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응…….”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는 느낌을 받으며 상진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이봐.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후아는 어디로 가고?”
눈을 떠보니 다정마도 양휘옥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 후아 녀석, 벌써 갔습니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내일까지 자네 담당이 아닌가?”
“그, 그게…….”
곡두표 상진은 대답을 얼버무리는 한편으로 왠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 아무리 그래도 깨워주고 갈 것이지.’
그러면서 고개를 흔드는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갖다 대보니 머리에 뭔가가 둘둘 말려있었다.
풀어보니 녀석이 두르고 있던 일자건(一字巾)이었다.
‘녀석……. 그래도 잔정은 있군…….’
이 일자건은 묵자후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묵자후가 네 살 때였던가? 몇몇 마인들이 이마에 영웅건을 두르고 있는 걸 보고 자기도 만들어 달라며 생떼를 부려 금초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푸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걸로 자신의 상처를 동여매주다니…….
괜히 콧날이 시큰했다.
그런데,
“저건 또 뭔가?”
양휘옥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바닥에 낙서를 해 놨다.
안력을 모아보니 웬 원숭이 한 마리가 혀를 쏙 내밀고 있는 그림이었다.
‘요 망할 놈의 자식!’
상진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묵자후가 남긴 그림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나쁜 놈! 공력을 쓰지 않기로 해놓고…….’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놈의 초식 운용능력에 놀라 녀석이 첨경, 주경, 화경 등 온갖 공력을 다 쓰고 있다는 걸 깜빡해버렸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녀석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당한 건 아무 상관이 없지만 부디 이 일로 녀석이 자만하지 말아야 할 텐데.
상진이 생각하기에 묵자후는 아직 진정한 실전을 겪어보지 못 했다.
눈앞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가는 실전.
그리고 등 뒤에서 암기가 날아들고 사방에서 적들이 동시에 달려드는 집단전도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내일은 이걸 알려줘야겠군. 강호는 자만하거나 방심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오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데 양휘옥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봐.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 그 피 묻은 건은 뭐고 또 저 낙서는 뭔가?”
이 선배는 색마로도 유명하지만 떠버리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상진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연무장을 떠났다.
“허, 저 친구. 대체 무슨 일이지?”
양휘옥은 저홀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텅 빈 연무장을 보고 뒤늦게 발을 굴렀다.
“근데 후아 이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얼른 녀석에게 어제 가르쳐 준 색공(色功)에 대해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데…….”
다정마도 양휘옥.
그가 뜬금없이 연무장을 찾아온 이유였다.
***
“끼야호! 이힛!”
묵자후는 괴성을 지르며 동굴 벽 양쪽을 번갈아 후려 찼다.
그 반동을 이용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멋있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킥킥. 이제야 그 아저씨 별호의 비밀을 알았어. 세상에, 울부짖는 표범이라더니, 킥킥킥.”
묵자후는 비무 내내 우스워 죽는 줄 알았다.
곡두표 상진이 공세를 뿌려올 때마다 그의 얼굴 표정이 희한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별호 그대로 표범이 징징 우는 것 같달까? 그래서 웃음을 참느라 자기도 모르게 공력을 쓰고 말았다.
“그래도 뭐, 당한 사람이 바보지…….”
저 멀리 보이는 연무장을 향해 혀를 쏙 내민 묵자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잠시 턱을 괴었다.
‘그런데 어디로 놀러가지?’
모처럼 얻은 자유인데도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생사동으로 가자니 엄마가 왜 벌써 왔냐며 의아해 할 것이고, 폭마동으로 가자니 폭마 백부가 요즘 들어 무척 바쁜 것 같았다.
‘하긴 어서 용암의 물길을 틀어야 하니…….’
이미 발견한 지 오 년이 지났지만 용암의 물길을 트는 일은 지지부진했다.
자칫 천금마옥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 있기에 치밀한 계산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만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는 이곳에 용암의 물길을 틀만한 도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들 생으로 땅을 파서 길을 내야 했고, 이제 겨우 마무리 시점이 다가왔다. 그 일을 폭마 백부가 맡고 있었던 것이다.
“쳇! 이건 너무 허탈하잖아? 고생 끝에 겨우 자유를 얻었는데 갈 곳이 없다니, 참, 나…….”
