입니까?”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없앨 것이오. 이 나라를 위해, 나의 벗들을...위해.”
“나라... 벗들... 이것들이 정인보다 더 중요하십니까?”
금세 무너져버릴 듯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세령. 그녀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그녀의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는 유처사.
“무영... 그 자가 곧 도착할 것이오. 그 전에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처사님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까?”
유처사는 아니라고 세령에게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서 있는 그녀를 당장이라도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힘겹게 세령의 목에 칼날을 세우는 유처사.
“이제 끝을 내야 하오. 제발 내가 그대를 베는 일은 없길 바라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찰캉
“칼 치워.”
세령과 유처사 사이로 불쑥 들어온 한 남자, 검은 도복을 입은 무영이었다. 무영은 유처사의 칼 위에 자신의 칼을 대고는 으르렁거렸다.
이미 붉게 변해버린 무영의 눈에는 살기만 가득.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구나.
역시 책의 존재를 알아버렸단 말인가.
유처사는 일을 빨리 처리하지 못한 것에 후회가 일었다.
무영은 유처사에게 칼을 겨눈 채 세령을 흘깃 바라보았다.
“세령, 내 뒤로 와.”
“무영...”
“빨리 내 뒤로 오라고!”
“....그럴 순 없어. 무영.”
세령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더욱 불을 뿜어내는 무영의 눈.
“하? 내가 또 속은 건가. 책을 가져오겠단 말도, 그리고 나를...”
무영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녀의 마음은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이토록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무영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령, 넌 여전히 저 자식을... 그렇다면.
책이라도...가져야겠어.”
“그건 내가 절대로 용납 못한다, 무영.”
유처사는 완전히 검은 기운에 둘러싸여 살기를 뿜어내는 무영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하지만 무영은 그 칼날을 가볍게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무영의 칼에서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가 나기 시작.
이에 순간 정신을 잃고 휘청한 유처사.
무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처사를 향해 서슬 퍼런 칼을 휘둘렀다.
“안 돼!”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유처사 앞으로 달려나온 세령.
결국 무영의 칼날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또한 품고 있던 책 역시 반토막이 나 땅에 툭하고 떨어졌다.
반토막으로 잘려진 서책 사이로 흥건히 젖어드는 새빨간 피.
“세령!!!”
"세령!!!"
대답 없는 그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두 남자.
그리고 그대로 그들을 집어삼켜버리는 화마(火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