묵자후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짜증을 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두 눈을 반짝였다.
‘맞아! 그때 그 괴물 같은 아저씨…….’
종유석 뒤로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동굴들을 보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른들에게 듣기로, 그 아저씨는 용암동굴 부근에 유폐되어있다고 했다.
‘흠. 어쩐다? 그곳은 금지구역이라던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오늘따라 왠지 가보고 싶었다.
어른들이 금지구역이라며 못 가게 하니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몰랐다.
“좋아! 가보는 거야! 가서 그 아저씨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짝 엿보고 오는 거야.”
묵자후는 신형을 솟구쳐 다시 동굴 벽을 번갈아 후려차기 시작했다.
“에게게? 이게 뭐야?”
용암동굴 입구에 다다른 묵자후는 잠시 당황했다.
겉보기엔 멀쩡해보이던 곳이 한발 들이밀자마자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에 놀라 화들짝 발을 빼니 다시 멀쩡한 동굴로 보였다.
“아! 이게 바로 진법이라는 거구나!”
묵자후는 내심 탄성을 터뜨렸다.
지난 수년간 묵자후는 마뇌에게 진법을 배웠었다. 그러나 이론으로만 배운 것이라 한 번도 겪어보거나 펼친 적이 없었다.
“어쩌지? 한번 도전해봐?”
잠시 망설이던 묵자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사내가 아니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묵자후는 가부좌를 틀었다. 이때까지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기 위해 명상에 잠긴 것이다.
하지만 반각도 지나지 않아 튕기듯 일어서고 말았다.
“아유, 머리 아파! 생각할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지네…….”
원래 진법이란 게 그렇다.
모르는 사람들은 진법이라고 하면 제갈량의 팔진도나 조조의 팔문금쇄진 같은 군부의 진법만 떠올리지만, 강호의 진법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변화막측(變化莫測)했다.
위로 하늘을 속이고 아래로 사람을 속여, 풍운만변(風雲萬變)하고 기문둔갑(奇門遁甲)하니 그 기기묘묘한 변화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그런 이유로 입문하는 사람은 많지만 천고의 기재가 아니면 그 진체(眞諦)조차 엿보기 힘들어, 제 아무리 이름난 석학이라도 어렵다며 고개를 흔드는 게 바로 진법이었다.
이제 겨우 수삼 년 배운 것에 불과한 묵자후가 그 복잡다단한 이치를 어찌 다 깨달았으랴.
“쳇!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좀 더 열심히 배워둘 걸…….”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한숨을 푹푹 쉬며 어찌할까 고민하던 묵자후는 어느 순간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좋아! 제 까짓게 어려워봤자 진법이지. 일단 부딪치고 보는 거야.”
어차피 진법은 태극, 음양,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칠성, 팔괘, 구궁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게다가 제 식구 밖에 없는 이곳에 설마하니 살상진(殺傷陣)을 펼쳐놓았겠냐 싶어 덜컥 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보자……. 일단 오행진이라 가정하고, 중궁(中宮)인 토(土) 방위부터 찾아볼까?”
그러나 마뇌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던가?
“어이쿠!”
중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이글거리는 화염이 나타나고 혼백을 뒤흔드는 귀곡성이 들려온다.
“윽! 이게 뭐야? 갑자기 왜 이런 변화가? 으으…….”
하지만 이미 진법은 이목을 속이는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는 묵자후는 당황한 가운데서도 파해법을 떠올려봤다.
‘갑자기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소리로 혼란을 주니 화(火) 방위로 온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네? 화 방위라면 뭔가 즐거운 환상이 나와야 할 텐데…….’
내심 이상하다 싶었지만 배운 대로 원리를 따져봤다.
‘화(火)는 붉으니 구궁의 칠적(七赤)이라. 칠적은 팔괘의 태(兌)에 해당하니 내가 서 있는 곳은 서쪽. 그래! 오른 쪽으로 가면 중궁이 나올 것 같다. 오른 쪽으로 가보자!’
그러나 웬 걸?
중궁이 나오긴커녕 사방에서 시퍼런 창칼이 날아왔다 .
“으악! 이게 아닌데? 갑자기 왜 이놈들이 튀어나와?”
깜짝 놀란 묵자후는 후다닥 뒤로 달아났다. 그런데,
“어이쿠, 이건 또 뭐야?”
이번엔 발밑에 징그러운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으아아! 침착, 침착하자! 어차피 진은 환상이야. 원리만 파악하면 그 안에 답이 있어.”
그러나 답이 나오긴커녕 오히려 머리만 복잡해진다.
‘끙. 발밑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하지? 보자……. 오행 중에 토(土) 방위의 기(己)가 젖어있는 땅이나 물속에 가라앉은 흙을 의미하니 이곳을 토 방위라고 봐야하나? 그렇다면 생(生)·경(景)·개(開), 상(傷)·경(驚)·휴(休), 두(杜)·사(死)의 팔문(八門) 중에 경문(驚門)이란 말인데……. 어이쿠! 야단났다! 저놈들은 진짜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묵자후는 또 다시 진속을 헤맸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 다녀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갈수록 오리무중이라, 혼은 이미 구만리 밖으로 달아났고 사지 역시 맥이 풀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헉, 헉……. 이게 뭐야? 결국 오행진도 아니고 칠성진도 아니란 말이잖아?”
결국 묵자후는 혀를 길게 빼고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너무 지쳐있어 자기가 누워있는 곳이 독사굴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묵자후. 오히려 그로 인해 생문을 발견하게 됐다.
“뭐야? 웬 뱀들이 몸 안으로 기어들어와? 또 환상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방위를 파악하기 위해 좌우를 살피는데 바로 앞쪽에 하얀 안개가 깔려있고 그 너머로 웬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앗! 저기다!”
묵자후는 너무 기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독사 떼가 마구 몸을 물어왔지만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폴짝 안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안의 괴인과 눈이 마주치게 됐다.
“거기 누구냐?”
‘아차!’
괴인이 눈알을 부라리며 천둥 같은 고함을 지르자 묵자후는 깜짝 놀라 다시 진 안으로 달아났다. 그제야 저 괴인이 누군지 깨달은 것이다.
오년 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던 사람.
그 무시무시한 사람이 갇혀있는 곳에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들려 했다니.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바로 스무 발짝 앞에 자신이 서 있건만 전혀 못 알아보고 있었다.
‘아! 진법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때부터 묵자후는 편안한 마음으로 흡혈시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독사들이 마구 허벅지를 물거나 목을 휘감아왔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
유폐동(幽閉洞)은 예상외로 컸다.
입구만 해도 서너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유등 아래 앉아있는 흡혈시마 뒤로도 칠흑 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어 깊이도 만만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입구를 막아놓은 바위는 이미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있고 그 주변으로 박쥐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흡혈시마는 그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왠지 낯설어보였다.
축 늘어난 살집 아래 묻힌 새우 눈은 여전했지만, 하늘을 향하던 콧등은 아래를 향해 짓이겨져있고, 두툼하던 입술 역시 피투성이로 변해있었다.
거기다 광대뼈 한쪽이 보기 흉하게 함몰되어 있고 이빨도 서너 개 부러진 가운데 턱 부근이 온통 찢겨져있어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묵자후는 그 속사정을 짐작했다.
‘동굴을 탈출하려다가 진법에 걸려 무진장 다친 모양이구나…….’
정확한 추측이었다.
묵자후처럼 진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환상에 당황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진 안에 숨어있는 뾰족한 바위나 종유석 등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사연이야 어찌됐던 그토록 흉포하던 사람이 저리 초라한 몰골로 박쥐 시체만 물어뜯고 있는 걸 보자 왠지 가슴이 아파왔다.
그래서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는데, 귓전으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니까? 왜 대답을 안 해?”
마치 상처 입은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에 놀라 잠자코 침묵을 지키자 흡혈시마가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흐흐흐. 난 네놈이 누군지 알아. 네놈은 이곳에서 가장 비겁한 놈, 그래서 그 별호조차 비겁도라 불리는 묵가 놈의 아들이지?”
그 단순한 격장지계에 묵자후가 그만 말려들고 말았다.
“아니야! 우리 아빤 비겁도가 아니에요! 이곳에서 가장 용감한 생사도란 말이에요!”
묵자후가 발끈 소리치며 앞으로 나서는 순간,
“이놈! 걸렸구나!”
흡혈시마가 뇌성벽력 같은 호통을 지르며 묵자후를 덮쳤다.